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의 바텐더
비자가 나왔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 상황이 안 좋아지면 비자가 취소될 수도 있다고 하기에 부리나케 비행기 먼저 끊었다. 출국일까지 3주가 남았다. 고작 3주만 남았다. 이 애매한 유예에 뭘 어쩌면 좋을지 몰라 허둥지둥하고 있다. 모두 하루 안에 일어난 일이다. 추세를 보며 아예 파투가 나거나 못해도 내년 4월은 넘어야 알 수 있겠거니 하던 일이 번갯불에 콩 굽듯이 단 하루 만에.
긴장이 돼서 오밤중에 일어나 캐리어에 넣어갈 옷 정리를 했다. 챙기려고 보니 세탁소에 가져가야 할 것도 수선해야 할 것도 한가득이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수트를 맞출 때 모직이 아니라 사계절 원단을 골랐을 텐데. 테리야마 슈지의 시가 다시 떠오른다. 인생은 자꾸만 뒤죽박죽이다. 하나도, 단 하나도 예상한 대로 되어주지 않는다. 운과 인연에 기대서 또다시 이렇게 흘러가는구나. 익숙한 일이지만 깜빡이를 좀 켜고 들어와 줬으면 좋겠다.
해외에서 장기체류를 준비할 때마다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1년 동안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갔을 때도 그렇고, 싱가포르 취업을 앞둔 지금도 그렇다. 얼른 가라고 등을 떠밀리고 나서야 조금 더 있고 싶다는 말을 중얼거리는 못난이. 그게 나다.
호주에 가기 전에는 오래 쉬었다. 퇴직과 동시에 해외를 갔다 오고 아빠 집에서 삼 개월을 뒹굴거렸다. 얼굴에 기름기가 번들번들 해져서는 기차여행으로 국내의 여섯 도시를 돌고 나서 출국했다. 유난히 더웠던 여름이었다. 여러 나라를 여행해놓고 내 나라의 여섯 도시가 비교할 바 없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아버린 여름, 끝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뒤로하고 떠났던 호주. 이렇게나 아름답다니. 한글과 단어가 이렇게 고매하고 우아하다니. 이제 한국어가 아닌 영어를 써야 하는 것에 짜증이 났었다. 가기 싫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은 이 땅을 둘러볼 여유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을 보고 포옹할 여건조차 되지 않는다. 이건 또 이거대로 비극이구나. 출국 72시간 전의 검사에서 음성 판정을 받아야 갈 수 있다 하니 아까운 시간을 전부 동굴같은 방 안에서 보내야 한다. 착 가라앉은 성탄에 음울한 신정을 보내고 올해 팔순을 새시는 친할머니도 한 번 못 안아드리고 가는구나. 한숨이 푹 푹 나온다.
두근두근. 해가 뜨면 경찰서에 가서 국제 운전면허증을 발급해야지. 간만에 시내로 가는 김에 1년 동안 사용할 렌즈도 사고, 상비약도 사야지. 베이지색과 남색의 바지를 들고 수선집에서 치수를 재 봐야겠다. 자가 격리 기간에 사용할 15일 치 데이터 유심도 주문하고, 도서관에서 <헝거 게임>을 빌려 와서 꾸역꾸역 다 읽고 출국해야지. 우울은 우울이고 들뜨는 건 들뜨는 거다. 아무도 보지 못해도 감사와 작별 인사를 전할 수 없어도 나는 떠난다. 9시에 일 못하게 하는 한국을 떠나서 다시 바텐더가 될 수 있다!
그럴 수밖에 없던 상황을 이해 하지만 조금 삐졌다. 9시 넘어서만 일했던 사람은 삐졌다고요.
글을 쓰다 보니 기분이 방방 뜬다. 연락을 받은 친구들이 너는 어떻게 해도 해외로 나갈 팔자인가 보다고 혀를 내둘렀다. 그새를 못 참고 전동 킥보드를 타다 쇄골을 부셔 먹은 친구도 있다. 아침나절 내내 뜨끈한 온도의 연락을 주고받았다. 내가 떠나는 것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한 톨의 부족함도 없이 모두 소중한 이들이라 행복하다. 아직도 인사를 할 사람들이 많이 남았다. 사랑을 등에 엎고 떠난다. 아직 3주가 남았지만 나는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