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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바람 신여사 Jun 04. 2023

아저씨 발냄새

나는 커다란 국어사전을 뒤적인다. 어린 시절 만져봤던 성경책 느낌이 손끝에 생생하다. 손가락이 비칠 만큼 얇은 책장을 넘기며 나는 단어를 찾는 중이다. ㅆ… 씨… 씨ㅂ… [씨발]의 뜻풀이를 열심히 읽다 내가 이 단어를 왜 찾고 있지?라는 생각과 동시에 우리 집엔 이런 사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멀리서 딸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물속인 듯 뿌옇게 웅얼거리는 소리. 막둥이는 투덜거리고 둘째는 퉁명스럽다. 사전은 희미해지고 아이들 목소리가 또렷해진다. 몸은 아직 무거운데 귀가 먼저 열린다. 아저씨발냄새!!! 막둥이 강세가 쌍욕에 박힌다. 그 억양을 둘째도 느꼈는지 "야아~~~~ 하지 마!" 두려운 듯 목소리를 낮춘다. "언니가 안 놀아주니까 그러지~~" 막둥이 속삭임에 짜증이 묻어있다.


지금 나는 꿈속이구나! 겉돌던 조각이 제자리에 찰칵 맞춰지자 정신이 번쩍 든다. 갑자기 만난 소나기처럼 생각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빨리 일어나서 방금 뭐라고 말했냐 확인해야 할까? 어디서 그런 말 배웠냐 출처부터 캘까? 언제부터 그런 말 썼냐 시점이 더 중요한가? 무엇도 결정하지 못하고 눈을 뜬다.


보름 가까이 일에 묶여 있다 모처럼 한가해진 일요일 오후. 거실에서 노는 딸들 옆에 어설프게 잠든 참이었다. 일어나 멍하니 아이들을 바라본다. 두 녀석 다 얌전히 로블록스 게임에 열중하고 있다. 진흙 속에 들어앉은 듯 온몸이 바닥으로 빨려든다.

모른 척 하자.

귀하고 특별한 내 아이의 타락을 엿본 나는 그만 비겁해진다.


아홉 살 막둥이 입에서 나온 욕설은 천근 짐이 되어 머리를 짓누른다. 일에 치어 아이를 방치한 것이 화근일까? 곱게 키운 막둥이가 오염되고 있었는데 눈치도 못 채고, 막지도 못한 내가 너무 한심해서 화가 난다. 저녁상을 치우고 남편과 따로 자리를 만든다.

굳은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하자 잠자코 듣던 남편 입꼬리가 씰룩씰룩거리더니 와하하~ 웃음이 터진다. 아저씨 발냄새? 요놈 어디서 그런 말을 듣고 써먹냐? 크하하하~


나는 심란해 미칠 지경인데 남편은 웃겨 죽을 지경이다.


웃음기 남은 얼굴로 막둥이의 발칙함을 깜찍함으로 감싸는 남편이 어이없다. 미간이 절로 찌푸려지고 눈매가 뾰족해진다.신나게 웃던 남편은 내 얼굴을 살피곤 욕설이 나쁘다는 걸 알고 한 행동이니 걱정할 것 없다고 한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나는 한숨만 커진다.


어지간한 일엔 대범한 다둥이 엄마라고 자신했는데. 이런 돌발 상황에서 어째야 좋을지 막막하다. 무엇을 어떻게 막을지, 막을 수나 있는지… 엄마가 이렇게 갈팡질팡하는 사이에도 아이들은 훌쩍훌쩍 자란다.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미련 없이 뛰어가는 세 아이를 보며 대견함과 불안함이 뒤섞인다. 오늘일이 장성한 막내에게 들려줄 에피소드가 될지 두고두고 후회할 사건이 될지. 그저 나의 최선을 아이들이 알아주길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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