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을 준비하는 BBC의 선택, 유튜브와의 랜드마크 딜
대한민국 미디어 산업은 지금 엔진이 꺼진 채 거대한 쓰나미를 마주한 난파선과 진배없다. 세계 최초 5G 상용화,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 1위라는 화려한 인프라 간판 뒤에서, 정작 그 위를 달리는 미디어 정책은 여전히 주파수를 중심으로 한 20세기 아날로그 시대에 머물러 있다. 여전히 공영과 민영을 어떻게 구분할지, 콘텐츠와 플랫폼을 어떻게 나눌지만 가지고 지난 10여 년을 낭비하고 있다. 그 어떤 정책도 넷플릭스와 유튜브라는 글로벌 포식자들이 한국 시청자의 시간과 데이터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며 안방극장을 디지털 식민지로 만드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도 대책도 없다.
모든 논의는 이사회의 구성과 보도의 공정성 등등의 논의만 하다가 물리적 토대가 변화하고 있음에 대한 고민도 대책도 없는 상황이다. 이젠 위기라는 단어도 진부하고 부족하다. 지상파 광고 매출은 반토막이 났고, 만성 적자는 고질병이 되었으며, 경쟁력 있는 제작 인력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이는 단순한 경영 악화가 아니라, 100년간 이어온 지상파 비즈니스 모델의 완전한 붕괴이자 재앙이다.
그러나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정부와 방송사는 여전히 시청자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 'UHD 방송’에 대한 해답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고, 수신료 분리 징수를 하느냐 마느냐로 시간을 잡아먹고 있다. 그렇게 골든 타임은 또 흘러가고 있다. 급변하는 시장의 파도 앞에서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채 변화에 대한 논의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은 직무 유기다.
이와는 극명하게 대조적으로, 바다 건너 영국은 정부와 공영방송이 생존을 위해 혼연일체가 되어 '지상파 없는 미래'를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설계해 왔다. 거기라고 왜 내부적인 격론이 없고, 찬반이 없었겠나. 그 과정을 통해서 한 발짝 한 발짝 변화를 수용하고 앞으로 나가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 논쟁의 핵심에 지난 백여 년간 사용해 왔던 방송이란 단어의 기원이 되었던 주파수란 전송 수단이 놓여 있다.
기존의 주파수 중심으로 BBC의 미래를 설계할 것이냐란 질문(2022)이 내부에서부터 나왔고, 규제 당국이 이를 받아 규제 환경을 조정(2024) 해 주었다. 그럼에도 만족하지 못한 BBC는 자신의 콘텐츠 우월함을 내세워 남들과는 다른 압도적 계약(2026)을 유튜브와 했다. 이른바 랜드마크 딜이라고 일컫어지는 최근의 계약이다.
그 과정 하나하나는 치열한 논박의 결과였겠지만, 지나온 여정을 보면 마치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질서 정연하다. 지난 10년 동안 통합 방송법 논의만 하다가 아무것도 못하고 또다시 시청각미디어법이란 새로운 이름으로 지난 10여 년의 논의를 되풀이하고 있는 우리와는 확연히 다르다.
그들은 앉아서 죽느니 뛰어가다 죽겠다는 각오로, 방송의 정의를 '전파를 쏘는 행위(Broadcasting)'에서 '시청자에게 닿는 행위(Reach)'로 과감하게 재정의했다. 이 글은 지난 5여 년간의 BBC와 영국 규제당국의 여정을 뒤쫓는다.
2022년부터 2026년까지 영국이 밟아온 4단계 로드맵은, 낡은 껍질을 스스로 깨부수고 디지털 신대륙으로 탈출하는 'BBC 디지털 엑소더스(Digital Exodus)'의 기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간략하게 정리하는 이 글이 시발점이 되어 규제당국이나 연구기관은 물론 국내 공영방송사업자들이 조금은 진지하게 고민을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 본다.
2022년 12월 7일. 팀 데이브(Tim Davie, BBC 사장)의 왕립 텔레비전 협회(Royal Television Society)에서 충격적인 연설을 했다. 1927년에 설립된 왕립텔레비전협회는 영국 왕실이 후원하고 현재 찰스 3세 국왕이 후원자로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텔레비전 관련 포럼이고 공론장이다. 2022년 12월, RTS는 그해 100주년을 맞이하는 BBC를 위해 단독 초정 특별 강연을 청했다. 지나간 100년과 앞으로의 100년을 선언하는 자리였던 셈이다.
