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관람 메모
여자는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바다로 뛰어들고, 남자는 저 멀리서 목소리만 들리는
정적이고 단아한 이야기의 시작.
허리를 꽉 조인 여자들의 옷차림,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 모든 것을 벗어던지는 주인공.
영화의 모든 것은 아주 편안하다. 화장기 없는 맨 얼굴, 혼자 있을 때의 편안한 잠옷, 남에 눈을 신경 쓰지 않고 음식을 뜯어먹는 손짓. 무례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것이다. 사람은 다 저렇게 산다. 늘 허리를 조이고 머릿수건을 두르고 우아하게 와인을 마시는 게 아니라, 배고플 땐 허기를 채우고 혼자만의 시간에는 그만큼 부담 없는 차림으로 지낸다. 어느 나라 시대극을 보아도 일정 이상 추레해지지 않는 여성들 사이에서 화영화 속의 주인공은 생기가 넘쳐 보인다.
극단적으로 절제된 녹색 비단과 진하고 낡은 붉은 천의 대비가 극렬하다. 약혼자에게 보낼 딸의 초상화를 의뢰하는 어머니의 드레스는 어두운 푸른색이다. 삼 년 동안 아가씨의 일을 도운 소박한 하녀의 옷은 누르스름한 상아색을 띤다.
여성들은 햇살이 비치는 낮에 다시 불편한 차림새로 돌아온다. 적당히 예의를 갖춰 몸가짐을 한 느낌. 지난밤 인물들의 나른한 모습들에 눈이 익은 나는 보면서 자세를 고쳐 앉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검은 로브를 걸치고 막힘없이 나아가는 아가씨의 금발머리. 거무죽죽한 망토가 흘러내리며 구름 낀 하늘 아래 그녀가 모습을 드러낸다. 자유를 허락받고 첫 달음질에 보이는 아가씨의 팔목과 다리 뒤쪽 살갗이 머리칼만큼 희다. 인상적이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다. 얼마나 달리고 싶었을까.
엘로이즈(아델 에넬), 이탈리아로 정략결혼을 하러 가게 될 아가씨의 이름이다. 그리고 마리안느(노에미 메를랑)는 화가라는 사실을 숨긴 초상화가다. 그녀의 초상화는 약혼자에게 아가씨의 매력적인 외모를 전달하여 결혼 성사를 이루어낼 의무를 가졌다.
영화 속의 여성들은 딱 적당히, 인간으로 느껴질 만큼 흐트러져 있다. 흘러내린 묶은 머리, 비뚜름하게 걸친 코트, 내숭 없는 말투에 나는 속절없이 빠져든다. 사랑은 주인공 둘보다 나에게 먼저 찾아왔다. 내가 먼저 그녀들을 사랑하게 되어버렸다.
바람이 심한 바닷가 절벽에서 여자 두 명은 산책을 한다. 바다라는 공간이 등장할 때 마다 화면은 거셀정도로 심한 파도소리를 담는다. 얼굴을 반즘 가린 두 여성, 서로에 대해 숨기고 간파하고 긴장하고 있는 두 사람. 해안에서의 기묘하고 팽팽한 느낌은 엘로이즈의 언니가 겪었을 비극 때문일까. 마리안느는 시종일관 엘로이즈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모래에 물이 떨어지듯 무겁고 진중하게 그녀를 관찰한다.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한 언니 대신 시집을 가야 하는 엘로이즈의 초상을 그리는 것, 그것이 마리안느의 목적이자 임무이기 때문에.
'결혼'은 이 영화의 주된 주제다. 결혼과 억압, 순응. 남성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데 결혼이라는 제도만이 수없이 언급된다. 그것이 엘로이즈의, 그 시대 여성들의 삶이다. 상자에 갇혀 허용된 자유의 부스러기를 소중하게 안고 팔려가는 것. 제도의 노예가 되는 것. 아름다운 바보가 되는 것. 남성이 없기 때문에 이 것은 오롯이 여성만의 시각이 된다. 공감하지 않을 수 없고 엘로이즈와 함께 숨이 막히지 않을 수가 없는, 그것은 나도 여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 결혼하는 거 알아요?
