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송 사건
커브
폴 엘뤼아르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
잠재적 가해자가 되고 싶다.
연령 외모 상관없이 모든 남성의 후장을 개척의 영역으로 보는 오만불손한 성범죄자가, 홧김에 술김에 우발적으로 남성을 죽여버리는 경솔한 살인범이 되어보고 싶다. 그 기분을 단 한 번이라도 느낄 수 있다면. 나를 해할 것은 동성뿐이고, 막연히 만만하게 대할 수 있는 성별이 주변에 널려있는 세상에 살 수 있다면.
세상이 참 위험하다. 밤에 일을 하다 보면 내 회식은 물론이오 남이 하는 회식도 많이 보게 된다. 서먹한 사이의 여자와 남자가 함께 온 테이블에 남자 바텐더들의 유머 코드는 뻔하다. 어떻게, 술 좀 더 타드려요? 취하는 줄도 모르게 마시게 된다니까요 형님.
취하는 것은 누구일까? 보통 여자 쪽이다. 여성분이 화장실에 간 사이에 불쾌한 윙크와 함께 사인을 주고받는다. 나는 지금 성범죄의 현장에 동조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이 모든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바 테이블에 엎드려 잠든 여성을, 일행이라는 이유로 남성과 한 택시에 태워 보내는 것에 아무런 걱정 없이 뒤돌아서도 되나?
내가 아는 사람들이 좋은 사람들이라고 믿고 싶다. 내가 남자였다면, 나는 의심 없이 그들을 좋은 형이라고 소개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자이고, 이것을 평생 떼어낼 수 없다. 주색이 무르익으면 정색하며 자리를 빠져나오는 나의 뒤통수에 '야, 니가 무슨 여자냐?'라고 웃음을 터뜨려도, 나는 믿지 않는다. 사람은 믿어도 남자는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 좋은 얼굴은 때때로 발기한 고추 너머로 흐려지기 때문이다.
스무 살에 나는 대학을 다녔다. 오리엔테이션을 가고, 펜션도 잡았다. 그때의 나는 얼마나 예뻤던지, 눈에 띄고 싶었던지. 갓 대학을 들어와서 동기들과 놀러 나가고 선배들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것이 어찌나 뿌듯하던지. 하지만 밤이 늦으면, 술자리가 무르익으면 사람보다 성별이 앞자리로 튀어 오른다. 앞에 앉은 동기의 눈빛이 바뀌고, 방 안의 분위기가 변한다. 낮에서 보던 그 얼굴이 아니다. 낯설다. 그때 나는 남자 친구와 이미 약혼을 했다고 말하고 다녔다.(터무니없게도!) 나에게 이미 손을 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새내기가 약혼 따위를 입에 올리는 것이 얼마나 매력이 없는 일인지 뒤늦게야 알았다. 내가 잃은 건 관심이고 얻은 것은 안전이다. 스무 살, 온갖 로맨스와 가능성을 가득 기대하고 진학한 학교. 꿈같은 상황만 보여주는 드라마, 수능만 넘기면 행복해질 거라고 세뇌하는 세상. 스무 살, 모든 게 시작될 것 같던 그 나이가 반대로 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라는 것을 그때는 결코 모른다. 난생처음 미성년자 딱지를 떼었는데, 넘쳐나는 미디어에 이상은 이만큼 부풀어 있은데 보이지도 않는 불행을 생각할 이유가 있나. 그래서 닥쳐온다. 불행은 예고하지 않는다. 친한 사람의 얼굴을 입고, 믿었던 관계라는 외투를 걸치고 간극에 대비할 시간도 없이 밀고 들어온다. 몸속에, 눈 속에, 피부 위에.
그들이 무안을 주는 방법을 알고 있다. 나를 사람으로 보는 척하는 것이다. 너는 여자가 아니라고, 너에게는 이성이 응당 가지고 있어야 할 관능이 없다고. 그들의 시선은 나의 기준이 아니다. 그들이 말 한마디로 내 외모를 비하하는 것이 나를 강간당하지 않을 존재로 만들지 않는다. 사람은 배신하지 않는다. 발기한 고추가 배신한다. 남성을 사람 취급하면 뒤통수를 맞는다. 우리 사이에, 내가 너를 이렇게나 믿고 신뢰하는데. 설마 네가 나를 강간하고 죽이겠어?
그 일은 일어난다.
불행은 방심이 아니라 신뢰를 타고 온다. 고추 위에 실린 얄팍한 신의.
나는 화가 났다. 항상 화가 나 있었다. 세상이 여성을 대하는 무례하고 관음적인 태도에. 여자가 몸을 가누지 못하면 남성 일행이 힘겹게 부축하며 가게를 나가는 뒷모습에서 나는 언제쯤 눈을 뗄 수 있을까. 그 여성이 술을 깰 때까지의 하룻밤 내내 기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니가 무슨 여자냐?'라고 얘기하면서 단 둘이 자취방에 앉으면 '너도 이럴 줄 알고 부른 거 아니었어?'라고 말하는 뻔뻔함에, 내가 안일하다고 우기며 우정을 여지라고 우기는 작태에 이골이 난다. 사람은 믿는다. 남성은 믿지 않는다. 남성을 믿은 것에 대한 대가는 불쾌함으로 돌아온다. 이 불쾌함이 비단 육체적인 것이 아닌 것은 슬프도록 다행스러운 일이다.
스무 살, 내가 이런 것들을 몰랐던 나이. 모를 수밖에 없었던 나이, 세상이 꿈과 기대와 시작으로 벅찼던 나이.
잠재적 범죄자를 꿈꾼다.
스무 살에 누군가의 후장을 쑤시고 괴롭힐 수 있는 권력이, 그만큼의 안심이 나에게 있을 수 있다면.
가부장과 힘과 사회가 용인해주는 성별로 태어났다면, 나는 잠재적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나와 같은 성별로부터 사회에 돌아다니고 있는 수많은 잠재적 피해자들을 안심시켜보려고 좀이 쑤셨을 텐데. 다른 성별로 태어나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그 기분을 모르겠다. 갓 대학에 들어간 어린 여성을 따먹어야 할 먹잇감으로 보는 사고를, 술김에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이고 창창한 미래를 꿈꾼다며 잘못을 비는 작태를.
내가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지 생각한다.
나의 성별이 잠재적 범죄자가 되려면 얼마만큼이나 세상을 뒤집어야 하는지를 생각한다.
그때까지 뉴스의 안팎에서, 주변과 물밑에서 얼마나 많은 나의 성별이 고문당하고 강간당하고 도망치면서 죽어야 하는지, 나 역시 그렇게 죽는 건 아닐지. 화가 나 있는 것으로 정말 충분한지. 그 정도로 바뀌어줄 세상인지. 왜 아직도 억울하고 기막히기만 한지.
고인의 명복을
고인의 명복을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