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열대초록 Jul 20. 2021

어둠 결핍에 시달리는 스페인의 여름

  “여름 지긋지긋해.”     


  테이블에 책을 내려놓으며 안토니오가 말했다. 좀 의외였다. 여름에 누구보다도 진심인 스페인 사람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5월 말부터 휴대용 파라솔과 접이식 의자를 들고 해변으로 출퇴근하는 사람들 아니던가. 느긋하던 남부 스페인 사람들이 일 년 중 제일 부지런해지는 시간이 여름이다. 원래도 높은 이들의 텐션은 여름의 양기를 받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진다. 작년 여름에는 이를 따라하다 기력이 쇠해 한국에서 가져온 공진단을 챙겨 먹으며 기운을 보충해야 했다.


  여름에 누구보다 진심인 스페인 사람들 앞에서 차마 하지 못한 말을 대신 꺼내 주다니. 왠지 속이 후련했다. 이유도 묻지 않고 키득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맞아. 나도 지긋지긋해.”


  여름을 힘겹게 만드는 건 더위를 더 달구는 여름에 대한 사람들의 열기뿐 아니라 긴긴 낮이었다. 정말, 낮이 길어도 너무 길다. 5월부터 점점 늦어지기 시작한 일몰 시간은 7월이 되면서 밤 9시 30분을 훌쩍 넘기더니 지금은 10시가 되어야 온전히 깜깜해진다. 온종일 들뜸, 흥분, 열기 이런 뜨거운 것들을 지나쳐 겨우 밤이 되었는데, 자기 전까지 즐길 수 있는 고요한 어둠이 단 두 시간뿐이라니. 이마저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게 아니다. 완전한 밤과 함께 거리의 소음도 시작되기 때문이다.


  매일 밤 10시면 맞은편 건물 입구 계단에 더위를 피해 내려온 어느 가족이 큰 소리로 이야기하고 음악을 틀어놓고 노래를 부르거나 가끔 춤까지 춘다. 보통은 새벽 2시가 넘도록 이어지고 지난주 일요일은 아침 7시까지 그러고 있어 결국 경찰이 출동하는 걸로 마무리됐다.


  고요한 밤을 되찾았다고 좋아한 건 딱 하루뿐이었다. 그 가족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시 밤 열 시가 되면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폭죽을 터뜨리며 놀았다. 여름 해운대에서 사람들이 모래에 꽂아놓고 터뜨리는 그 폭죽 말이다. 주택가 한가운데서 이런 짓을 하다니 믿을 수가 없다. 귀마개 없이는 도통 잠들 수 없는 날들이다.


  하루는 건너편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어 창밖을 내다보던 한 아주머니가 아이들과 함께 씩씩거리며 아래로 내려와 그들에게 다가갔다. 소음 때문에 화난 게 분명했다. 그들에게 한 소리 해줄 것을 기대하며 숨죽여 지켜보고 있는데 자기 아이들과 함께 그들하고 같이 폭죽을 터뜨리고 놀기 시작하는 거 아닌가. 폭죽 소리는 귀마개로도 막을 수 없다. 몇 달 전 해제된 11시 반 통금이 그리워질 지경이다.


  이런 날들 속에서 한국의 친구들과 지인들, 그리고 스페인에 오기 전에 내가 그렇게 부러워한 이곳의 일 년 365일 중 350일 맑고 화창한 날씨, 햇볕, 긴 낮이 더이상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귀한 건 비 오고 흐린 날의 차분함, 밤의 고요함이었다. 물론, 그런 날을 귀하게 여길 수 있는 건 금방 다시 해가 뜨고 맑은 날이 올 거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햇빛뿐 아니라 어둠도 결핍될 수 있고 양기 충전만큼이나 음기 충전도 필요하다는 걸 깨닫고 있는 요즘이다. 매일 귀마개를 하고 잠들며 밤의 적요를 누릴 수 있는 시간이 조금 더 길어지기를 기다린다.

매거진의 이전글 열쇠를 잃어버리고 얻은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