밀라노 분과 한다는 것만 알아요.
내가 아는 것도 그게 전부예요.
두 사람이 한 피아노 의자에 앉는다. 두툼한 코르셋과 드레스의 품 너머라도 서로의 거리가 좁아든다. 어깨가 가까워진, 시선의 높이가 나란해진, 옆모습과 입술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다.
작업이 원만하게 진행되지 않아 마리안느는 한밤중에 와인을 따른다. 고민하고 고심하며 술을 마시는 여성. 보는 사람이 위태할 정도로 푸지게 마시는 것이 아니라 작업에 자극이 될 정도로만 잔을 든다. 치기와 광기의 사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시작된 것은 술과 취기의 향연이었다.
마리안느는 고백한다. 자신은 화가였으며, 약혼을 위한 본인의 초상을 그리기 위해 왔노라고. 곧 떠날 것임을, 자신의 임무를 완수했음을. 엘로이즈는 스스로가 물에 들어갈 차례라고 말한다. 언니처럼, 물새처럼 바다로 날아들어가지 못해 스스로의 초상이 형체를 갖추는 것조차 모르고 차디찬 바다에 온 몸을 적셔야 한다. 그것이 엘로이즈의 각오였다. 자살한 언니와는 다르게, 살아있는 채로 물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
그리고 엘로이즈가 말한다.
"그래서 나를 본 거군요."
나를 그렇게 쳐다봤군요. 모래밭을 뚫어버리는 빗방울처럼. 당장이라도 키스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당신이 본 내 모습은 이랬나요?"
모든 실망감이 담긴 말이다. 본인도, 그리는 사람도 닮지 않은 미달스런 초상.
마리안느는 충격을 받는다. 그녀의 화가 인생에 이러한 모욕은 겪어본 적 없는 일이기 때문에. 제도의 관념과 규율, 그 안에서 엘로이즈라는 인간이 가지고 있던 아름다움은 죄다 깎여나갔다. 그리고 엘로이즈는 한눈에 그것을 알아본 것이다. 마리안느는 그리다 말았을 뿐이라는 걸. 일부러 눈을 감고 붓을 놀린 것뿐이라는 걸. 이것보다는 자신을 더 그려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모델을 배려한다. 자세는 편안해요? 그대로 오래 버틸 수 있겠어요? 공간에 넘쳐나는 다정함. 이미 자각해 버린 연심. 당신이 이 곳을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
그것은 파란 드레스의 어머니가 섬을 떠난 오일 안에 벌어진다. 소녀의 임신, 중절, 자유, 방종.
미친 듯이 뛰어야 태아가 떨어진다는 말에 여자는 침대위에서 방방 뛴다. 매트리스와 이불보가 구겨지고 패인다. 낙태요법은 하나같이 복부에 힘을 꽉 주는 방이다. 가랑이를 헤집고 독한 약을 먹지 않아도 괜찮을 것만 같은 요행들.
그림 같은 억새밭에 세 여인이 고개를 드는 장면은 다분히 웃음이 날만 하다. 수더분하고 차분하다. 정적이고 시사적이다. 화면 안에는 여인들만 가득하다. 결혼을 종용당하는 여인,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여인, 낙태를 해 본 여인.
"어떻게 웃게 하나요?"
초상에 웃음은 필요 없다. 당신을 사랑할 때 보고 싶은 것이 당신의 웃음일 뿐이다. 사랑받기 위해선 웃여보여야 한다. 엘로이즈는 자신의 웃음을 팔려갈 초상에 담고 싶지 않았고 마리안느의 목적은 초상에 웃음과 애교를 담아 엘로이즈를 사랑받게 하는 것에 있었다. 그리고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사랑하게 된다. 그녀의 웃음을 보아버림으로써.