바로 이 자리에서 팀데이브는 자신들의 존립 기반인 '지상파 송출 중단(Switch-off)'을 예고했다.
"2030년대, 우리는 지상파 송출이 중단될 것이고 이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한다."
(A switch off of broadcast will and should happen over time, and we should be active in planning for it.)
그리고 이어서 말한다. 지상파 방송과 라디오가 중단된, 그래서 인터넷이 전부인 세상을 상상해 보라고 말이다.
팀 데이비는 "인터넷이 지상파를 대체하는 것은 '만약(If)'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When)'의 문제"라고 못 박았다. 그는 BBC가 더 이상 전파를 쏘는 '방송사'로 남아서는 안 되며, 인터넷 기반의 '디지털 퍼스트 미디어 조직'으로 재편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테나라는 하드웨어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콘텐츠라는 소프트웨어의 생존을 선택한 전략적 결단이었다.
물론 논란은 있었다. 지난 2016년 BBC는 예산절감과 디지털 실험을 내세우며 BBC Three를 TV에서 빼고 iPlayer 전용으로 전환했다. 결과는 실패였다. TV에서 빠져서 관심이 없어졌고, iPlayer에서도 젊은 층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2022년 2월 BBC Three는 다시 TV로 돌아왔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온라인 전환을 이야기했으니 비웃음을 받는 게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팀은 완강했다. 2030년대 지상파 송출 중단을 이야기한 그는 교양 채널 BBC Four와 어린이 채널 CBBC를 장기적으로 리니어방송에서 제외하고 온라인전용으로 전환하겠다고 방향성을 분명히 했다. (물론 아직까지 이 채널들은 여전히 남아 있으나, 신규 오리지널을 중단하는 등 온라인 전환을 염두에 둔 활동이 이어지고 있고, 2027년 경에는 중단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라디오의 송출 중단은 실제로 일어났다. 2023년부터 BBC는 잉글랜드 전역의 로컬 라디오 AM 송출을 순차적으로 중단했다. 유지비가 많이 들고 청취율이 낮은 아날로그 주파수를 끄고, 해당 청취자들에게 "디지털 라디오(DAB)나 BBC Sounds 앱으로 오라"라고 안내했다. BBC Radio 4의 상징과도 같았던 198kHz 장파 방송은 송신 장비의 부품 수급 불가 문제와 맞물려 2024년 3월부로 별도 편성을 종료했다. 사실상 수명을 다한 것이다.
이를 통해 BBC는 라디오의 송출을 중단하고 사실상 BBC의 디지털 앱인 BBC Sounds로 청취자를 몰았다. 상대적으로 임팩트가 낮은 라디오를 중심으로 전파를 버리고 인터넷으로 전환한 것이다. 물론 BBC Radio 1, 2 등 주요 채널은 여전히 FM으로 나온다. 하지만 FM 망에 대한 신규 투자는 중단했다. 2030년대 송출 중단을 염두에 둔 조치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한국과 달리 많이 쓰고 있는 DAB(디지털 라디오)도 궁극적으로 BBC Sounds로 흡수될 예정이다.
이런 조치와 별개로 팀은 정부에 명확한 요구를 했다. "안테나의 시대는 10년 안에 끝난다. 정부는 그에 맞는 대안을 내놓아라." 이 화두는 이후 영국 미디어 정책이 급물살을 타게 만든 결정적 트리거(Trigger)가 되었다.
2024년 Ofcom은 일종의 2022년 BBC 선언에 화답하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른바 <TV 전송의 미래>(The Future of TV Distribution)이다.
2022년 4월 규제당국(DCMS)은 백서를 통해 오프콤에 "시장이 너무 빨리 변하고 있다. 지상파(DTT)가 언제까지 지속 가능한지, 2034년 면허 만료 이후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시장 조사를 선행하라."라고 구체적인 지시를 내렸다. 이에 따라 오프콤은 2023년 10월 증거수집을 위해 공개 질의서(Call for Evidence)를 보냈다. 이 결과가 2024년 5월 9일 발표된 <TV 전송의 미래>다.
이 보고서는 여러모로 충격적이었다. BBC의 선언이 '의지'였다면, 오프콤은 이를 증거로 뒷받침한 것이다. 지상파 종료가 감성적 선택이 아닌 경제적 필연임을 증명했다.
