맷 브리튼 선임이 던지는 질문들
1. 구글 유럽 총괄이 BBC의 대표가 되다
BBC의 새로운 수장으로 구글 EMEA의 총괄 책임자였던 맷 브리튼(Matt Brittin)이 임명됐다.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방송(Broadcasting)'이라는 공적 가치를 수호해 온 BBC가, 데이터 알고리즘과 광고 기술로 전 세계 미디어 생태계를 재편한 구글의 거물을 영입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가 파격이다.
사장 선임은 방향성이다. BBC가 더 이상 스스로를 전통적인 방송사로 정의하지 않고 '기술 기반의 미디어 플랫폼'으로 완전히 재편하겠다는 절박한 생존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했고, BBC가 직면한 실존적 위기, 즉 글로벌 OTT의 공세와 수신료 폐지론이라는 정치적 파도를 넘기 위해서 정부 친화적인 인물을 선정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무엇이든 사장 선임은 목적 지향적이다. 과거에도 그러했다. BBC의 사장은 당대의 특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최적화된 인물을 선임하려고 했고, 그 과정에서 내부인도, 외부인도 뽑았었다.
특히 초기에는 BBC는 공영방송의 기틀을 잡기 위해 학계나 언론계의 외부 인사를 주로 영입했었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는 조직의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해 내부 저널리스트 출신들을 중용했다. 이후 1990년대 들어 상업 방송과의 경쟁이 치열해지자 다시 외부의 경영 감각을 수혈하기 시작했고, 이는 디지털 전환의 초석을 닦는 계기가 되었다. 현 팀 데이비 사장의 경우 펩시코 출신이긴 하지만, 2005년에 BBC에 합류해서 20여 년 넘게 근무를 해 왔다는 점에서 외부 인사라고 이야기하기 좀 애매하다. 그랗다손 치더라도 결국 방송 언저리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기에 이번 조치는 충격 그 자체다. 지난 역사 속에서 이번 맷 브리튼의 인사만큼 BBC 역사상 파격적인 인사는 없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굳이'라는 질문과 "왜"라는 호기심이 따라올 수밖에 없다.
2. 그는 누구인가?
맷 브리튼은 우리와도 인연이 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영국 조정 대표 선수로 참석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 경험을 자주 이야기하곤 했다. 조정이란 스포츠가 개인이 아닌 팀 전체가 완벽한 리듬을 맞췄을 때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고, 이는 거대 조직의 변화 관리와 매우 닮아 있다고 강조하곤 했었다. 전통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은 데다, 전 세계 최고 기술 기업 중 하나인 구글의 EMEA를 책임지면서 유럽 미디어 지형의 변화를 최전선에서 목격해 온 인물이다.
화려한 이력이다. 2007년 구글에 합류한 이후 그는 유럽 내 디지털 광고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을 이끌며 구글을 지배적인 플랫폼으로 안착시켰다. 그러나 글로벌 포식자인 구글의 유럽 총괄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정치적, 윤리적 논쟁을 정면으로 받아내야 했다. 2016년 영국 하원 공공회계위원회(PAC) 청문회 현장은 지금도 기억할 만하다. 당시 구글의 세금 회피 의혹을 추궁하던 메그 힐리어 의원은 브리튼에게 본인이 매달 얼마를 버는지 알고 있느냐는 돌발 질문을 던졌다. 브리튼이 당황하며 수치를 즉답하지 못하고 회피하자, 의원은 당신은 세상과 너무 동떨어져 살고 있다(You are so out of touch)고 일갈했었다. (아래 기사 속 동영상을 보시길)