웃음기를 머금은 엘로이즈와 모델로 앉아있는 뻣뻣한 엘로이즈. 배우들의 표정 연기가 일품이다. 정적인 말 몇 마디에, 가벼운 농담에 꽃이 피듯 아가씨의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아가씨가 요리를 준비하고 화가가 와인을 따를 동안 옆에 앉아 수를 놓는 하녀. 화면 속 여성의 순간은 계급도 갈등도 없이 어느 때보다 단조롭고 느슨하다.
책 속으로 들어갈 것처럼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비극적인 사랑을 낭독하는 엘로이즈. 신화에는 동정도, 기회도, 사랑도 있었지만 그 끝은 죽음과도 같은 결별이었다. 마리안느는 오르페우스의 입장을 옹호하는 듯하다. 프로페셔널로서, 예술가로서 남기 위해 스스로 그녀와의 추억을 되새기고 그녀를 있어야 할 곳으로 돌려보냈을 수도 있다는 말을 한다.
"오르페우스는 연인이 아닌 시인의 선택을 한 거죠."
책의 마지막 문장을 마저 읽은 엘로이즈는 말했다.
에우리디케가, 오르페우스가 사랑한 비운의 여인이 먼저 말을 건넸을 수도 있지 않냐고.
"뒤돌아봐요, " 하고.
괴테의 발푸르기스의 밤이 연상되는 음악과 분위기였다. 극도의 긴장, 이야기의 절정, 제목과 도입부와의 연결성, 엘로이즈의 단호한 표정과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는 마리안느. 칠흑 같은 융단 드레스에 타오르는 불꽃을 매단 채 한 발짝 두 발짝 밤길을 걷는 엘로이즈는 세상에 그 누구도 기댈 곳 없는 채로 여성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결혼과, 낯선 남자와의 섹스와, 임신과, 출산과 육아가 있는 곳으로.
엘로이즈는 산채로 저승으로 간다. 죄를 짓지도, 원하지도 않았지만 여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저승과도 같은 인생을 향해 간다. 오르페우스 신화에서 에우리디케는 무슨 생각으로 저승에 떨어졌을지 그 누가 물어본 적이 있던가. 그녀는 오르페우스라는 시인이 사랑한 여자였다. 그것이 서사의 끝이었다. 모든 여자들은 그것보다 광범위한 삶을 살고 있는데도.
타오르는 여인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저승으로 가는 길목 끝에 반짝 붙은 불. 모든 것을 태우지는 못했지만 평생 안고 갈 수 있을 만큼 화려하고 강렬하게 엘로이즈에게 옮겨 붙은 사랑의 불꽃.
하녀로 등장하는 소피는 결혼을 하기 전까지 여성의 또 다른 면을 보여준다. 어리고 약한 계층 여성의 무지와 순결 앞에 놓여있는 유혹들. 그에 따라 여성의 몸에만 일어나는 결과를 당연하다는 듯이 혼자서 감내하는 과정. 그런 소파를 알아챈 주인공들은 여성으로서 공감하고 조력해준다. 같은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그녀의 삶이 지금보다 더 불행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는 소파의 중절을 하나부터 열까지 보아 가는 와중에도 뒤켠에서 사랑을 한다. 로맨틱한 신화의 주인공처럼 열심히 공을 들여 사랑을 한다.
'수컷'의 존재. 씨를 뿌리고 자손을 번식시키려는 주류 계급 집단. 남자의 존재는 이 영화 속에서 금기나 마찬가지다. 언급이 없고 얼굴이 보이지 않을 때 평화롭다. 하지만 여성의 인생에서 남성은 제외되지 않는다. 지긋지긋하게 어딘가에 붙어 들어온다.
물기로 발개진 눈가. 감정이 복받쳐 한쪽을 깨무는 입술. 그녀가 화났다. 누구보다 살아있는 사람처럼, 초상화 한 점에 정략결혼을 하러 가는 인형이 아니라 숨 쉬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화를 내고 있다.