오프콤은 방송사들이 현재 겪고 있는 비효율의 핵심을 짚었다. 시청자는 인터넷 스트리밍으로 이동하는데, 방송사는 텅 빈 지상파망을 유지하기 위한 송출비와 늘어나는 스트리밍 서버 비용(CDN)을 동시에 부담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청 점유율이 계속 하락하여 지상파 송출의 비용 대비 편익이 무너지는 순간, 즉 '임계점'이 2030년대 중반에 도달할 것임을 경고했다. 2018년 대비 2023년 지상파 시청 시간이 25% 급감했고, 2034년에는 전체 TV 시청 시간 중 지상파의 비중은 35%로 떨어지고, 2040년에는 27%까지 줄어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전망치대로라면 BBC는 시청자가 떠난 망을 유지하기 위해서 천문학적인 비용을 써야 함과 동시에 늘어나는 인터넷 고객을 위해서도 망 사용료를 지불해야 하는 이중 부담에 처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콘텐츠의 질적 저하는 물론이고 지상파 플랫폼의 붕괴는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오프콤의 대안은 3가지였다. BBC 등 핵심 공영 채널만 남기고 나머지 채널은 모두 온라인으로 이동시켜 비용을 줄이는 방안(Night Mode)과, 송출 기술을 업그레이드하여 적은 주파수로 방송을 유지하는 방안도 제안했다. 덧붙여 보편적 인터넷 접근권을 전제로 지상파를 완전히 끄고 인터넷 TV로 단일화해야 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옵션을 제시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완전중단이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을 시사했다. 대신에 지상파가 점유하던 우량 주파수 대역(600 MHz, 700 MHz 등)을 5G/6G 통신망으로 전환할 때 발생하는 국가 경제적 이익까지 계산에 넣었다. 이 보고서로 인해 지상파 종료 논의는 '정치적 논쟁'에서 '경제적 상수'로 전환되었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이 보편적 인터넷 접근권이다. 지상파 시절 BBC는 사실상 접근권의 상위를 보장받았다. 그러나 인터넷 시장이라면 BBC는 수없이 많은 서비스 중 하나일 뿐이다. 이 시장에서도 BBC는 보편적 접근권을 확보해야 소위 공익방송으로서의 가치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럼 과제는 어떻게 인터넷 시장에서 보편적 인터넷 접근권을 확보할 것인가다.
퇴로(지상파 종료)가 확인되자, 진입로(인터넷 플랫폼)를 확보하기 위한 법적 조치가 뒤따랐다. 영국 의회는 2024년 5월, 20년 만에 방송법을 대대적으로 손질한 <미디어 액트>(MediaAct2024)를 통과시켰다. 약육강식의 전쟁터인 디지털 시장에서도 공영 방송이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국가가 일종의 안전지대를 만들어 준 것이다. 이번 미디어액트를 한마디로 규정하면 바로
안테나를 버린다면, TV 홈 화면의 '골든존'은 국가가 보장한다.
이다.
이번 법안은 이례적인 속도로 진행되었다. 22년 4월 백서에서 2003년 이후 20년 만의 대대적인 방송법 개정을 예고했었다. 규제완화가 아니라 스트리밍 시대의 공영방송 보호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2023년 3월 초안(Draft Media Bill)이 선제적으로 공개되었고, 의회는 사전입법조사 과정을 통해 보완했다. 그리고 11월 찰스 3세가 King's Speech에 이 법안을 포함시키면서 최우선 입법 과제임을 공식화했고, 동시에 하원에 상정되었다. 24년 5월 22일 조기 총선이 발표되자, 의회는 해산직전 긴박한 워시업(Wash-up) 기간을 이용해서 이틀 만에 상하원을 통과시켰다. 5월 24일 왕실의 재가(Royal Assent)를 받아 법률로 확정되었다. 이는 영국 정치권이 미디어 생태계 보호가 정쟁의 대상이 아니라 국가적 생존 과제로 인식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법안의 핵심은 노출(Prominence) 확보다. 지상파 시대에는 '채널 1번'이 BBC의 기득권이었다. 하지만 스마트 TV 환경에서는 넷플릭스나 유튜브 앱에 밀려 공영방송이 구석으로 밀려나는 현상이 발생했다. 미디어 액트는 이를 바로잡기 위해 삼성전자, LG전자 같은 TV 제조사와 아마존 Fire TV, Roku 같은 플랫폼 사업자에게 의무를 부과했다. 스마트 TV의 홈 화면(User Interface) 최상단, 즉 시청자의 눈길이 가장 먼저 닿는 '골든존'에 공영방송 앱(BBC iPlayer, ITVX 등)을 반드시 배치해야 한다. (미디어액트는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서는 오프콤에 위임을 해 놓았다. 그래서 지금 오프콤은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준비 중이고, 2026년 중에 공개될 예정이다)
법안 통과에 발맞춰 영국 방송사들은 안테나 없이 인터넷만으로 실시간 지상파 방송을 볼 수 있는 통합 플랫폼 'Freely'를 론칭했다. 미디어 액트는 이 Freely가 TV 제조사의 기본 OS에 탑재되도록 법적 근거를 제공했다. 결과적으로 이 법은 BBC에게 "지상파 안테나를 끊더라도, TV 화면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상업 서비스 대비 노출을 보장해 주겠다"는 것을 입법을 통해 보증한 것이다.
