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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Sep 04. 2024

영원히 저물지 않을 민초들의 이야기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그들의 세상은 재수가 없다니깐요



“묘해, 인간이라는 것 말씀이야. 어디까지 측은하고 어디까지 악독한 건지 측량할 수가 없어. 제아무리 크다 한들 기껏 팔척 장신, 이 괴물이 전후좌우 어찌 그리도 방자한지, 복잡한지, 그런 생각 해본 일 있어? (후략)“


박경리, <토지 12>


*

토지 16권 완결 편을 앞에 두고 펼치지 못하고 있다. 장장 사 개월을 토지만 읽으며 살았는데 이 한 권을 덮으면 진득히도 붙어있던 인물이며 이야기가 기어코 저물게 된다는 것을 마주하기 싫은 기분. 완결을 보고 싶지 않지만 어서 이 책을 갈무리해야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다. 토지가 가지는 의미는 민중이 있는 한 이야기에는 끝이 없으며 영원히 이어지리라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지난 토요일 나는 토지 15권을 다 읽었다. 이제 정말 단 한 권만 남은 것이다.


읽어야 할 책을 외면하니 이래저래 딴짓만 하게 된다. 강아지 용품과 장마대비 물품을 사고, 배달음식을 시켜 먹고, 시간 때우는 용도의 코미디 영화를 본다. 어제 초밥에 물회를 먹으면서 본 영화는 미국의 대학 신입생들을 주인공으로 한 로맨틱 코미디였다. 아주 전형적인 방식으로 묘사한 대학 동아리가 나오고, 전형적이지 않은 백인 여학생이 주인공으로 나오며, 그의 연인이 될 조연남자 배우는 인물의 이름부터 프린스다. 어릴 때 봤던 영화인데 오랜만에 틀어놓으니 그럭저럭 봐줄만하다. 미국 하이틴의 재수 없음과 속물스러움을 정수리 위까지 끌어올린 영화.


마초 서양인들의 외모평가가 난무하고 금발 백치 백인 여성들이 우수수 등장하는 걸 보고 있자니 초여름에 어느 나라 국왕의 생일파티에 갔던 것이 생각났다. 초청받아서 간 건 아니고, 초청받은 사람들을 위해 칵테일을 만들어주는 용도였다. 열심히 세팅을 하고 호텔 측에 이런저런 것들을 전달하고 행사 시작을 기다리고 있는데 입장객이 모일수록 웃음만 나왔다. 그냥 뭔가를 알 수 없는 비웃음이.

새틴 드레스, 우아한 힐, 미용실에서 올려 묶은 머리, 다 똑같이 생겼지만 값비쌀게 분명한 턱시도, 과장스러운 웃음, 끼리끼리 모여있는 무리. 영화 속에서나 보던 미국의 졸업파티를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 따라 하고 있다고 해야 하나. 심지어 행사의 주제는 ‘뮤지컬 가장무도회’였다. 키가 190이 넘는 사회자는 오페라의 유령 분장을 하고 나왔고 어린애들 핼러윈 의상 같은 걸 입은 외국인들이 우스꽝스럽게 돌아다녔다. 그 옆을 지나가는 한없이 도도한 백인 귀부인. 이다음으로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영화에서 본 자선 경매 파티에서의 풍경이 이어졌다. 사회자가 농담을 던지면 기다렸다는 듯이 적당히 웃어주는 사람들, 익살스러운 진행자가 나와서 더 많은 돈을 쓰도록 하는 고가 상품 경매, 베스트 드레서에게 돌아가는 명품 상품권. 한국드라마에서의 많은 연애가 과장되었고 우스꽝스러운 것처럼, 나는 미국의 파티도 막상 가보면 덜 형식적이고 더 재미있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하다못해 한없이 고고하기만 하던가. 어중한하게 구색을 갖춰서 골고루 철없어 보이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영국 국왕은 이번에 암에 걸렸다지. 이 모든 게 어찌나 우습고 빈 해 보이던지. 여기 있는 모두가 있지도 않은 품위에 어찌나 절실히 매달리는 것처럼 보이던지. 파티 내내 나는 피식피식 실소가 나는 것을 참느라 고역이었다. 정작 그 치들이 보기에는 내가 이 호화스러운 파티의 참석자들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 고용된 원숭이 같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생각을 못할 건 없지 않은가. 우습다, 우스워! 이 꼴을 내 눈으로 보고 있는 게 다.


날이 갈수록 세상에 나에게 뒤집어 씌우고 있었던 예쁘장한 필터가 가장 흉측한 방식으로 씻겨나간다. 아니면 그것들은 정말 꽤 아름답고 의미 있는 것들인데 내 눈이 삐딱해서 달리 보고 있는 걸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 꼬락서니를 동경하며 턱시도의 제비꼬리를 잡느니 그들을 비웃으면서 개밥도 안 받고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걸 택하고 싶다. 이제 돈냄새는 지긋지긋하다. 여기저기 돈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가늠만으로 질식해 죽어버릴 것 같다. 마치 자기들은 죽으면 진물 안 나올 것처럼, 배에 가스도 안 차는 종족처럼 으스대는 사람들.

개개인을 놓고 보면 유쾌하고 재미있는 사람들이라는 걸 안다. 그런 사람들이 군중이 되는 순간 얼마나 일정 계층의 군집으로 보이는지, 그게 얼마나 꼴불견인 줄은 그들은 알 필요가 없다. 당연하지. 나 역시 나의 계층 중 한 사람이 되면 한없이 초라할 테니.


그간에 그런 일이 있었다.


민중이 있으면 토지는 이어진다. 토지를 놓기 아쉬운 마음을 나도 놓아야 한다. 나는 지난주에 토지 15권을 다 읽었다.

토지가 끝나면 귀족들의 호텔 파티에서 느꼈던 고루함을 어디에서 위로받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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