시종일관 표정의 변화가 크지 않던 마리안느가
운다.
엘로이즈를 울려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가 울면 다음은 자신의 차례다.
바텐더는 칵테일을 남기고 시인은 시를 남기고 음악가는 악보를 남긴다. 화가를 사랑하고 화가의 사랑을 받은 연인은 서로의 초상을 남겼다. 사랑의 증거를, 기억보다 선명한 얼굴을.
이별을 하루 남기고 베갯머리송사를 읊조리는 둘의 대사에는 영화의 전부가 들어있다. 마주 보았던 순간, 웃음이 터졌던 날의 분위기, 키스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이렇게 깊디깊게 사랑을 말할 수가 없다. 둘은 같은 공간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사랑에 도달했다. 울음기에 먹먹해진 목소리로 마리 안는 엘로이즈의 이야기를 듣는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마지막 밤 마리안느는 졸음기 묻은 엘로이즈에게 애원한다.
"눈이 감겼어. 잠들지 마, 잠들지 말아요. 아직 잠들지 마요."
화면에 남자가 잡히는 것만으로 무언가 깨진 듯한 기분이 들 수가 있다니. 기막힌 연출이다. 이보다 적절하게 배치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존재하는 것 만으로 가시방석이자 불쾌하고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 남자다. 이 영화 속에서 모든 남성은 불청객이다.
상복을 연상시키는 검은 드레스 차림으로 엘로이즈는 뒤돌아간다. 엘로이즈의 초상에는 남성이 망치질 한 못이 박히고, 어린 하녀와 파도가 너울 치는 해변과도 작별이다. 남성의 등장과 함께 여성들의 유대와 평화는 유리처럼 깨진다. 화면은 삐뚤어지고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줄이 끊어졌다 당겨지길 반복한다.
이별은 짧고 빠르게. 예술가의 선택이란 그런 거니까. 계단을 내달려 해와 바람이 비치는 문이 코 앞이다. 벌컥 문을 열고 그 빛을 얼굴 가득 얹어내는데 목소리가 들린다.
"뒤돌아 봐"
뒤돌아본 그녀는 아름답다. 환상적이고, 환영적이고, 영원히 잊히지 않을 상이 망막에 맺힌다. 잠깐의 순간에 모든 추억을 와구와구 씹어 삼키고 마리안느는 이승으로 나아간다. 족쇄 없는 다리로 바다를 건넌다.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에게 추억을 쥐여보내고 문 닫힌 저승에 홀로 남았다.
마리안느는 제한 많은 여성의 이름은 그림 뒤에 숨기고 아버지의 이름을 쓰며 작품 활동을 이어나간다. 출품된 자신의 작품 앞에서 마리안느는 푸른 옷을 걸친다. 그리고 엘로이즈를 다시 마주치게 된다. 그녀의 그림 속 오르페우스가 입었던 것과 같은 진한 파란색의 옷을 입고, 그녀의 그림 속 에우리디케처럼 흰 드레스를 걸친 엘로이즈의 초상과의 재회. 딸과 함께 그려진 초상 속 유한 표정의 엘로이즈는 책을 들고 있다. 스물여덟 번째 페이지 종이 한편에 곱게 박제된 것은 사랑이자 에우리디케가 이루어내지 못했던 자유다. 그 마음을 같이 읽었던 책 속에, 오르페우스의 신화 속에 꼭꼭 담아두고 그녀는 저승에서 삶을 살아간다. 남편과 아이와 형식과 절차 속에서.
비발디의 사계-여름 3악장은 태풍과도 같은 두 사람의 사랑의 증거가 되었다. 28페이지의 책처럼, 엘로이즈의 벗은 몸 위의 거울처럼, 마지막에 본 그녀의 결혼식 드레스처럼.
에우리디케는 저승에서도 견디고 나아가야 했을 것이다. 하루하루 자신을 뒤돌아봐 준 오르페우스를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