영국 대중들은 이를 엘리트의 오만함으로 받아들였다. 그에게는 잊지 못할 흑역사다. 또한 2017년 유튜브 광고가 극단주의 영상 옆에 배치되어 정부와 대기업들이 대거 광고를 철회했을 때, 그는 직접 무대에 올라 우리가 더 잘해야 했으며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머리를 숙였다. 이처럼 그는 극단적인 비난과 위기 상황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거대 플랫폼을 방어해 온 전투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구글 방어의 최전선에 있던 그다. 유럽 내에서 보여주었던 구글의 놀라운 성과를 감안하면 그의 경영 능력 등에 대해서 찬사를 보낼 수도 있지만, BBC의 수장이라고 하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일까? 맷 브리튼의 선임 발표가 있자마자 시장은 극명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맷 브리튼 선임에 반대하는 이들은 공영방송의 근간이 훼손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가디언(The Guardian)의 기술 칼럼니스트이자 미디어 학자인 존 노턴(John Naughton)은 그동안 여러 기고를 통해 BBC가 넷플릭스나 구글과 같은 빅테크의 '추천 알고리즘' 문법을 무분별하게 수용하는 것에 대해 강력한 경고를 보냈었다. 그는 공영방송이 실리콘밸리의 '디지털 자본주의' 논리를 받아들일 경우, 공공의 이익보다는 데이터 수집과 체류 시간 증대에 매몰되어 결국 상업 플랫폼의 하위 호환으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고 주장해 왔었다. 그런 그이기에 구글의 책임자가 선임된다는 것은 공영방송의 도덕적 보루 역할을 기술적 효율성보다 하위에 둘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시청자 권익 단체인 '시청자와 청취자의 목소리(VLV:Voice of the Listener & Viewer)' 역시 맷 브리튼 체제의 BBC가 '디지털 퍼스트'를 넘어 '디지털 전용'이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표명했다. VLV의 콜린 브라운(Colin Browne) 의장은 BBC의 연간 계획에 대한 공식 대응에서 "디지털 전환이 선형 방송(Linear TV)을 이용하는 수백만 명의 시청자를 소외시켜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들은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콘텐츠에 의존하는 방식이 인간의 가치와 편집권을 대체할 경우, 공영방송이 지향해야 할 다양성과 보편적 도달이 심각하게 훼손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The BBC must be run by human values, not algorithms.
이는 BBC가 가진 '국가적 광장'으로서의 상징성이 단순한 기술적 혁신보다 앞서야 한다는 영국 사회의 뿌리 깊은 인식을 대변하는 발언이자 이번 선임에 대한 전반적인 정서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는 물을 가는 물이 막을 수는 없다.
조심스럽긴 하지만 실리적인 평가도 일어나고 있긴 하다. 공영방송이 가진 고결함만으로는 알고리즘이라는 파도를 막아낼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 들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웨스트민스터 대학의 스티븐 바넷(Steven Barnett) 교수나 로이터 저널리즘 연구소의 라스무스 클라이스 닐슨(Rasmus Kleis Nielsen) 소장과 같은 미디어 학자들은 BBC가 그동안 플랫폼 기업의 생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방송 콘텐츠를 온라인에 올리는 수준에 머물렀다고 지적했다. 실존적 위기감이 도덕적 결벽증을 압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넷플릭스와 유튜브가 턱밑까지 추격한 상황에서 구글 출신의 영리함을 빌리는 것은 이제 사치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선 어쩔 수 없다는 주장이다. 장렬한 전사가 미담이 될 수는 있지만, 우리에겐 놓인 삶의 무게는 굴욕일지언정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 먼저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번 맷 브리튼의 선임은 데이터에 기반해서 시청자를 더욱더 잘 이해함으로써 BBC의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될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영국 미디어 분석가이자 엔더스 애널리시스(Enders Analysis)의 회장인 더글러스 매케이브(Douglas McCabe)는 수년동안 BBC가 알고리즘의 시대에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한 만큼 맷 브리튼의 선임 그 자체가 BBC가 이제야 냉엄한 현실을 인정한 것이라는 평가다. 그러기에 찬성론자들의 입장에서는 맷 브리튼은 영국의 보수적인 공공 기관과 실리콘밸리의 혁신 문화를 잇는 적임자인 셈이다.
3. 왜 지금 맷 브리튼인가?
