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맹이들과 부모들이 흙먼지 날리는 운동장에 가득하다. 엄마가 여기 서있어라 한 자리에 난 눈만 땡글 하게 뜨고 꼼짝 않고 서있다. 어떤 아줌마가 딸아이의 손을 잡고 다가와 내 옆에 이 아이를 세워줄 수 있는지 묻는다. 긴장감에 잔뜩 굳은 나는 간신히 고개를 젓는다. 그 아줌마는 나와 마침 옆에 있던 남자애를 번갈아 보더니 푹! 웃으며 사라진다. 울고 싶다. 왕왕 울리는 단상 마이크 소리에 정신이 없다. 그저 빨리 엄마손을 잡고 여길 벗어나고 싶다. 국민학교 입학식은 명치를 조이는 체기로 남는다.
엄마는 해뜨기 전에 날 깨워 머리를 바짝 묶어주고 일하러 나간다. 다시 누울 수 있게 늘 양갈래. 보자기로 덮어 둔 밥을 먹고 학교에 간다.
수업이 끝나갈 때쯤 책상 위에 양팔을 접고 머리를 기댄다. 볕이 따뜻한 창가 자리에서 운동장을 바라본다. 둥근 운동장을 둘러싼 버드나무는 송충이가 무척 많다. 책상에 엎드려 빨간 스웨터의 털실 사이로 눈을 한쪽씩 번갈아 뜨면 햇살 묻은 하늘은 왼쪽 눈에, 버드나무 머리채는 오른쪽 눈에 담긴다. 교문을 나가 문방구 골목길 좁은 계단을 몇 개만 오르면 버스정류장이다. 눈감고도 누구보다 빨리 갈 자신 있다. 운동장을 가로지를 수 있기만 하면. 선생님들은 왜인지 체육시간 외엔 운동장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우리들은 버드나무 아래를 지날 때마다 우수수 떨어지는 송충이에 맞지 않으려 실내화 주머니를 머리에 이고 조심조심 걷는다.
실내화를 갈아 신을 땐 통닭집 아들과 그 친구들을 잘 살펴야 한다. 현관문과 기둥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재빨리 신발을 갈아 신는다. 선생님들의 하교지도에 학생들은 버드나무 아래 좁은 길로 양 떼처럼 몰린다. 어떻게든 마주치지 않아야 하지만 나는 혼자고 상대 아이들은 여럿이다. 나보다 곱절은 많은 그 눈을 피하긴 어렵다. 날 발견한 그 아이들은 한참이나 따라오며 온갖 놀림과 함께 긴 머리를 잡아당긴다. 입고 있는 치마를 들추고 메고 있는 가방에 발길질을 한다. 인파에 도망갈 틈도 없다. 버스 정류장까지 그 수모를 받아내다 집에 가는 버스를 타고 나서야 간신히 마음을 놓는다.
어떤 날은 통닭집 아들과 친구 한놈이 집요하게도 따라붙었다. 가끔 버스비로 받은 돈으로 문방구에서 불량한 간식을 사 먹고 집까지 긴 시간 걸어갈 때가 있었는데, 그날이 그런 날이었다. 입에 껌을 하나 넣고 씹고 있자니 그걸 뺏겠다고 괴롭히는 참이었다. 버스비가 없으니 집에 가는 버스가 정류장에 서도 탈 수 없었다. 남은 껌을 서로 내놓으라 윽박지르던 두 놈은 이제는 서로 뺏겠다고 싸우는 지경이었다. 왔던 길 멀리에 있는 전봇대까지 갔다가 빨리 오는 사람에게 남은 껌을 다 주겠다고 했다. 시작! 을 외쳐놓고 두 녀석들이 뛰는 걸 확인하고 반대쪽으로 있는 힘껏 뛰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가 달리는 방향이었다. 버스가 뿜는 매연과 먼지에 내 모습이 가려져 보이지 않길 간절히 바라며 떨리는 다리로 버스 꽁무니를 따라 집까지 뛰었다.
양쪽 눈이 쭉 치켜질 만큼 세게 머리를 당겨 묶으며 엄마는 늘 엄마 없는 티 내면 안된다 한다. 그건 엄마의 바람일 뿐 그런 티 안내는 방법을 나는 모른다. 당장 와줄 어른이 없는 아이는 누구에게나 빤히 들여다 보인다.
안집의 수상한 총각들은 가끔 우리 집 나무문 앞에 가만히 서있었다. 문에 달린 뿌연 유리창에 묽은 그림자가 질 때면 난 필사적으로 아무 소리도 안 내려고 노력했고 문을 두드리거나 잡아 흔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 집에 아무도 없다고 믿게 만들고 싶었다. 우연히 친구가 다니던 서예 학원에 따라갔을 땐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 선생님이 꼭 우리 학원 끊으라면서 한참이나 나를 꽉 안고 있었다. 지하실 냄새와 먹물 냄새, 은단 냄새가 섞인 체취가 불쾌했다. 주소는 서울이지만 시골 모습에 가까웠던 우리 동네엔 논이 많았다. 또 버스비로 간식을 사 먹고 논두렁을 따라 집으로 걷는데 키 큰 아줌마가 어느 학교 몇 학년인지 어디 사는지 끈질기게 물으며 한참을 따라오기도 했다.
엄마만 보면 “엄마~ 배고파~”를 달고 살았다. 평생을 안 해본 식당이 없는 엄마는 “너는 엄마만 보면 배고프다니? 엄마를 잡아먹을 참이냐?” 하며 핀잔을 주기도 하고 한숨 섞인 주전부리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학교에서 받아온 우유는 빵빵해지도록 가방에 박아두고 먹지도 않으면서 엄마만 보면 출출하고 허기졌다.
내가 잠에서 깨기 전에 나가고 잠든 후에 들어오는 그런 일 말고 다른 일을 할 수 없느냐고...
일요일 하루 당신이 쉬는 날까지 6일 동안 당신을 그리워한다고...
내편이 없는 세상이 너무 무섭다고...
나는 그냥 엄마~ 배고파~ 할 뿐이었다.
모처럼 일이 일찍 끝나 아이들이 태권도 차에서 내리는 시간에 깜짝 등장을 계획한다.
품 안에 아이들을 가득 안는다. 봄볕에 달궈진 정수리가 달콤하다.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작은 나의 아이들은 나의 재력에 놀란다.
아이들을 앞장 세워 집으로 들어간다. 외할머니를 향해 다녀왔습니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명랑하다. 엄마~ 엄청 일찍 오셨네요~ 제 방에서 반기며 나오는 아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쥐어주며 오늘은 빨리 집에 오고 싶었어~ 활기차게 대답한다.
이것 봐. 엄마처럼 안 살겠다고 했지?
형제도 없이 외로운 아이. 바람막이 없이 뭐든 알아서 해야 하는 아이. 내 새끼 그렇게 안 키워. 위험하고 무서운 일을 만나면 달려올 거야. 내가 없는 시간은 믿을 만한 사람으로 채워줄 거야.
당신이 못한 일을 나는 이렇게 잘하고 있다고 엄마 앞에서 한껏 뽐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