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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Nov 06. 2023

Washington 17. 게릴라성 집중호우

이제 보내줄게, 비바람과 함께!


정체가 뭔가 기원이 어디요

내 앞에 버티고 있는 그대는 뭔가


크라잉넛, <게릴라성 집중호우> 중


*

새로운 팀장님을 만나서 그나마 또렷해진 것이 있다. 바로 출근시간이다. 오늘부터는 오후 2시까지 출근이다. 평소처럼 일어나 아침도 먹고 거울도 한번 더 보고 출근한다. 분명 어제까지도 마음에 드는 구석 하나 없던 얼굴인데, 지금은 좀 봐줄만한 것 같기도 하고.


근래는 가만히 있어도 귀가 피곤해서 음악을 들을 생각도 없이 살았다. 차를 끌고 다니니 귓구멍 안에만 고이는 소리가 부담스럽기도 했다. 귀에 이어폰을 꽂지 않은지 일 년이 넘어가는 11월의 초순, 방금까지 비가 그치고 촉촉한 오후에 갑자기 노래가 듣고 싶어 졌다. 작년 이맘때쯤 우연히 듣고 여전히 나의 플레이리스트 첫곡을 차지하고 있는 크라잉넛의 ‘게릴라성 집중호우’를. ‘명동 콜링’과 ‘좋지 아니한가’만 알다가 알고리즘으로 타고 넘어온 노래가 마음속에 콕 박혔다.


떨어지려 한다 떨어진다.

이번 차례는 나인가.


뭐 이렇게 찌질한지, 가사도 이런 덜떨어진 내용이 다 있나 싶다가도 맥없이 위로받는다. 별 뜻 없는데 전위적으로 보이는 제목도 좋고. 과거의 미술학도로써 르네 마그리트의 콩코드와 이상의 오감도를 떠올리게 하는 운율도 좋다.


또 다른 한 사람 밑으로 밑으로 떨어지네

또 다른 두 사람 밑으로 밑으로 떨어지네

또 다른 세 사람 밑으로 밑으로 떨어지네

또 다른 네 사람 밑으로 밑으로 떨어지네


이번 차례는 나인가.


꽃도 없는 세상에 나비처럼 부유하는 짝사랑을 떠올린다. 중력이 묵직하게 느껴지면서도 훌쩍 날아 보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정체는 뭐고 기원이 뭘까. 나는 왜 그때 너를 만나서 이렇게 있는 힘껏 네 생각만 하며 살고 있는 건지.

오늘은 크라잉넛의 노래를 들으면서 출근한다. 오랜만에 이어폰도 꺼내 들었다. 내년 이월 다시 워싱턴 디씨에 가면 네가 나를 만나줄까. 지긋지긋하게 짝사랑 투정을 받아준 친구는 그 말을 듣더니 나에게 말했다.


“걔가 정말 착한 놈이라면,”


나는 부루퉁하게 대꾸한다.


“걔는 정말 착한 놈이지.”


친구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마저 말한다.


“너한테 상처 주고 싶지 않아서 너를 만나지 않으려고 하겠지.”


이런 걸 들으면, 걔가 좀 나쁜 놈이었으면 좋겠다 싶다가도 결국은 너무나 좋은 사람이었다는 걸 인정하게 된다. 그만큼 다정한 사람이 아니었으면 내가 이렇게까지 젖어버리지도 않았을 텐데.

내 앞에 버티고 있는 그대는 뭔가.


비가 올 듯 말 듯 한 오늘 같은 날 들으면 습기에 잠겨 낄낄 웃기에 딱 좋다. 태양이 눈을 찌르는 날도 호우를 기다리며 춤추기 좋다. 창문을 열고 여행을 갈 때면 눈앞에 없는 얼굴을 그리며 워싱턴 디씨를 추억하기 좋다. 우울하고 자존감이 바닥을 찍을 때 들으면 하수구 구멍 같은 인생도 꽤 유쾌통쾌 재미있게 느껴진다.

내일 있을 출장에 나는 운전석 첫 노래로 이 곡을 들을 것이다. 날씨가 좋기를 바라면서, 싸늘한 가을밤에 모닥불을 그리고 밀밭 같은 머리색에 사파이어 같은 눈동자를 한 너를 떠올리며. 올 초에 있던 출장에서 테오도르는 말했었다.


그곳은 춥구나. 디씨는 날씨가 좋아. 춥지 않게 있다 와야 해.


이번 출장은 집중호우 없이도 추울 것 같다. 내가 미국에 가면, 너는 나를 만나줄까? 네가 조금만 개새끼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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