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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남태령에 나도 있었다

아마 평생의 자랑일 거야

by 해인


인간은 무언가를 사랑해야만 살 수 있다.


샬롯 브론테, <제인 에어 1>


*

나는 결혼식에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행복한 순간에 유독 많이 울기 때문이다. 13년 지기 친구의 결혼식에서도 울고, 생판 남이나 다름없는 직장 동료의 결혼식에서도 울었다. 누군가를 만나 평생을 함께한다는 약속을 하는 게 눈이 부셔서, 어느 누가 되었든 그 앞길이 봄에 돋은 새순처럼 보드랍기만을 바라다보면 눈물이 나온다. 바보 같고 부끄러운데 참을 수가 없다. 그래서 결혼식은 되도록 안 가고 싶다. 모두가 나 같은 마음으로 모이는 자리일 테니, 나 하나의 축복은 멀리서 보내어도 된다는 마음으로.


그렇게 인생동안 가 본 결혼식이 다섯 손가락에 꼽을 만큼 버티고 버텼는데 이제는 매일 주말마다 운다. 이건 거대한 결혼식이다. 국가와 시민들이 평생을 함께하자고 맹세하는, 어떤 증명의 현장이다. 같은 마음으로 모여든 사람들이 파도처럼 펼쳐져있는 것을 마주하면,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눈물이 나는 것이다.


2016년 촛불시위에 수많은 인파 속에서 나 하나쯤은 빠져도 될 거라고 생각하고 가지 않았다. 방배역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전원 구조가 오보였다는 뉴스를 보고 옆에 있던 당시의 애인에게

“나 그래도 다이빙 자격증이 있는데, 내가 가면 도울 수 있는 게 없을까?”라고 물었던 순간을 기억하면서. 그때 나도 같이 까만 물밑으로 가라앉고 있는 듯한 감정을 여즉 잊지 못하면서도 가지 않았다. 그때 애인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누나 하나 거기 간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나는 이제 매주 시위에 간다.

12월 6일 금요일부터, 매주 토요일, 일요일, 시민의 머릿수 하나가 필요해 보이면 어디든지 간다. 지난 토요일에 나는 광화문에 있었고, 농민분들이 경찰에게 제압당하고 있다는 소식에 남태령으로 갔다. 다음날 한강진에서 노래가 울려 퍼질 때에도 함께했다.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렸는지. 내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결과에는 근처도 가지 못했는데, 고작 작은 장애물 하나 넘은 것뿐인데 왜 그렇게나 온 세상이 희망차게 보이던지. 새벽까지 경찰과 대치하며 차벽이 뚫리기를 기다렸던 시간을, 시민을 연행하는 경찰과 몸싸움을 하고 농민의 트랙터와 가로로 놓인 경찰버스 사이에 앉아있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방배로 가는 지하철에서 그때의 애인과 나눴던 대화가 아직도 생생하듯이.


짐승 같은 시간이었다. 역사의 순간에 연대한다는 뿌듯함과, 다치기 싫다는 마음, 내일도 출근을 해야 한다는 불안감이 같이 드는 시간. 월요일이 되기 전에 행진을 계속해야 한다. 사람이 줄어들면 경찰들은 농민을 연행하고 트랙터를 견인해갈 것이다. 시민들이라고 안전할 수 없겠지. 저녁 8시에 남태령에 도착해서 긴 시민행렬에 안심하면서도 길 한복판에 짐짝처럼 줄지어 선 트랙터에 벌컥벌컥 눈물이 났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전봉준이라는 멋진 장군의 이름으로 투쟁하는 분들의 소중한 무기가 차가운 밤 한길에 이렇게 있어서는 안 되는데. 나는 이 트랙터의 행렬을 일주일 전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곧 잘릴 나의 직장에, 따스함 따위는 없는 나의 일터에서 유일하게 좋아하는 것이 회사 건물 입구에 서있는 전봉준 장군의 동상이기 때문이다. 토지부터 태백산맥까지를 보며 사람이 하늘이라 말했던 동학농민운동의 기개를 잊을 수 없다. 그래서 녹두장군의 이름을 쓰는 투쟁단이 마땅히 서울에 올라와서, 광화문을 한 바퀴 돌고, 안국에서 명동으로 가는 길 가운데에 있는 내 회사건물 앞의 전봉준 동상을 만나기를 바랐다. 그의 후손들이 이렇게나 용맹하고 늠름하다고. 그러나 결국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휘황한 네온색의 물결은 장군님 앞을 지나갔다. 10만 인파가 행진하는 거리를 일제의 고문에 다리를 쓰지 못한 자세 그대로 앉아서 보고 계셨을 것이다. 전봉준 투쟁단이 함께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원체 추위를 잘 타 더울만치 두껍게 입고 다니는 나조차도 한겨울 남태령 언덕의 바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몸이 떨리고 발끝이 얼어붙는 감각이 오랜만에 느껴졌다. 주변에서 계속 핫팩을 쥐여주고 따뜻한 커피가 배달됐다. 그렇게 많은 것을 받는데도 옆자리에서 토끼인형을 안고 있는 친구의 장갑 없는 손이 신경 쓰였다. 빨갛게 질린 손끝을 꽉 잡아서 녹여주고 싶었다. 경찰버스 앞에서 덜덜 떠는 나에게 농민 한분이 트랙터에서 쓰던 방석을 가져와 내밀었다. 나는 또 울었다. 따뜻하고 고마워서 차 빼라는 구호를 외치며 계속 울었다.


