Along with the Gods: The Last 49 Days
<신과 함께-죄와 벌>이 귀인 자홍(차태현 분)의 삶이 7개의 어떤 지옥에도 빠지면 안 되는 이유를 강림(하정우 분), 해원맥(주지훈 분), 덕춘(김향기 분)과 함께 낱낱이 밝히며 지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서사였다면, 그 후속작 <인과 연>은 사람과 사람, 그리고 우리가 생에서 관계를 맺으며 맞닥뜨리는 -아마도, 어쩌면- 필연적인 가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인과 연>이라는 부제에 걸맞게 영화는 ‘인간’에 대한 몇 가지 시선을 미리 장착한다.
1. 나쁜 상황이 나쁜 인간을 만든다.
영화가 사람을 보는 첫 번째 시선은 맹자의 ‘성선설’에 기초한다. 인간은 본래 선한 상태로 태어난다는 ‘성선설’은 영화 속에서 성주신(마동석 분)에 의해
“나쁜 인간은 없다. 나쁜 상황만이 있을 뿐.”
이라 언급한다. 그 ‘나쁜 상황’이란 무엇인가. 성주신이 말하는 ‘나쁜 상황’을 영화 속에선 할아버지 허춘삼(남일우 분)과 손자 허현동(정지훈 분)으로 좁힌다. 손자 허현동의 어머니는 자신을 낳다가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도박 빚으로 필리핀으로 도주했다. 현동은 지금 같은 시대에 홍역을 앓고, 제때 초등학교에 들어가지도 못한다. 그리고 도시 재개발에 의한 철거민이다. 이승에서 고아나 다름없는 현동은 영화 속에서 분명 ‘나쁜 상황’을 여러 개 맞닥뜨리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영화 속 어린이 현동은 이 ‘나쁜 상황’에 의하여 ‘나쁜 인간’이 되는가? 지켜보자.
2.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영화가 사람을 보는 두 번째 시선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가치에 기반한다.
강림의 아버지는 ‘불필요한 살생’을 금하고, ‘목숨의 무게를 다르게 재는 것’을 금지한다. 그렇기에 오랑캐에게 조차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신념에 의해 강림은 양동생에게 밀려난다.
3. 용서의 여러 가지 이야기
인간의 용서를 다루고, 용서가 이루어지는 방식을 다룬 서사를 떠올려보자.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가 원작인 영화 <밀양>이 그랬고, 공지영의 <우행시>를 원작으로 한 영화 송해성 감독의 <우행시>가 그 예이다. <밀양>이 용서할 권리조차 신에게 빼앗아가는 기독교의 ‘회개’를 말했다면, 우행시에서는 그 용서가 이루어지기까지 한 인간의 기구한 사연과 죄책감의 무게를 사형수 윤수를 가지고 무겁게 부여한다.
<인과 연>에서는 용서를 구하고, 받아들여지기까지의 어떤 ‘중간지점’에 대해 말한다. 용서의 한계에 대해서도 잠깐 언급한다.
넌 여진족 이덕춘이 아니라, 월직차사 이덕춘이야.
- 자기 부모를 살해한 사람을 은인이라고 불러요? 여진족 이덕춘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으셨잖아요.
용서를 구하지도, 받지도 못한 삶이 어떠한지는 강림이 염라대왕의 벌로 천 년 동안 괴로운 기억을 모조리 기억하며 안고 살아갔다는 사실로 대신한다. 죄의 기억과 죄책감의 무게보다, 용서를 구하는 건 이처럼 힘들다. 강림은 천 년 전 이복동생 해원맥과 천 년 전 전쟁 통에서 죄 없는 여진족 소녀였을 덕춘에게 더듬거리며 용서를 구한다. ‘더듬거리는’ 부분에서 영화는 용서를 구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동의한다. 용서는 곧 고백이고, 고백은 입 밖으로 꺼내는 용기이다. 그 고백이 받아들여질 수 없을 수 있기에 강림은 말을 더듬는다. ‘내가, 천 년 전에, 너희를’이라는 단어만 강림의 입 속에서 맴돌게 한다.
영화가 용서를 보는 시선은 낙관적이다.
“지금 이 바쁜 상황에 천 년 전 얘기를 왜 해”
라는 해원맥과 덕춘이 목소리를 모으는 것으로 화해의 제스쳐를 취하고, 용서가 받아들여지는 방식을 비춘다.
4. 세상이 계속되게 하는 주체 : 아이
천 년 전 전쟁 속에서 부모 잃은 여진족 아이들의 엄마 역할을 한 소녀 덕춘, 덕춘의 부모는 ‘하얀 삵’ 해원맥에 의해 죽었다. 하지만 여진족 아이들이 세상을 독립적으로 살아나게끔 물심양면으로 후견인을 자처한다. 삶이 다한 허춘삼이 중요한 게 아니라 실은 아직 어린 동현이가 중요하다는 성주신의 입장. 학교 갈 동현에게 받아쓰기시키는 춘삼. 영화는 세상이, 또는 삶이 계속되는 방식을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그 해답으로 내세운다.
일단 동현과 같은 아이나 여진족의 부모 잃은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나쁜 상황’에 의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울고만 있는 수동적인 존재로 만든다. 사실 누구든 나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면 어린이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사실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하얀 삵 해원맥은 부모 잃은 여진족 아이들과 덕춘이 자립할 수 있도록 ‘후견인’이 되어준다. ‘후견인’은 영화가 제시하는 미래에 대한 방법이기도 하다.
옛날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보채는 동현, 영화는 관객을 동현과 같은 아이로 마주 놓는다. 대신 앞으로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의 세상과 터에 대한 각자 상상력의 몫을 맡겨둔다. 그리고 ‘옛날이야기’를 듣고서 이제는 어떠해야 하는지 미래를 희망적으로 모색하는 건 자라서 기성이 될 극 중 동현의 몫이기도 할 것이다. 동현을 위하여 성주신은 철거촌의 어두운 분위기와 마카로 붉게 낙서된 욕설을 오색찬란한 그림으로 덧칠한다.
5. 그리고 어디에도 분류되지 못하는 시선들.
<인과 연>에서는 ‘인류애’라는 말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인류애’가 성립하게 하는 가치. 즉 인간다운, 인간적인 사람이 되게끔 만들어주는 가치를 행하지 않았다고 해서 ‘죄인’이 되지는 않는다. 용서를 하지 않았다고, 세상을 희망적으로 보지 않는다고 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남을 배신한다는 게 쉬운 것도 아니고.”, “펀드는 반드시 오른다.”
등의 대사로 영화가 인간과 삶을 지나치게 희망적으로 그려서 현실적이지 않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영화가 지나치게 낙관적일지라도 반대로 또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살 필요도 없는 게 우리 삶임이 성립된다.
“배고프고 바보처럼 살면 거지지. 이미 잘 쳐 먹고 잘 사는 사람 말은 절대 믿으면 안 돼. 다 자기들 가진 거 안 놓치려고 개소리하는 거야.”
“이승 사는 인간이나 저승 사는 귀신들이나 필요한 만큼 현명하고, 주어진 만큼 반응하면 되는데 말이지 자꾸 진실이 뭐냐고 물어보면.”
개소리하는 '기득층'과 적당히 사는 ‘소시민’에 대한 묘사도 나온다. 희망과 비관 사이에서 어디에도 끼지 못한 시선들, 이 또한 영화는 부분적으로 등장시키며 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