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바람 신여사 Mar 06. 2023

뿌리염색

부쩍 올라온 흰머리를 가리러 왔다.


매장엔 K-pop이 흘러나온다. 예쁜 아이돌이 예쁜 목소리로 예쁜 사랑을 노래한다. 커다란 거울과 폭신한 의자가 양쪽으로 줄지어 있다. 화초들은 반질반질 잘 닦여있고, 대기자를 위한 테이블과 쇼윈도도 반짝반짝하다. 예쁜 것들 투성이인 공간에 발을 딛는다. 눈썹이라도 그릴걸 그랬다.

허리가 한 줌 정도 되는 실장님은 한 번도 쉬지 않고 손님들이 앉아있는 의자 사이를 날랜 몸짓으로 누빈다. 여자손님의 머리에 파마를 다 말아 큰 찜통 같은 걸 쬐여놓고, 남자손님 커트를 하고 샴푸실로 보내면, 샴푸를 끝내고 돌아온 다른 손님의 드라이를 하는 식이다. 그 사이 스태프는 염색약이나 파마약을 준비하고, 커트보를 둘러주고, 잘려나간 머리칼을 쓸고, 머리를 감기고, 손님의 음료를 챙긴다. 그 사이에 물 한 모금 끼어들 짬이 있을까? 한숨 한번 뱉을 틈이 있을까?


우리는 그저 높낮이가 조절되는 의자에 얌전히 앉아 신속하고 능숙한 그녀들에게 모든 걸 맡기면 된다. 페달을 꾹꾹 밟으면 갑자기 몸이 떠오르는 이 의자는 사실 회전목마보다 재밌다. 세련되게 꾸민 미용실 안에서 겪는 일 중 제일 재미있다. 미용사는 발로 의자를 조절하고 양손에 빗과 가위를 동시에 잡고 머리길이를 정리한다. 거울로 지켜보고 있자니 그 현란함이 지휘자 같다. 아이의 색종이 자르기를 도와준 적이 있다. 토끼 귀를 잘라먹고도 손아귀가 꽤나 아팠다. 손가락을 벨 듯 지나가는 가위날은 서늘하고 빠르다. 저렇게 자유자재로 다루기까지 예리한 가위는 그녀의 손에 얼마나 많은 흉터와 굳은살을 남겼을까?


머리채를 반으로 나눈다. 양쪽에서 쭈욱 잡아당겨 빗과 붓이 앞뒤로 달린 염색도구로 빠르게 머리칼 사이를 채운다. 양날의 검을 휘두르는 검사는 거침없다. 흰머리들은 속절없이 당하고 만다. 이 와중에 미용사는 미소를 띠고 나의 안부를 묻는다. 근방의 부동산 가격과 새로 생긴 식당의 메뉴도 리뷰해 준다. 나에게 온전히 집중한 이들의 친절에서 왠지 절실함이 느껴져 나는 그만 숙연해진다. 

홍어 냄새 같은 약품 냄새. 스프레이와 왁스 냄새. 인공 감미료처럼 과한 냄새들에 어지럽다. 

염색약을 다 바른 머리에 랩을 둘둘 말아둔다. 이윽고 내 머리에서 손을 뗀다. 나는 전날 먹다 남은 식은 밥 꼴로 머리가 물들길 기다린다. 미용사는 내가 더욱 편안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게 쿠션과 시원한 음료를 가져다준다. 다른 손님을 보러 가는 사이사이 나에게 두피가 따갑지 않은지, 읽을거리가 필요하지 않은지 관심을 거두지 않는다. 

미용실 안 손님용 의자에 앉은 모든 사람은 하나도 거르지 않고 같은 대접을 받는다.


염색약을 씻으러 간다. 두꺼운 귀걸이를 한 스태프는 많이 봐야 스물한두 살이다. 조카뻘 되는 스태프는 두개골을 청자로 빚을 기세다. 없던 짱구도 만들겠다. 분홍빛 뺨의 젖살이 아직 빠지지 않은 이 아가씨의 악력이 놀랍다. 손걸레의 물기를 꽤 뽀송하게 짜내는 나도 새로 산 잼 병 열기는 남편에게 부탁하는데. 이렇게 몇 명의 손님 머리를 감기고 나면, 수저를 들어 올릴 힘이나 남을까? 

물 온도가 마음에 드는지, 지압이 너무 약하거나 세지 않은지, 세심하게 묻는다. 지금 바른 것은 어떤 성분의 샴푸이고, 이 헤어 에센스의 효과는 무엇인지 꼼꼼히 알려준다. 미용실의 문을 연 순간부터 시작된 친절의 농도는 여전히 유지되어 귓바퀴까지 살뜰하게 훔쳐준다. 피곤함도 헹궈낸 듯 머릿속까지 맑아진다.


드라이로 머리를 말려 롤빗으로 컬을 넣어주고 앞머리를 꼬아 넘겨주고… 여자 아이들 놀이에 동원된 삐삐 인형처럼 멍하니 앉아 모가지만 이리저리 끌려간다. 나이에 비해 주름 없는 피부를 칭찬해 주고 앞머리가 잘 자리 잡을 수 있는 드라이 비법을 알려준다. 나는 그만 미용사의 싹싹함이 애잔해서 열심히 듣고 한껏 끄덕인다. 진한 갈색 머리가 초콜릿을 녹여 부은 듯 부드럽게 흘러내린다. 


나이가 들면 흰머리는 당연한데, 이 당연을 열심히 지우려 노력한다. 아름다움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단정해 보이는 것에도 돈과 시간이 드는 중년이다. 시들어 가는 모습을 어떻게든 가리고 싶은 아줌마의 초라한 욕망. 나는 지루한 두 시간을 기꺼이 버틴다. 미용실의 그녀들은 나의 이 욕심을 짐짓 모른 척해준다. 거울을 쳐다보는 나의 푸석한 눈빛을 읽었을까. 끊임없는 스몰 토크는 그녀들의 배려다. 노련한 솜씨덕에 헤어 스타일만큼은 발랄했던 십여 년 전이다.


계산을 마치고 미용실을 나선다.

수고하셨습니다~ 실장님과 직원들이 경쾌한 목소리로 배웅한다. 


정작 수고한 건 그녀들인데. 

작가의 이전글 도마뱀이 우릴 초대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