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 소리 하는 동지는 밉지? 그니까 참을게
“허전하고 맘 한구석이 텅 빈 것 같애서 갈 바를 못잡겄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 당대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일 기다.”
박경리, <토지 9>
서울교육청 앞에서 농성을 하던 사람들이 오늘 아침 경찰에 연행됐다. 집회가 신고제인 나라에, 위협적이고 폭력적인 내란 옹호 집회와 대학교 내 반인권적인 반여성주의 집단이 맞붙는 세상에 교육청 앞에서 학교 내 성폭력 해결을 위해 목소리를 내었다가 부당해고 당한 교사의 농성과 그 연대자가 경찰에 끌려갔다. 지혜복 선생님과 연대하던 금속노조 코레일네트웍스 서재유 지부장은 경찰의 폭력진압으로 연행되는 와중에 다리가 부러져 구급차에 실려갔다. 나는 잠을 덕지덕지 붙인 얼굴로 버스에 실려 서울 교육청 앞으로 가는 중이다. 아직도 꿈 속인 것처럼 몽롱하다.
경찰버스 안에서 트위터를 하는 애들은 다 스물넷 스물 다섯의 여자애들이다. 이보다 조금 많거나, 많이 적은 나이의 아이들. 나는 이들을 알고 있다. 바로 어제 노동자들의 쉼터 영등포 꿀잠에서 한진기업 조선소 금속노조원들의 투쟁기를 담은 영화 <그림자들의 섬>을 보며 같이 울었던 동지들이기 때문이다. 나처럼 머리에 빨간 띠를 묶고, 맨 뒤에 앉은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동지들을 꼬옥 안아주었다. 처절한 고공농성과, 투신자살과, 산재 사고가 나오는 영화를 보고 눈시울이 붉어진 동지의 손을 잡으며 우리 안에 누구도 ‘열사’는 없다고, 절대, 아무도, 아프고 다치고 죽어선 안된다고 말하던 아이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었던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동지 중 한 명도 연행되었다. 아침 8시에 있었던 경찰 연행 이후 항의 방문을 하였다가 잡혀간 것이다. 도대체 왜?
정신이 몽롱하다.
사랑의 유효기간은 왜 이렇게 짧을까? 우리가 웃으며 찬란하게 광장에 나가고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며 도래할 새로운 세상이 눈앞이라 믿었던 시간들은 왜 저만치 뒤에 있을까. 아직도 거리에 투쟁하는 사람들을 두고 벅찼던 순간들은 어째서 다 두 달 전에 머물러있을까. 나는 좋은 기억들로만 손에 쥐고 살고 싶었는데. 가령, 너희가 열심히 하고 있다는 걸 알아주는 사람들의 진심 어린 목소리 같은 것.
언젠가는 이길 것이다. 그것이 자명한 사실이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그 승리를 내가 직접 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없다. 별처럼 쏟아질 수많은 승리 중에 단 하나라도, 하나의 온전한 개선과 변화라도 있다면. 너희랑 함께 있으면 단 하나라도 좋으니 우리가 이뤄낸 승리를 웃으며 찬란하게 맞이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지금은 잘 모르겠다. 말이라도 괜찮다고 하고 싶은데. 세상은 조금씩이지만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자위도 하고 싶은데, 모르겠다.
나도 교육청 앞에 있다가 너희와 함께 종로 관악 강남 동작 수서 경찰서에 이송되었다면 확신할 수 있었을까? 트위터 속 너희의 셀카처럼 활짝 웃고 브이를 한 채로 경찰버스 전경을 찍으며 교육감 정근식과 서울교육청을, 경찰과 공권력을 비웃어줄 수 있었을까?
어젯밤까지만 해도 함께 비건피자를 먹으며 깔깔 웃던 너희를 잃은 나는 무섭다.
얼마만큼 강해야 약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도저히 빨치산 투쟁은 못하겠다. 동지가 죽은 것도 다친 것도 변절한 것도 아니고 싸우다 경찰에 연행된 것뿐인데 세상이 무너진 것 같다.
선의와 양심이 정의가 될 수 있을까? 너희가 범법자라면 내가 지켜야 할 법은 도대체 어디에 있지?
법 앞에서 노동자에게는 문이 열린 적이 없다. 법 앞에서. 법 앞에서. 법 앞에서. 그 빌어 처먹을 대한민국의 법 앞에서.
허전하고 맘 한구석이 텅 빈 것 같다.
더 이상 못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을게. 우리 당대에 아무것도 못 이룰 것 같다는 말도 하지 않을게. 말에는 힘이 있으니까. 말하게 되면 말에 휘둘리게 되니까. 그래도 나는, 뭔가 잘 모르겠어. 앞이 안 보여서 가야 할 길을 알 수가 없어. 아마 유치장이 여기보다 훨씬 밝을 거야. 너희가 그 안에 있으니까. 그럼 밖에 있는 나는 어떡하지? 어떡하지?
이 글을 쓰다가 정류장을 놓쳤다.
제기랄.
다 너희가 없어서 그래. 우리가 너희를 지키지 못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