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해피투게더> 감상
영화 <해피투게더 :춘광 사설>
“슬픈 얘기라도 해 봐요. 내가 거기 두고 올게요.”
빛바랜 부에노스 아레스의 색감을, 누린내 날 것 같은 퍼런 타일의 일렁거림을 좋아한다. 두 남자가 주방 가운데서 느릿하게 추는 탱고를, 두 사람의 꼬질한 방 한편에 빛이 흘러내리는 이과수 폭포 전등을 좋아한다. 적막한 밤을 보내기에 좋은 영화다.
보영(장국영)을 사랑하고 상처 받다가 지쳐버린 아휘(양조위)는 이별 후 직장동료 장(장첸)에게 위로받는다. 고향으로 돌아갈 돈을 다 모았다며 세상의 끝을 여행할 거라고 말하는 동료에게. 그는 녹음기를 건네며 말한다.
슬픈 얘기라도 해 봐요. 내가 거기 두고 올게요.
누군가의 슬픈 이야기를 세상의 끝에 두고 와 줄 다정한 사람. 그리고 아휘는 녹음기를 손에 쥐고 눈을 한번 내려감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그가 운다. 흐느껴 운다. 어깨를 무너지듯 벽에 기댄 채 가장 약한 짐승처럼 설게 운다. 아휘의 슬픈 이야기는 그렇게 장의 녹음기에 담겼다.
남극을 목전에 둔 등대 앞에서 장은 녹음기를 튼다. 세상의 끝에 아휘의 슬픈 일을 놓아주기 위해. 장은 독백한다.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녹음기가 고장인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울음소리 같은
이상한 소리만 날 뿐.’
이과수 폭포 앞에서 아휘가 보영을 생각할 때 보영은 아휘가 떠난 아파트에서 식은 이불을 끌어안고 울었다. 아휘가 보았다면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만큼 목을 놓아 울었다. 너무 해도 안 되는 것이 사랑이라고 지구 반대편에서 서로에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이만큼이나 사랑하면 안 되는 거였다고. 이렇게 사랑해버려서 녹음기에 구겨 넣을 수도 없는 슬픔으로 서로를 보는 거라고. 내가 없는 너의 안녕에 깊은 울음을 보내는 헤어진 연인.
끓어 넘쳐도 숨을 죽인다. 사랑은 그렇게 사람의 내장 속에 눌어붙어 산다. 끓지 않으면 볼 수 조차 없는 곳에, 끓고 나면 이미 늦은 채로 냄비 바닥을 다 태우는 사랑을 한다. 그리고 짐승 소리만 담긴 녹음기를 남긴다. 새하얀 남극의 입구에서.
여름 한철의 강렬하고 짧은 사랑, 비 온 뒤 잠시 비치는 따스한 햇살 같은 사랑. 왕가위 감독의 춘광 사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