Again. 사장 선임은 방향성이다. 그것도 구글향 인물을 선임했다. 무엇이 이런 선택을 하게 한 것일까? 우리가 알다시피 BBC는 전 세계에서 가장 서둘러서 디지털 전환을 시도했던 공영방송사업자다. 그 어떤 공영방송사업자도 BBC처럼 한 적이 없다. 아직 넷플릭스가 영국 시장에 진입하기 한참 전인 2007년 iPlayer를 론칭하며 시장을 주도했다. 비록 2012년 영국에 진출한 넷플릭스가 압도적인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지만, 그나마 BBC가 시장을 방어하는 이유 중 하나가 iPlayer로 대표되는 디지털 전환 노력 때문이었다는 것을 부인하긴 힘들다.
당시 방송사로서는 파격적으로 VOD 퍼스트를 지향하며 디지털 플랫폼의 기틀을 닦았고, 이후 2016년 새로운 국왕 칙령(Royal Charter)을 통해 디지털 공영 서비스의 책무를 법적으로 명문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혁신의 과정은 2010년 캐머런 정부가 수신료를 동결하고 각종 예산 부담을 전가하는 재정적 압박을 가하면서 중대한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이러한 기조는 이후 보수당 정권으로 이어져, 존슨 정부의 나딘 도리스 문화부 장관(2021~2022)이 수신료 폐지까지 시사하며 공영방송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전방위적 공세로 강화되었다.
당시 보수당 정부는 팬데믹 이후 불어닥친 생계비 위기(Cost of Living Crisis) 속에서 가계 경제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수신료 인상을 억제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수신료 동결과 폐지를 주장했다. 또한 넷플릭스나 디즈니+ 같은 글로벌 OTT가 주류가 된 환경에서 단순히 TV를 소유했다는 이유만으로 부과되는 수신료 모델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라는 지적도 덧붙였다.
물론 여기에는 정치적 섭섭함도 묻어 있다. BBC가 브렉시트 과정에서 잔류파의 입장을 대변하거나 정부의 이민 정책을 인도주의적 관점에서만 비판하는 등 보도 편향성을 보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게리 리네커(Gary Lineker)와 같은 간판 앵커에게 지불되는 연간 약 130만 파운드 이상의 과도한 출연료는 국민의 혈세로 운영되는 조직이 상업 방송보다 방만하게 운영되고 있다는 비난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대내외적 압박은 BBC가 기존의 수신료 체제 외의 생존 수단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4. 연도별 계획의 유기적 흐름: 유지와 포기, 그리고 새로운 탄생의 7년
달리 이야기하면 맷 브리튼을 선임한 것은 극단의 방식을 쓰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내 외부의 여러 반대와 저널리즘에 대한 우려도 분명 알고 있지만, 한가하게 기존의 방식을 고수할 여유가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심각성은 지난 BBC의 연간계획을 돌이켜보면 분명해진다.
(1) 2020/21 연간계획: 팬데믹 위기 대응과 공영방송의 필수 불가결성 입증
2020/21 연간계획은 코로나19(COVID-19) 팬데믹이라는 초유의 국가적 재난 상황 속에서 수립되었다. 전 국가적인 봉쇄령(lock-down)이 내려진 상황에서, BBC는 정확한 정보 전달과 휴교령에 맞춘 교육 프로그램(Bitesize) 확대, 그리고 고립된 국민들에게 위로를 제공하면서 영국 사회를 지탱하는 핵심 서비스이자, 필수불가결한 공영 서비스라는 것을 인지시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시청자들의 반발에 직면해야 했다. 2020년 9월 팀 데이비(Tim Davie) 신임 사장이 취임하면서 조직의 분위기가 전환되었다. 넷플릭스 등 글로벌 SVOD의 급성장에 대응하기 위해 BBC Sounds와 iPlayer의 온라인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 핵심 의제로 부상했다. 이런 상황에서 75세 이상 노년층에 대한 수신료 면제 혜택이 비용 문제로 폐지(유료화 전환)되면서 시청자들의 반발에 직면했고, 재정적 압박이 가중되기 시작한 과도기적 시기였다.
