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인 Nov 17. 2023

섹스를 하기에는 너무 피곤하다

속옷 짝을 어떻게 맞춰


우리가 섹스를 덜 하는 건 우리가 섹스를 덜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피곤하기 때문이다.​

앤 헬렌 피터슨, <요즘 애들> 중

​​


*​

요즘 체중 감량을 하느라 아침마다 몸무게를 쟀더니 뭐 하나를 먹으려고 해도 죄책감이 든다. 새 회사를 다니면서 이렇게 된 건지,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어서 이런 건지. 내가 더 예뻐졌으면 좋겠다. 허리는 날씬한데 가슴과 엉덩이는 투실한, 허벅지 사이가 붙지 않는데 종아리는 매끈한 몸을 가지고 싶다. 피부도 더 하얬으면 좋겠고, 얼굴에 점도 없었으면 좋겠고. 내 안의 구성물질이 조금 바뀌어버린 느낌이다. 남한테 피해 안 줄 정도로 그럭저럭 단정하게만 입으면 된다고 생각하던 나는 언제 사라져서 어디로 갔을까. 외관을 걱정하다 보면 스스로가 부쩍 초라해져서 기가 죽는다. 그런데 또 거울을 보면 이게 썩 못난 얼굴이 아니라 기분 좋아졌다가, 체중계 위에 올라가면 한숨 쉬다가, 한심한 일상의 반복이다.

지금 몸은 나쁘지 않다. 큰 행사가 있어 제 때 끼니를 챙기지 못하니 저절로 살이 빠졌다. 그 성과는 지금 말짱 도루묵이 되었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군살이 붙었던 작년 이맘때의 몸보다 봐줄 만하다.

나는 왜 날씬해지고 싶은 걸까. 보이지 않는 속살이 보이는 곳보다 완벽해봤자 누구한테 자랑을 하려고. 이런 노력은 언젠가 나의 벗은 몸을 보게 될 누군가에게만 좋은 일 아닌가. 갑작스럽게 섹스하고 싶은 사람을 찾았을 때 움츠러들고 숨지 않고 당당하게 옷을 벗고 싶다. 내 몸은 나한테만 마음에 들면 된다는 말은 핑계다. 예쁜 것을 꽁꽁 숨겨두면 예쁘다는 걸 어떻게 알아? 나는 보여주기 위해 예뻐진다. 쉬는 날 세수도 안 하고 거울을 봤을 때 내가 너무 예쁘면 이 모습을 봐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게 아쉽다. 혼자서는 예쁠 수 없다. 누군가 보아 주고 귀여워해주어야 비로소 외모에 대한 안정감이 생기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 발생할지 모르는 섹스를 준비하는 건 (나에겐) 정말 성가시고 귀찮은 일이다. 속옷을 위아래로 맞춰 입어야 하고, 피임약을 먹어야 하고, 좋은 향기기 나는 로션을 발라야 하고, 체모를 모조리 밀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출근하고 퇴근하는 일상에 장착하고 다니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어릴 땐 애인이 생기고 나서야 제모를 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것도 너무 귀찮은 일이었다. 그래서 연애하지 않고 내 몸이 편안한 채로 몇 년을 보냈다. 저자가 말하는 피곤함은 말 그대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현대인들을 말하는 거겠지만, 내 경우에는 진짜 ‘피곤해’ 지는 거다. 속옷장에서 짝이 맞는 브래지어와 팬티를 뒤져야 하는 것, 십 분이면 끝날 샤워가 제모 때문에 이십오 분은 족히 걸리는 것, 섹스를 할 때 부끄럽지 않은 몸을 만드는 것, 같이 섹스하고 싶은 사람을 찾는 것(전무하다)이 너무 짜증스럽다. 거울 속에 내가 예쁜 게 좋은 것은 지금 마음에 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을 언제 만나게 되더라도 준비되어 있는 예쁜 나를 보여주고 싶다. 이럴 때마다 누군가의 선물세트가 되려고 아등바등 살았나 싶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데 내가 예쁘면 나도 좋고, 걔도 좋고.

그런데 귀찮다. 좋아하는 사람이 멀리 있을 땐 더더욱. 그러니까 섹스가 피곤한 것이다.

얼마 전 장기연애를 하다가 헤어진 친구는 소개팅에서 만난 네 명의 남자들과 다 자봤다고 했다. 그렇게 몸까지 맞춰보고 가장 잘 맞는 사람을 만나 넉 달 넘게 교제를 이어가는 중. 그럼 너는 남자랑 만날 때마다 제모도 하고 속옷도 골라 입고 가?라고 묻고 싶지만 나도 워싱턴에 갈 때 전신 제모며 보정속옷, 힐 따위를 바리바리 싸들고 갔던걸 생각하면 할 말이 없다.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건 그때부터 온몸이 섹스할 준비를 하는 거나 마찬가지인 건지. 웃기고 허무하다. 또 누군가가 생겨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박박 닦고 꾸밀 생각을 하면 희희낙락 지금처럼 사는 게 백번 나은 일이다. 그래도 참 이상한 게, 아무리 피곤하고 우스울지라도 샤워기 아래 오래 서있던 그때로 종종 돌아가고 싶다. 살짝 두근거리고, 내 손길보다 남의 손길을 받으려고 기대감에 차 있던 그때로. 사람 마음이란 게 이렇게 희한할 수가 없다. 편하고 아늑한 길을 놔두고 기어코 마음을 남의 손에 맡기고 싶어서 안달이 난다. 귀찮고 피곤해도 결국은 사랑받는 걸 선택한다. 사랑을 받으려면 먼저 누군가를 사랑해야 한다. 몸을 일으켜 단장하는 수고를 할 만큼 사랑을 해야 한다. 그래서 내가 섹스를 못하나 봐. 그 사람이 없으면 사시사철 피곤에 절어있어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