집에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다. 경찰들의 태도가 매섭고 시려서 갈 수가 없었다.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시민들에게 피곤하고 성가시다는 태도로 일관하는 것이 기가 막혔다. 멀쩡히 운행하고 있는 트랙터를 가로세운 버스로 막은 것은 그네들이면서. 트랙터 유리창을 깨고 농민을 폭행해 시민들이 모여들게 한건 경찰들이면서. 경찰은 그들이 깔아 둔 판을 꽉 채운 우리에게 불법시위를 해산하라고 말했다. 우리가 도로를 점거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찰들이 도로를 막지 않았다면 트랙터가 멈춰 설 일도, 내가 광화문 시위를 마치고 남태령에 올 일도 없었는데. 중간에 시민을 연행한다는 말이 들릴 때는 격하게 몸싸움을 했다. 다짜고짜 끌고 가려는 경찰들을 비집고 들어가 연행대상 시민을 끌어안고 사유가 뭔지, 민주 변호사를 기다려야 한다고 소리를 질렀다. 짐승 같은 시간이었다. 단 하나도 평화롭지 않았고, 매분 매초가 신경전이었다. 추워서 입술이 파랗게 질리는 겨울, 빨치산 투쟁도 못할 것은 아니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경찰이 아니라 농민의 편에서, 같은 마음의 동지들과 싸울 수 있다면.


새벽 두 시에 차벽이 뚫리고 모두가 환호했다. 하지만 사당 IC 앞에 세 겹의 차벽을 세웠다는 것을 듣고, 크레인이 여전히 대기 중이라는 말을 듣고 나는 혼자서 집에 왔다.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회사가 알아서는 안되고, 월요일에 출근을 해야 했으며, 무엇보다 위험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표정 없는 경찰병력에 늘어선 경찰버스는 공포심을 조장한다. 모든 상황이 저 차벽안에 사람들이 안전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하게 만든다. 나는 겁쟁이라 돌아 나왔다. 다음날에 무슨 일이 생기던 이 밤을 기억하리라. 집에 오자마가 강아지에게 밥을 주고 산책을 시켰다. 비로소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우니 온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 유튜브로 남태령 시위현장 라이브를 아침 8시까지 보다가 잠이 들었고, 12시에 깼다. 아직도 경찰이 길을 열지 않고 있었다. 사람들이 출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흩어져야 하는 월요일 새벽을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야지.


어제 하루종일 쫄쫄 굶으며 남태령에 있을 때는 배가 엄청 고팠는데, 집에서는 현장에 있을 사람들이 걱정되어 그런지 밥맛이 없었다. 아침에도 좋은 소식이 없어 식욕이 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속이 든든해야 할 것 같아 밥을 목 끝까지 욱여넣었다. 어제의 추위를 떠올리며 더 두껍게 입고 더 많은 짐을 챙겼다. 강아지에게도 산책을 길게 시킨 다음에 고봉밥을 부어주었다. 막 차에 시동을 걸려던 찰나, 전농 대장님의 방송이 들렸다. 경찰과 협상이 끝나 용산까지 행진을 시작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바로 한강진으로 차를 돌렸고, 전봉준 투쟁단의 끝내주게 웅장한 트랙터 행진에 함께했으며, 일할 때 쓰는 마이크를 차고 시민들에게 물과 김밥을 나눠주었다. 계속 울면서, 펑펑 울면서.


내가 남태령을 떠난 새벽 2시 30분은 차갑고 공포스러웠다. 시민들이 음식배달과 푸드트럭을 보내기 시작한 아침 5시는 따뜻했을 것이다. 기운이 나고 희망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동이 트는 시간까지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가장 추운 시간에 있었지만 그때의 남태령도 서로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농민분들이 허리숙여 해주는 감사하다는 인사에, 장구와 꽹과리로 연주하는 우리 가락에, 서로 안부를 묻고 다 같이 지오디의 ’길‘을 노래하고 응원봉을 흔드는 순간에, 늦은 밤에도 서로가 춥지 않기만을 바라며 나눠주는 핫팩과 에너지바에 나는 따뜻했다. 그래서 그때가지 버틸 수 있었다. 이렇게 다정한 군집에 둘러싸인 것이 행복해서 많이 울었다.


정말 무서울 때에 나는 도망쳤지만, 거기 있던 사람들은 승리를 만들었다. 원래대로라면 이쯤에 우는 것이 싫어 더 이상 시위도 가고 싶지 않다는 말이 나와야 하는데, 나는 이제 더 울어버리려고 시위에 간다. 옆에 있는 사람들을 마음껏 안아주고 가장 사심 없는 마음으로 안부를 묻기 위해 시위를 간다.


지금까지의 모든 정황상 나는 이 나라가 뒤집히면 처형감이다. 수괴가 전기와 물이 통하는 뜨신 집에 칩거 중인 지금도 언제 경찰이 집 문을 두드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살고 있다. 언제 회사에 찾아와 나를 연행할지 모른다는 긴장감에 살고 있다.

결혼식에서 아낀 눈물을 이렇게 쓴다. 마땅히 내가 사랑해 마지않던 것을 지키기 위해 쓴다. 나중에 나를 위해 눈물을 흘려줄 것 같은 사람들에게 쓴다. 눈이 빠지게 울어도 아깝지 않다. 나는 행복할 때, 가슴이 벅찰 때, 사랑할 때 더 많이 울기 때문이다.


1월 3일 한강진 내란범의 관저 앞에서,

1월 4일 광화문 동십자각에서 보아요.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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