(2) 2021/22 연간계획: 팀 데이비 체제의 본격화와 '모두를 위한 가치' 제고
2021/22 시즌은 팀 데이비 사장의 철학이 온전히 반영된 첫 번째 연간계획이다. 팀은 '모두를 위한 가치(Value for All)'라는 강력한 슬로건을 내세우면서 생존을 위한 4대 전략적 우선순위를 발표했다. 첫째, 더 적지만 더 영향력 있는 콘텐츠(Fewer, bigger, better) 집중 제작, 둘째, iPlayer와 Sounds 등 온라인 플랫폼에서의 가치 극대화, 셋째, 런던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영국 전역으로 권한과 제작 역량을 분산하는 'Across the UK' 프로젝트 가동, 넷째, 상업 자회사를 통한 상업적 수익의 획기적 증대였다.
또한 과거 파노라마 스캔들을 계기로 촉발된 세로타 리뷰(Serota Review)를 전면 수용해 저널리즘의 공정성(Impartiality)과 대국민 신뢰 회복에 주력했다. 그러나 이면에는 연간 약 10억 파운드에 달하는 막대한 비용 절감 목표가 자리 잡고 있어 대규모 구조조정이 불가피해지는 시기였다.
세로타 리뷰(Serota Review)는 2021년 BBC 이사회의 니콜라스 세로타 경 주도로 작성된 보고서다. 과거 1995년 마틴 바시르 기자가 위조문서를 동원해 다이애나 왕세자비와 인터뷰를 따내고 당시 경영진이 이를 부실하게 조사하며 은폐하려 했던 이른바 '파노라마 스캔들'에서 드러난 기만적 취재와 방어적 조직 문화를 비판하며, 불편부당성(Impartiality) 같은 편집 가치의 내재화, 내부 고발 시스템 강화, 그리고 고위직에 대한 엄격한 책임 추궁을 권고하여 팀 데이비 사장 체제하에 BBC의 대국민 신뢰 회복을 위한 강력한 내부 통제 기준으로 채택되었다.
(3) 2022/23 연간계획: 수신료 동결의 충격과 디지털 퍼스트의 강제적 가속
2022/23 연간계획은 정부가 수신료를 2년간 동결하기로 결정하면서 발생한 약 2억 8,500만 파운드 규모의 예산 부족분을 마주한 채 수립되었다. 팬데믹 이후 글로벌 OTT의 지배력이 극대화된 상황에서, BBC는 시청자 가치 극대화와 글로벌 리더십 유지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디지털 퍼스트' 전략을 전면화했다.
이 시기 BBC는 선형(Linear) TV나 라디오 중심의 조직 및 자원 배분 구조를 해체하고, BBC iPlayer와 BBC Sounds를 콘텐츠 배포의 최우선 플랫폼으로 격상시켰다. 전통적인 방송망에 투입되던 예산을 대거 삭감하여 디지털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과 플랫폼 UI/UX 개선에 집중 투자했다. 자발적인 혁신이라기보다는, 제한된 재원으로 넷플릭스 등과 경쟁하기 위해 기존 방송 플랫폼의 축소를 감수하면서까지 디지털로의 전환을 강제적으로 가속화해야만 했던 시기다. 동시에 인력 감축과 부동산 매각 등 긴축 재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4) 2023/24 연간계획: 초인플레이션 속의 물리적 구조조정과 로컬의 희생
2023/24 시즌은 수신료 동결의 여파에 영국 내 초인플레이션까지 겹치면서 BBC 재정이 최악의 위기로 치달은 시기다. BBC는 연간 4억 파운드 이상의 엄청난 비용 절감을 목표로 내세웠고, 이는 곧 시청자들이 체감할 수 있는 수준의 거대한 물리적 구조조정으로 이어졌다.
가장 대표적인 조치는 뉴스 채널의 통폐합과 지역 방송(Local Radio)의 축소였다. BBC는 수십 년간 분리 운영해 오던 국내용 BBC News 채널과 해외 송출용 BBC World News 채널을 단일 채널로 통합해 운영비를 절감했다. 또한, 지역 주민들의 핵심 정보원이었던 로컬 라디오 방송의 자체 편성 예산을 대폭 삭감하고, 이를 지역 기반의 온라인 기사와 디지털 서비스에 재투자하는 결정을 내렸다. iPlayer의 시청 시간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로그인 기반의 개인화 서비스는 자리를 잡아갔지만, 이 과정에서 공영방송의 핵심 가치인 '지역성'과 노년층의 정보 접근권이 훼손되었다는 거센 비판과 내부 파업에 직면해야만 했다.
