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자가격리 일기
호텔에 갇히고 울며 겨자 먹기로 이북을 보고 있다. 생각만큼 나쁘지는 않지만 한 줄을 읽을 때마다 종이책이 그리워진다. 종이책이었더라면 여기에 연필로 줄을 긋고 감상 한 줄을 적을 텐데. 책갈피를 꽂을 수 있을 텐데. 코를 박으면 향긋한 종이 냄새가 날 텐데. 그래도 얼추 반이 넘게 읽어가는 걸 보니 영 쪽박은 아니다. 그저 그립고 그냥 아쉽다. 많이 아쉽다.
그러고 보니 들어오자마자 삼일 만에 다래끼가 났었다. 보험도 들지 않았는데 칼을 들고 째게 될까 봐 겁을 먹었다. 설마 쓸 일이 있겠어하고 대충 챙겨 온 다래끼 약이 순식간에 동났다. 지금은 완전히 나았지만 오자마자 액땜을 제대로 한 기분이었다. 멍이라도 든 것처럼 욱신거렸던 눈두덩이가 생생하다. 한국에서도 몇 번 걸리지 않았던 것이 이 먼 곳까지 와서 덥석 들릴 게 뭐람. 이렇게 환영인사를 할 건 또 뭐람. 그래도 이틀도 붓지 않고 쏙 들어가 주었다. 첫 세수와 첫 샤워가 탈없이 지나갔으니 물도 잘 맞는다. 남은 날도 잘 부탁한다고 생각한다. 객실의 문을 나가는 순간부터, 다시 한번 잘 부탁한다고.
라면 국물이 튀어 손빨래한 셔츠를 해가 드는 곳에 올려놓고 말리고 있다. 창밖으로 보이는 건널목 너머가 내가 얻은 집이다. 구글맵을 두들겨 그로서리 스토어를 찾던 와중에 얻어걸렸다. 지금 있는 호텔과는 도보 4분, 그로셔리샵과는 도보로 2분 거리다. 유리에 얼룩이 묻도록 손가락으로 콕 찍어 본다. 두 블록 아래, 횡단보도 하나의 거리. 저기다. 내가 살 곳.
저녁부터 창밖에 척척하게 비가 온다. 영국처럼 우중충하고 눅눅한 비다. 그래도 시원해 보인다. 아스팔트가 온통 젖었다.
금세 그칠 비였구나.
완벽한 호텔 라이프를 닷새 남기고 힘든 이웃이 들어왔다. 지내는 내내 고요해서 몰랐는데 방음이 형편없는 호텔이었다. 현지 시간으로 오전 12시 7분. 위층에 들어온 사람 두 명이 못 견디게 시끄럽다. 입실하자마자 호들갑을 떨며 고음의 환호성을 질러대고 있다. 하필 한국인이라 통역도 필요 없다. 같이 온 일행과 같은 방이 되어 신나는 모양이다. 주변에 돌리는 안부 전화의 음성까지 전부 들린다. 격리라고 해서 당연히 일인 일실의 독방을 쓰는 줄 알았더니 성별이 같은 일행끼리는 같은 방에 넣기도 하나보다. 어쩐지 헬스케어 센터의 직원이 통화할 때마다 방을 몇 명이서 쓰는지 물어보는 게 의아하더라니. 둘이 있으면 얘기할 사람이 있어서 외롭지 않겠네. 하물며 친한 사이라면 마치 수학여행 온 것처럼 놀 수도 있겠다. 혼자 8일을 지내며 그런 상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익룡 같은 비명질에 짜증부터 났는데 가만 보면 사실 부러운 일이다. 이 곳에서 나가게 되면 저 사람들도 내가 일할 바에서 만날 수 있을까. 나가기 전에 한 번이라도 얼굴을 보거나 말을 나눌 일이 있을까. 우당탕, 와르르 짐을 푸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이 방에 처음 들어왔을 때가 생각난다. 그때도 새벽 2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딩동. 뭐지, 밖으로 나가면 안 된댔는데. 크게 울리는 초인종에 마스크를 쓴 채로 안절부절못하다가 오 분이나 지나서야 문을 열었다. 런드리 안내 사항이 적인 종이 한 장이 올려져 있었다. 사람 없는 초인종에 적응하는 데에 꼬박 하루가 걸렸다. 사실 그 정도면 빨리 익숙해진 거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늘 따라가는 게 느린 사람이지만, 내가 쓰는 일기에서 만큼은 그렇다고 말하고 싶다.
저녁 영화로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를 보았다. 지금은 <중경삼림>을 다운로드하는 중이다. 어제는 넷플릭스로 <그린 마일>을 보았는데 그 영화 역시 인상적이었다. 살아가다 보면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침범당하고 나 역시 침범하게 되기 마련이다. 새로 온 이웃들의 행보에 적응할 준비를 해야겠다. 물론 여차하면 리셉션에 항의할 준비도 해놓고서. 적막하고 행복했던 8일간의 휴가에 안녕을 고한다. 한 번도 방해받지 않았던 나의 소극장도 셔터를 내린다. 그래도 위층 일행들로 인해 나까지 조금은 덜 외로워지기를 바라며, 오늘만큼의 소음까지는 참아주기를 바라며.
지금까지는 <나는 왜 쓰는가>를 몇 챕터씩 읽고 나서 잠에 들었다. 하지만 오늘은 집중하기가 힘들 것 같다. 위층을 이해한다. 나도 첫날엔 이것저것 정리하고서도 들뜬 마음에 네 시가 넘어 잤으니까. 고지가 눈 앞이었다. 행락지와 물속의 달을 지나 달필의 조지 오웰이 글을 왜 쓰는가를 들려줄 차례였는데. 공항에서 산 귀마개가 있어 다행이다. 그리고 아까보다는 훨씬 조용해졌다. 분명 오늘 쓸 글은 이런 내용이 아니었는데 쓰고 있는 와중에 봉변을 당하는 바람에 도리가 없었다.
좋은 밤, 좋은 밤이 되어요. 기왕 이렇게 되어버린 거 멜론이 맛있고 초콜릿이 진한 싱가포르에서 좋은 밤을 보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