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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Jun 05. 2022

Bar-11. 평화가 필요하다

핍박받는 한국 술과 격동하는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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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보이지 않는다. 끝도 없고 만족할 만한 것도 아니다. 평화를 가져올 만한 것. 평화가 너무 큰 요구라면, 그럼, 위로라도. 고통 없고, 적어도 아무 감각이 없는. 고통이 기억으로 번역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테레사 학경 차, <딕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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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술역사를 공부하고 있다. 온갖 우여곡절을 거친 이 조그만 나라에서 위스키 수입액이 1억 7500만 달러를 찍었다. 병마가 퍼지는 와중에도 기록적인 수치다.


오랜만에 구석기시대부터 고조선을 지나 삼국시대까지 훑었다. 농경사회가 주를 이루었던 우리나라는 술을 만드는 과정이 불과 물의 조화라고 보았다. 양식이 되는 쌀에서 술이 나오고, 그러한 술을 밥, 즉 쌀과 겸하여 먹는 것이 평화 그 자체라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술이 기호식품이 아니라 음식의 일부로 받아들여졌다. 안주가 있어야 술을 마시는데, 삼국시대에 불교라는 것이 고구려를 통해 전해지면서 대륙 전반에 살생을 금하는 바람이 불었다. (두 달 전부터 고기 없는 식단을 먹고 있는 사람으로서) 가축의 도축은 물론 물고기를 잡는 어구까지 금지했던 백제 법왕의 정책이 달갑긴 하지만, 이는 제천의식과 제사의식 외의 술을 거의 마시지 못했다는 뜻이다.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 이념이 들어오자 한국의 술과 음식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나라가 달싹거린다. 술을 빚고, 빚은 술에서 약주와 청주와 막걸리를 뽑아내고, 약재와 꽃잎을 넣은 독을 이틀에 한 번씩 저어주며 집집마다 정성 가득한 술들이 넘쳤다. 고려 때 들어왔던 소주 증류가 조선에 들어서 재유행하며 약용 및 고급술로 상류층들에게 입소문을 탔다. 이 귀한 물건이 퍼지고 퍼지더니 이젠 백성들도 집에서 소주를 만들었다. 잘 쪄낸 고두밥에 물을 붓고 누룩을 옴팡 넣어 빚은 술을 솥에 넣고 팔팔 끓여 이슬을 받은 것이다. 소주의 맛에 흠뻑 젖은 조선 사람들은 나라가 휘청일 정도로 곡물을 끌어다 술을 빚었고, 이는 대대적인 금주법으로 이어졌다. 미국에서 마피아가 횡행했던 1920년대가 금주법으로 가장 유명한 것 같지만, 술로 인한 사회문제가 급증하거나 곡물 수급이 부족할 때 정부가 내렸던 금주 조치는 꽤 자주 보이는 현상이었다. 한국도 당연히 피해 갈 수 없었다. 어정쩡한 어명을 피해 ‘약’이라고 꼼수를 부리며 귀족들끼리만 비싼 술을 돌려마시는 것도 다른 나라와 같은 순번이다. 술이 고픈데 나라님의 명을 피할 수 없는 소시민들의 불만이 쇄도했다. 보통 금주령은 곡물이 부족한 상황에만 한시적으로 금하고 곧 해제되는 식이었는데, 사도세자의 아버지로 유명한 영조는 달랐다. 그는 10여 년의 장기 금주령을 엄격하게 지키며 온 나라의 술독이 눈칫밥을 먹게 하고 조선 금주령의 대명사로 역사에 기록되게 된다.

후에 흥선대원군 아버지의 묘를 도굴했던 독일 상인은 한반도에 와인과 위스키, 브랜디를 처음 들여온 인물이다. 에른스트 제이콥 오페르트는 조선에 상륙하여 통상을 요구했던 것이 거부당하자 관아를 습격해 물건을 탈취하고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무덤을 도굴하려다가 발각되어 달아났다. (몇 차례에 걸친 조선 방문, <금단의 나라 조선>이라는 저서를 펴낸 집요함을 생각하면 이 독일인은 대륙 끝 작은 나라에 어지간히 미련이 남았던 듯하다) 그가 두고 간 수많은 주류들에서 당시 조선 사람들의 입맛을 추측할 수 있다. 조선인들은 떫고 시큰한 전통 와인보다는 달면서도 도수가 높은 디저트 와인을 좋아했다고 한다. 맛과 취기를 둘 다 잡으려는 취향이 일관적이라면 일관적일까.

흥선대원군은 아버지의 묘를 파헤치려 한 서양인의 만행과 그 사건 3년 뒤 미국이 강화도에 침략을 감행하는 신미양요를 겪고 척화비를 세운다. 그리고 섭정을 끝낸 흥선대원군이 물러나자 일본의 터무니없는 요구에 의해 강화도조약이 체결된다. 조선과 섬나라의 지긋한 악연이 시작된 것이다.