(5) 2024/25 연간계획: 선거의 해, 공영방송의 본원적 역할 증명과 AI 도입
영국 총선을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대규모 선거가 치러진 2024/25 시즌에 BBC는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민주주의의 수호'와 '영국 문화의 방어'에서 찾고자 했다. 연간계획의 전면에 '진실 추구', '최고의 영국 스토리텔링 지원', '사람들의 통합'이라는 3대 핵심 역할을 내세웠다.
특히 가짜뉴스와 딥페이크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팩트체크 전담 부서인 'BBC Verify'의 인력과 권한을 대폭 확대하여 정보 검증의 최전선에 섰다. 또한 글로벌 거대 자본이 주도하는 알고리즘 속에서 영국 고유의 문화적 정체성이 희석되는 것을 막기 위해, 철저히 영국적인 이야기와 창작자들을 발굴하는 데 집중 투자했다. 한편으로는 생성형 AI의 급격한 발전에 대응하여 사내 윤리적 가이드라인을 제정하고, 업무 효율성 제고와 시청자 맞춤형 콘텐츠 추천 등 제한적인 영역에서부터 AI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한 원년이기도 하다.
BBC Verify는 약 60여 명의 탐사보도 기자, 데이터 분석가, 오픈소스 정보(OSINT) 전문가들이 모여 위성 이미지 분석, 지리적 위치 추적(Geolocation), 영상 포렌식 등의 첨단 방법론을 통해 조작된 콘텐츠나 전쟁 관련 허위 정보의 진위를 과학적으로 판별하며, 검증된 결과는 단순한 온라인 기사 출고에 그치지 않고 'BBC 뉴스 앳 텐(News at Ten)'이나 24시간 뉴스 채널 등 주요 방송 프로그램에 소속 기자들이 직접 스튜디오의 대형 터치스크린 앞에 등장해 단서를 추적하고 위성사진과 현장 영상을 교차 검증하는 세부 과정 자체를 시청자들에게 시각적이고 투명하게 설명하는 전담 코너 형태로 적극 활용되고 있다.
(6) 2025/26 연간계획: 2027년 칙허장 갱신을 향한 총력전과 디지털 뼈대 완성
27년 수신료 제도의 근간이 되는 현행 칙허장(Royal Charter)이 만료되고, 새로운 칙허장이 발급된다. 이 때문에 BBC는 이 시기를 수신료 납부의 정당성을 온 국민에게 입증하고, 다가올 자금 조달 모델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성과 지표 산출의 기회로 삼았다.
무엇보다 전통 방송 시청을 완전히 이탈한 16~34세 젊은 세대를 붙잡기 위해 틱톡(TikTok)이나 유튜브(YouTube) 등 제삼자 플랫폼에 BBC 콘텐츠를 유통하는 전략을 더욱 고도화했다. 수신료라는 단일 수익원의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 BBC Studios를 필두로 한 상업 자회사의 수익 창출 능력을 극대화하여 재무적 자립도를 높이는 데 주력했다.
기술적으로는 모든 BBC의 서비스(뉴스, 스포츠, 오디오, 비디오)를 하나의 통합된 로그인 환경에서 매끄럽게 연결하는 '디지털 뼈대(Digital Backbone)' 구축을 완성하여 완벽한 데이터 기반의 미디어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7) 지난 연간계획에 대한 평가와 26/27 연간계획:
지난 7년 동안 BBC는 정부의 재정적 압박 속에서도 iPlayer를 단순한 '방송 다시 보기' 플랫폼에서 벗어나 영국 내 1위 SVOD 대항마로 성장시키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가입자 로그인 의무화를 통해 방대한 시청 데이터를 축적하고 이를 기반으로 개인화 추천을 고도화한 것은, 넷플릭스 등 글로벌 거대 자본과의 기술 경쟁에서 무너지지 않고 독자적인 방어선을 구축한 성공적인 디지털 연착륙으로 평가된다. 아울러 정치적 양극화와 가짜뉴스 홍수 속에서도 BBC Verify 신설 등을 통해 저널리즘의 신뢰도를 지켜낸 것은 공영방송 본연의 목표를 훌륭히 수행한 결과다.
