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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Mar 31. 2021

눈동자가 예쁜 것을 왜 몰랐을까

영화 <매드 맥스> 장면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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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


“What a day, WHAT A LOVELY DAY!”


​​


핵전쟁으로 쫄딱 망해버린 지구에 빨간 모래바람이 분다. 도마뱀이든 쥐새끼든 먹을 수 있는 것은 전부 입에 넣는다. 인간은 방사능 피폭으로 몸 곳곳에 멍울진 암덩어리를 달고 죽는 것만도 못하게 살아간다. 이 대사를 말하는 인물은 목덜미에 배리와 래리라는 종양 두 개를 달고 있는 시한부 워보이 눅스(니콜라스 홀트)다. 살아있는 신과 같은 독재자 ‘임모탄 조’의 생식 가능한 암컷들을 데리고 도주하는 사령관 퓨리오사를 추격하는 운전수. 눅스가 달리는 길은 하필 모래폭풍이 한참인 사막 한가운데다. 앞서 가던 차들이 폭풍에 휘말려 불꽃놀이처럼 공중에서 펑펑 터지고, 눈이 아픈 번개들이 쉼 없이 내리친다. 바로 앞에 보이는 임모탄의 아내들을 실은 도주차량에, 눅스는 자폭을 결심하며 차에 기름을 들이붓는다.


워보이들은 하나같이 온몸에 분칠을 하고 눈두덩은 검게 바른 꼴이다. 입술은 버썩 터져 다 갈라진 채로, 몸 여기저기 유전병과 전쟁의 흉터들을 매달고도 임모탄을 위해 전투에 나선다. 멀리서 보면 그저 하얗고 꺼먼 너구리 같은 워보이들이 수류탄과 다른 점은 임모탄을 진심으로 숭배한다는 것이다. 그에게 물을 받아먹고 먹이를 배급받으며 워보이는 임모탄을 생신처럼 떠받든다. 퓨리오사는 그런 그의 번식용 아내들을 데리고 도망쳤다. 찢어 죽여도 모자랄 분노로 워보이들은 우후죽순 옆구리에 창을 끼고 입에는 기름을 물고 모래 폭풍에 뛰어든다. 세상에서 임모탄이 가장 행복하기를 바라는 워보이들. 그의 앞에 하나의 가시라도 놓였는 것을 원하지 않는 개미처럼 많고 병든 워보이들. 임모탄에게는 개개인으로 조차 인식되지 않는 소모품들.


눅스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사방에서 터지는 차의 부품을 바라본다. 눅스는 생각한다. 바로 오늘, 모래들이 파도처럼 휘날리고 동료들이 불꽃처럼 터져나가는 바로 오늘. 제 한 몸을 바쳐서 주군의 계집을 도둑질해간 배신자를 처단하고 붙잡힌 아내들을 그의 품으로 되돌려 줄 수 있다면.


끝내준다. 끝내주는 날이다!


기름과 차량이 귀한 때라 8기통 엔진의 모양은 마치 부적과 같다. 죽음의 직전에, 천국에 상응하는 발할라로 가기 전에 전사로서의 의지를 다지며 입에 크롬 스프레이를 뿌린다. 전사로서 천국의 문을 넘을 수 있다는 행복감과 기대감에 가득 참 워보이들은 이미 목숨에 미련이 없다. 그들의 유언은 모두 똑같다.

“Witness me!”


윗 니스. 목격, 증언, 증거라는 뜻인데 영화에서는 ‘기억해 줘’로 번역됐다. 나를 기억해, 나를 기려, 내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줘. 눅스는 흥분에 몸을 떨며 끝내주는 날이라는 말을 연신 중얼거리고 입가에 크롬 스프레이 칠을 한채 애꿎은 피주머니 맥스(톰 하디)에게 말한다. 나를 기억해달라고. 지금 내가 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발할라에 가지 못하고 남을 너는 기억하라고. 자기 자신을 종잇장처럼 생각하는 워보이들은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윗니스를 찾는다. 그리고 자신을 내던진다. 수류탄처럼.


이 영화는 워보이의 영화가 아니다. 러닝 타임은 두 시간 내내 다른 더 커다란 사건들로 정신없이 굴러간다. 눅스는 주인공이 아니고, 관객들에게 멍청하면서도 순진한 청년에게서 오는 묘한 울림을 남길뿐이다. 화면을 채우는 화려한 액션부터 유토피아를 찾아가는 이상까지 인상적인 부분들은 너무나 많았지만 굳이 골라야 한다면 나는 저 대사 하나를 꼽는다. 메마른 사막, 전기가 흩날리는 폭풍 속에서 비로소 천국의 문을 본 백혈 병자 소년의 빛나는 눈동자. 꿈과 희망에 부풀어 눈물까지 글썽이며 이토록 끝내주는 날이라 혼잣말을 하는, 진정 아름다움 근처에 있는 것들은 보지도 못했을 전쟁 부품의 외마디 감탄사. 환하게 웃음 짓는 심장이 있는 수류탄.


너의 눈동자가 이렇게 예뻤다는 것을 처음에는 왜 몰랐을까.


눅스는 내용 전반에 걸쳐 가장 유동적이고 변화를 많이 겪는 인물이다. 변하는 사람의 사랑스러움을 예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무것도 모르고 눈 앞의 세계가 전부일 거라고 생각했던 영화 초반부의 눅스가 말한다. 왓 어 데이, 왓 어 러블리 데이. 퓨리오사를 죽이고 아내를 탈환해올 의욕으로만 가득했던 임모탄의 워보이는 혼자서 끝내주는 날이라고 몸을 떨었던 모래 폭풍을 지나 모든 가능성과 마주치게 된다. 희망의 가능성, 삶의 가능성, 평화의 가능성, 풍요의 가능성. 그것을 시작하게 하는 대사, 변화할 인생에 방아쇠가 된 대사.



“정말 끝내주는 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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