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인 Dec 07. 2023

Washington 18. 지구는 사랑에 문제가 안돼

우리에게 남은 문제는

말해봐요, 조



Did you hear me, Butterfly? Miles to go, before you sleep.


<Stopping by Woods on a Snowy Evening> ROBERT FROST


*

아침부터 마음이 살랑살랑하다.

그쪽에서는 분명 아무 생각 없이 보냈을 텐데 받은 사람만 미로 속이다. 지난번 감흥 없는 대화가 마지막이었는데 고작 연락 한번 먼저 왔다고 또 설레고 난리다. 사람 마음이란 뭘까. 당장 하루 더 사는 것도 고민하고 살아있어야 할 판인데 사랑은 하고 싶다.


워싱턴 디시로 맞춰놓은 시계도 지우고, 하루 네 번씩 들여다봤던 사진들도 삭제했다. 진짜 깔끔하게 포기했었다. 뒤늦게 반해서 두 달 만에 미국도 가고 손도 잡고 키스도 하고 잠도 잤으면 그래도 나쁘지 않은 로맨스를 찍은 거라고. 비록 단편극이었지만 멀기도 멀거니와 서로 진지하게 대화해 본 적도 없는 사이에 더 바랄 것도 없었다. 가망 없겠구나 생각하니 정리도 빨랐다. 잠깐의 좋은 추억, 꿈에서 만난 왕자님처럼 금방 흐릿해졌다. 그렇게 근래 들어 가장 편안한 열흘을 보냈는데 그 사이에 덥썩 연락이 올 건 뭐야.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장난칠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그냥 우연히 홍콩 사진을 보고 내 여행이 떠올라서 문자 했겠지. 가벼운 안부, 심심한 인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랑은 이 정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마실 물도 쬘 빛도 너무 부족하다. 그런데 왜 내 것만 이렇게 악착같은지 모르겠다. 이만큼 했으면 걔가 나에게 그러하듯 쿨하게 예전처럼 친구처럼 대해야 하는데. 그만 떨리고 그만 기다려야 하는데 마음처럼 안된다. 정말 성가셔 죽겠다.


어제는 영화 <조 블랙의 사랑>을 보고 잤다. 스치듯 보던 클립영상에 괜히 테오의 얼굴이 생각나는 장면이 있어가지고 기억해 두었던 영화였다. 두 달째 미뤄오다가 마음을 접었고, 접었던 마음을 펼쳐든 밤에 영화를 보았다.


그럼 말해봐요, 조.

당신처럼 매력적이고

똑똑하고

말도 잘하는 데다

여자에게 쉽사리 다가가지 않으면서도

강한 남자가

왜 아직 혼자인 거죠?


하긴. 나도 늘 의아하고 불안했다. 이렇게 멋지고, 사랑스럽고, 눈부시고, 귀여운 애가 어째서 애인이 없을까. 여기저기서 달려들어도 모자랄 판에. 모두가 너를 원할 것 같은 세상에. <조 블랙의 사랑>은 브래드 피트가 잘생겼고 배우들의 연기가 좋았다. 사실 테오보다는 아빠가 많이 보고 싶어 지는 영화였다. 그 녀석도 어떤 영화를 보면서 내 생각을 할까? 아니, 내 생각을 하기나 할까? 우리가 나란히 있었던 날이 기억은 날까?


워싱턴 디씨의 시간으로 돌아가있는 시계를 다시 꺼냈다. 내가 새벽이면 미국은 이른 아침이고 한국이 늦은 아침이면 미국은 초저녁 시간이다. 시차는 깨어있는 시간 내내 네 생각을 하는 나에게 큰 문제가 아니다. 네가 내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시차보다 더 큰 거리일 뿐.


오늘 문장은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 <데쓰프루프>에 나온 시구다. 내 말을 들었니, 나비야? 네가 잠들기 전에 가야 할 길이 아주 멀단다.

지구 반바퀴의 시차 같은 건 사랑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모진 것은 우주의 별들만큼 멀리 있는 너의 마음이다. 나를 절대로 사랑하지 않을 너의 마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