하지만 하지만 생존을 명분으로 단행된 가혹한 구조조정은 BBC의 가장 중요한 철학인 '보편성(Universality)'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특히 23/24 시즌을 전후로 실행된 지역 라디오 축소와 뉴스 채널 통합은 고스란히 지역 거주민과 디지털 소외계층의 정보 접근성 하락으로 이어졌다. '디지털 퍼스트'라는 화려한 구호 이면에서 누군가에게는 BBC의 서비스 질이 명백히 후퇴했으며, 이는 곧 특정 계층이 체감하는 수신료의 가치 하락으로 직결되었다. 노조의 대규모 파업으로 드러난 내부의 심각한 피로도 역시 BBC가 향후 장기적인 비전을 실행하는 데 있어 큰 불안 요소로 남아 있다.
그러기에 26/27 연간계획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정부 주도의 칙허장 리뷰와 관련된 녹서(Green Paper)가 발행되고 대국민 공청회가 본격화됨에 따라, BBC의 존재 이유와 새로운 자금 조달 모델을 둘러싼 사회적 합의 도출이 당면 과제로 떠올랐다.
이러한 중대한 시점에 BBC는 스스로를 문화, 지역사회,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필수적인 국가 자산'으로 재규정하면서도, 생존을 위해서는 뼈를 깎는 '급진적 개혁(Radical Reform)'이 불가피함을 공식 선언했다. 이는 단순한 '디지털 퍼스트'로의 전환을 넘어, 100년 역사의 방송국에서 데이터 기반의 '글로벌 테크 플랫폼'으로의 완전한 탈바꿈을 의미한다. 동시에 보편성을 담보하는 기초 수신료와 프리미엄 서비스에 대한 구독료가 결합된 하이브리드 재원 모델에 대한 구체적인 청사진을 제시하고, 칙허장 갱신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모든 조직의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5. 우리는?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BBC 이사회는 맷 브리튼을 선택했다. BBC의 저널리즘 영역을 강화하기보다는 글로벌 디지털 미디어의 생태계를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선택했다. 어쩌면 수신료 압박을 불가피한 조치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보편성과 새로운 보편성에 부합하는 수익원을 확보하는데 방점을 찍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BBC는 지금까지 '무엇을 만들 것인가'를 고민해 온 조직이었다. 그러나 테크 기반의 미디어 환경에서는 '무엇을 만들어'도 '어떻게 전달할 것인지'를 고민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알고리듬이니 하는 기술적 용어 뒤의 본질은 그래서 어떻게 국민과 고객에게 도달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번 맷 브리튼의 선임은 '무엇'과 '어떻게'에서 '어떻게'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마치 2024년 뉴욕타임스가 '우리는 최고의 저널리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유통 기업에게 밀리고 있다고 주장'했던 것과 궤를 같이 한다.
그러기에 콘텐츠 조직이 스스로를 정의하는 기준이 ‘제작’에서 ‘분배’로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구글 출신이 핵심이 아니라, 데이터를 기반으로 시청자를 이해하고 알고리즘을 통해 관계를 설계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겠다는 의미이지 않을까?
공영방송은 오랫동안 ‘보편성’을 통해 존재해 왔다. 누구나 접근할 수 있고, 모두를 대상으로 한다는 원칙이다.
하지만 디지털 환경에서 보편성은 더 이상 동일한 콘텐츠를 동일한 시간에 제공하는 것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각자의 시간과 맥락 속에서 선택받지 못하는 콘텐츠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를 현재의 산업의 용어로 바꿔보면 BBC의 선택은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공공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어디까지 시장의 논리를 받아들일 것인가.
이 질문이 비단 영국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한국의 공영방송 역시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공정성과 공공성에 대한 논쟁은 중요하다. 그러나 시청자의 시간을 잃어버린 공정성은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나은 입장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게임이 시작되었음을 인정하는 일이다.
엄연히 실존하는 문제를 놔두고 외눈박이가 되는 것은 달갑지 않다는 의미다.
본문에 언급된 세로타 리뷰 자료는 여기서 다운로드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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