문호가 개방되면서 서구의 위스키와 럼, 진, 일본의 맥주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조선으로 밀려들어왔다. 일전에는 고급술로 소주를 즐겨마시던 양반들이 주종을 위스키로 바꾸게 된 것이다. 얼큰한 도수에 향긋함을 지닌 위스키는 소주를 마시던 소비층에게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일본이 터놓은 식민지배의 물꼬는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예술인으로 가무에 능하던 기생이 일본에서 온 하급 게이샤와 한 데 묶이며 유곽과 성매매업이 자리 잡았고, 일본에서 순수 주정 에틸알코올이 들어오게 되면서 주정에 물을 탄 희석 소주가 대중 술이 되었다.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일본의 조선 식량 통제는 심각해졌다. 한 집에서 독으로 빚어 마시던 가양주(집에서 만드는 술)의 씨가 말랐다. 일제가 만든 주세법과 주세령은 철저히 세금 벌이 용도로 사용되어 허가받아 면허를 취득한 주류제조장만 술을 만들 수 있었다. 깜깜한 시대였다. 빛이 드는 곳은 나라를 판 돈으로 배를 불리는 조선인과 그런 조선인을 관리하는 일본인들의 머리 위였다. 일제강점기 기린맥주를 찍어내던 회사가 지금의 오비맥주다. 대일본맥주주식회사는 크라운맥주를 거쳐 하이트맥주가 되었다. 일제의 흔적은 한국 곳곳에 징그럽게 남아있다. 광복 후 적산이라고 미군정의 관리 하에 있었고 또 민간에 팔아넘겨졌으니 그 속에 얼마만큼의 일본이 함유되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글을 쓰고 있으니 새삼 어제 다녀온 독립운동가의 생가가 아른거린다. 여자 종업원을 두고 남자 손님들을 접대하는 일본식 카페가 등장하기 시작한 1920년, 신채호는 한반도 군사통일 준비위원회에서 미군 위임통치를 지지하는 이승만과 격렬히 싸웠다. 그는 만주로 넘어가 약산 김원봉과 의열단에서 고문으로 일한다. 그는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36년 감옥에서 눈을 감는다.

일제에서 해방이 되면?

육이오가 터진다. 나라가 갈라지길 원하지 않았던 어떤 세력과, 나라를 갈라놓은 채 평화롭고 싶은 어떤 세력이 맞부딪힌다. 그것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싸움이 아니라 미국과 소련의 싸움이었다. 자기들의 나라에서는 벌이기 싫었던 치졸한 편 가르기를 남에 나라에서 휘두르고 다녔다. 많은 것이 잿더미가 된 채로 한민족의 마음에 상처만 남기고 전쟁이 끝났다. 남한에는 미군이 남게 된다. 미군은 양주를 마시고 맥주를 마셨다. 미군을 상대하는 양공주는 미군에게서 얻은 위스키로 돈을 벌었다. 광복 전후에도 위스키 수입이 불법이었기 때문에 시중에 돌아다니는 위스키는 대부분 가짜였다. 색소와 에탄올로 흉내만 낸 위스키는 사람의 눈을 멀게 했고 때로는 죽게 했다. 양키의 술을 동경하거나 밀주로 일본 위스키를 구해 먹던 사람들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며 ‘진짜 위스키’의 맛을 보게 된다. 국내의 가짜 양주가 쇠퇴하던 참에 1973년 위스키 원액 수입이 허가된다. 박정희가 10월 26일에 마시고 있던 술이 바로 그 유명한 시바스 리갈이다. (나는 매해 10월 26일에 축배의 뜻으로 종종 마신다) 이후에는 뻔하디 뻔한 성매매의 나라 한국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박정희 때부터 똬리를 튼 기생 관광, 일제의 산물 퇴폐 요정집에서의 정치권 성접대, 룸살롱에서 나오는 물 탄 위스키, 소시민들의 노상 포차와 소맥 문화.

​주막, 요정, 홍등가, 룸살롱, 모던바를 지나 한국의 바 시장은 여기까지 왔다.


평화가 필요하다. 과열된 머리가 가라앉아야 글을 쓸 수 있다. 한국 현대사에 대한 책을 읽은 지 8개월, 아직도 머리가 식지 않는다. 칵테일 잔 속에 든 평화를 찾으러 간다. 끝이 없는 논쟁과 분단에 대한 평화. 이 나라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그 단어 평화.


아직 육이오 전쟁에 대한 문장을 글 앞에 쓸 수 없는 내가 찾을 수 있는 그나마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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