물론 Freely는 최신 스마트 TV에서만 작동한다. 이 때문에 영국 정부는 Freeview에 적용한 것처럼 저렴한 셋톱박스를 공급해 구형 TV에서도 Freely를 이용할 수 있도록 구상 중이다. 또한 구형 TV의 전환을 염두에 두고 대략 2030년대 중반 정도에 지상파 송출 여부를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어찌 되었던, 입법을 통해 정부가 인터넷 시장에서도 공영방송이 우선권을 확보할 수 있게 보장해 주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TV다. 유튜브는 다르다. 그럼에도 본진(TV)이 안전해지자, BBC는 더 과감한 외부 확장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Update)
DCMS(Department of Culture, Media & Sports)는 Univ of Exeter에도 실태조사 연구를 요청했고, 2024. 7 오프콤과 동일한 제목의 보고서가 발간되었다. 이 보고서에는 2034년에도 여전히 인터넷에 접속하지 못하는 5%의 인구가 있는 만큼 이들에 대한 대책없이 지상파를 중단하는 것에 대한 우려를 제시하고 있다. 오프콤이 비용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 반면, Univ. of Exeter 보고서는 이를 무시하고 있다는 대목도 인상적이다. 현재 DCMS는 이 모든 연구 결과를 종합적으로 검토한 두 최종 의사 결정을 준비 중이다.
법적 보호막(Media Act)과 기술적 대안(Freely)이 완성되자, BBC는 2026년 1월 21일 가장 파격적인 승부수를 던졌다. 경쟁자이자 시장 포식자인 유튜브와 전략적 동맹을 맺은 것이다. 그렇고 그런 일반 사업자의 콘텐츠 공급 계약이 아니라는 점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BBC는 자사 콘텐츠의 우월성을 레버리지 삼아 많은 부분에서 유튜브의 양보를 얻어냈다. 그래서 랜드마크 딜(Landmark Deal)이다. BBC가 자사와 유튜브의 딜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했다. 그만큼 BBC 로서도 남들과는 다른 상징성을 가진 딜이었다는 것을 공식 선언한 것이었다.
물론 유튜브도 양보만 한 것이 아니다. 그 대가로 일종의 유튜브 오리지널을 얻어냈다. 양사가 얻은 것 중심으로 딜을 재구성해 보자.
BBC는 자존심을 굽히고 유튜브에 들어가는 대신, 다른 사업자는 얻을 수 없는 '비즈니스 특권'을 챙겼다. 통상적으로 유튜브 내 광고 영업은 구글이 독점해 왔다. 그러나 이번 딜에서는 BBC의 상업 자회사인 BBC Studios가 직접 광고 영업권과 스폰서십 판매 권한을 갖는다. 이는 BBC가 유튜브 생태계 안에서도 플랫폼에 종속되지 않고 주체적인 수익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른바 상업적 주도권을 확보했다. 다른 사업자들이 유튜브의 광고 수익을 할당받기만 할 뿐 구체적으로 얼마의 수익을 얻는지도 모르는 것과는 천양지차다.
알고리즘 노출 우대(Prominence)도 얻었다. 단순히 영상을 올리는 것을 넘어, 유튜브의 추천 시스템과 뉴스 피드에서 BBC 콘텐츠가 우선적으로 노출되는 혜택을 확보했다. 앞으로 구체성을 확보해야겠지만, 법으로 보장된 TV 홈 화면의 '골든존'을 보장한 것과는 달리, 법의 적용범위에서 벗어난 유튜브에서조차도 시청자의 눈길이 닿는 최적의 위치를 선점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낣은 전파가 가질 수 없는 잃어버린 세대에 도달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했다는 것은 애당초 BBC가 지상파 송출 중단 이후 가장 높게 부여했던 가치였다. TV를 켜지 않는 16-34세 시청자(Gen Z)에게 BBC 브랜드를 노출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했다. iPlayer로 오지 않았던 이들에게 직접 다가갈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이 데이터 접근권이다. 일반 크리에이터가 받는 수동적인 통계(Analytics) 리포트와는 질적으로 다를 것으로 보인다. 직접 광고 영업을 하기 때문에 확보할 수 있는 부가 권한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직접 영업권을 가진 만큼, 광고 도달 및 효율에 관한 원천 데이터(Raw Data급)에 접근할 수 있다. 여기에는 시청자의 구체적인 데모그래픽 정보, 타 채널과의 교차 시청 패턴, 분 단위 이탈 원인 등이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를 활용할 경우 단순히 해당 채널의 조회수를 늘리는 것뿐만 아닐, 'TV 정규 프로그램 기획'을 위한 1차 여론 조사 결과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 16~34세가 어떤 소재에 반응하는지 분석하여, 수백 억 원이 투입되는 드라마나 다큐멘터리의 실패 확률을 줄일 데이터를 갖는 셈이다.
유튜브도 이번 딜을 통해서 세계적인 명성의 오리지널 콘텐츠를 확보하게 되었다. 유튜브의 최대 고민은 가짜 뉴스나 혐오 콘텐츠 옆에 광고가 붙어 광고주가 이탈하는 것이다. BBC 콘텐츠는 전 세계에서 가장 신뢰도가 높은 '청정 구역'이다. 유튜브는 광고주에게 안심하고 돈을 태울 수 있는 프리미엄 인벤토리를 확보한 셈이다.
틱톡(TikTok)과 경쟁하는 유튜브 쇼츠(Shorts) 입장에서, 검증된 BBC의 뉴스 및 다큐멘터리 클립은 플랫폼의 격을 높여주는 핵심 무기다. '메이드 포 유튜브(Made for YouTube)' 오리지널 콘텐츠는 틱톡의 가벼움과는 다른 1위 사업자로의 명성과 무게를 더해 줄 수 있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가짜 뉴스의 온상이라는 비판을 받는 유튜브가 영국 공영방송과 손을 잡음으로써, 저널리즘 플랫폼으로서의 정당성과 신뢰도를 획득하는 정치적 이득을 얻었다가 아닐까 싶다. 그동안 유튜브가 지속적으로 BBC에 구애를 한 것도 BBC란 이름값이 주는 무게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례적으로 광고영업권과 노출 우선권을 주더라도 얻어야만 하는 콘텐츠였던 셈이다.
미디어액트의 노출 우선권은 유튜브에 해당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영국 정부가 공영방송을 지키려 한다"는 강력한 정책적 기류는 협상의 지렛대가 되지 않았을까? BBC는 유튜브가 가장 목말라하는 '명성'을 제공하는 대가로 유리한 수익 배분율과 알고리즘 노출 우대 조건을 따냈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는 분명히 하자. 이번 딜은 유튜브 오리지널 콘텐츠를 제공키로 한 것뿐, 절대 유트브 퍼스트가 아니다.
이 과정을 정리하면서 부러웠다. 일종의 2인 3각 경기라고나 할까? 위기 선언(경영진) → 데이터 검증(규제기관) → 법적 보호(의회/정부) → 시장 공략(사업자)이라는 기승전결이 완벽한 드라마에 가까웠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정부와 규제기관 그리고 공영방송이 서로 짜고 치기라고 한 것처럼 하나의 목표를 정하고 달려가는 모습이다. 낡은 안테나를 버리는 대신에, 미래의 생존권과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한 안전장치를 정부는 입법으로, 공영방송은 사업으로 풀었다.
반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한국의 미디어 정책은 여전히 '지상파 사수'라는 낡은 도그마에 갇혀 있다. 방송사는 콘텐츠 경쟁력을 잃어가고, 젊은 세대는 TV를 떠난 지 오래다. 수신료 분리 징수로 공영방송의 재정은 말라가고 있지만, 이를 대체할 비즈니스 모델이나 구조 개혁 논의는 전무하다.
우리는 시장은 규제기관 탓을 하고, 규제기관은 시장 탓을 한다. 시장을 방치하는 것은 자율이 아니라 방임이다. 지금이라도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노력을 민관이 같이 했으면 한다.
이 글이 미래 논의를 위한 작은 시발점이 되길 기대해 본다.
위에 언급된 세 건의 보고서는 다음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1. 오프콤 <The Future of TV Distribution> (24.5.9)
2. Univ. of Exeter <Future of TV Distribution> (24.7)
3. MediaAct2024(24.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