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열대초록 Jun 22. 2021

열쇠를 잃어버리고 얻은 것

나의 스페인 이웃



러닝화 끈을 꽉 조여 큰 리본을 만들고 그 리본을 다시 한번 단단히 묶었다. 허리춤에 휴대폰과 열쇠를 넣을 러닝 벨트를 차고서 달리기를 하러 나섰다. 3월에는 후리스를 입고 달렸는데 이제는 민소매에 반팔을 입고 뛰어도 땀이 줄줄 흐른다. 본격적인 여름의 러닝이 시작된 것이다.


 뺨을 스치는 바람을 느끼며 50m 걸어갔을 때쯤 달리기 앱을 실행시키려고 러닝 벨트의 지퍼를 열었다. 휴대폰을 꺼내고 지퍼를 닫으려는데 벨트 안쪽 열쇠 주머니에서 울퉁불퉁한 열쇠의 촉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급히 러닝벨트를 풀어 까뒤집었고 열쇠는 없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오며 열쇠를 급하게 러닝 벨트에 쑤셔 넣을 때 떨어뜨린 걸까? 길에 떨어진 열쇠가 없는지 살피며 얼른 집 쪽으로 되돌아갔다. 



문을 잠근 기억은 분명히 나는데. 열쇠 구멍에다 그대로 꽂아놓았나? 길에 떨어뜨린 것보다는 그게 나으려나, 아니지. 혹시 그새 누가 문을 열고 집 안에 들어가기라도 했으면 어떡해? 미치겠다, 정말. 


여기가 카페 테이블에 휴대폰을 놓고 가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한국도 아니고. 현관문에 열쇠를 꽂아놓는다는 건 ‘어서 우리 집 좀 털어가세요’ 하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꼬리에 꼬리를 문 상상 속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져갔다.



걱정에 터져버릴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고 건물 앞에 도착했지만, 열쇠가 없으니 건물 현관을 열고 들어갈 수 없었다. 망했다. 아무 집 호출 벨을 눌러 사정을 말하고 열어 달라고 해 볼까? 어디든 사람이 있어야 할 텐데. 이런 생각을 하며 옆집 호출 벨을 누르려는 찰나, 바로 옆 카페테리아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던 아저씨가 다가왔다.



“문 열어줄까? 너 여기 사는 애 맞지?”     



살았다.      



“정말요? 감사합니다. 실은 제가 여기 4층에 사는데요, 열쇠를 잃어버려서 못 들어가고 있었거든요.”


“나도 4층 살아. 우리 저번에 한 번 인사했지?”     



그제야 마스크 위로 반만 보이는 아저씨의 인상이 낯이 익었다.      


몇 달 전이었다. 이 집으로 이사 오고 일주일 되던 날,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예정에 없는 초인종 소리가 유쾌한 방문으로 연결되는 일은 거의 없으니 벨 소리가 들리면 겁부터 난다. 몇 초간 기다렸다가 두 번째 초인종이 울린 후 까치발을 하고서 현관문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초인종 소리를 듣고 누구인지 확인도 안 하고 문을 덜컥 열어주는 장면에서는 잘 보고 있다가도 어김없이 몰입감이 왕창 깨지고는 했다. 내용 전개를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설정이라는 건 알겠다만 매번 ‘말도 안 돼. 누구인지 확인도 안 하고 어떻게 문을 열어주냐.’라는 말이 육성으로 흘러나왔다. 오랜 시간 여자 혼자 살며 문단속에 강박증이 생긴 내게는 아무리 영화라 해도 받아들일 수 없는 설정이었다.      



문구멍에다 한쪽 눈을 조심스레 대고 바깥을 보았다. 문 앞에는 웬 중년의 남자가 한 명 서 있었다. 모기 같은 목소리로 ‘누구세요?’라고 말하니 ‘이웃이에요’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이웃이라는 단어에 익숙한 피로감이 느껴졌다. 인구 1,000만 대도시에서 줄곧 여성 1인 가구로 살아온 내게‘이웃’이라는 단어는 결코 다정함이나 안전함을 주는 단어가 아니다. 지금껏 내가 만난 이웃이란 대개 도움보다는 피해를 주는 쪽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한두 번 꼴로 층수를 착각하고 우리 집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러 간 떨어지게 하던 윗집 이웃, 틈만 나면 공사장 데시벨로 욕설을 해대 몇 번이나 경찰이 동원된 아랫집 알코올중독자 이웃, 새벽 세 시면 자꾸 우리 집 초인종을 누르던 옆집 이웃의 남자친구 등 전부 읊자면 A4 한 페이지는 너끈히 채울 수 있다.      


일단 마스크로 표정을 감추고 문을 조금만 열어 몸을 반쯤 내밀었다. 남자는 내게 얼마 전에 이사 오지 않았냐며 자신은 옆집에 사는 다니엘이라고 소개했다. 내가 소개를 시작도 채 하기 전에 남자는 내가 어느 나라에서 왔고, 어떤 일을 하며 어디에서 일하는지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 


내가 이사 오기 전까지 여기 살았던 내 친구가 이미 아저씨한테 내 이야기를 한 것이었다. 아저씨와 인사를 나눈 후 현관문을 닫자마자 내 개인정보를 허락도 없이 다른 사람에게 막 알려준 친구에게 약간 화가 났다. 그때 다니엘 아저씨와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면, 이 순간 아저씨가 선뜻 나를 도와줬을까?     


다니엘 아저씨는 들고 있던 맥주잔을 내게 넘기고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건물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얼른 집으로 뛰쳐 올라갔다. 현관문 열쇠 구멍에 열쇠가 당당하게 꽂혀 있었다. 집안에 들어가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도둑한테 집을 통째로 내어주는 짓을 하다니. 그래도 길에서 잃어버리지 않았고, 아저씨 덕분에 빨리 확인할 수 있었던 건 천만다행이었다. 


문을 다시 잘 잠근 후 아래로 내려와 맥주를 마시고 있는 다니엘 아저씨를 향해 열쇠를 짤랑 흔들어 보였다.      



“아저씨, 열쇠 찾았어요! 그라시아스!”     



아저씨는 내 쪽을 향해 허공에다 건배했다. 남부 스페인 생활에 거의 다 적응한 줄 알았는데 아직까지 익명성이 더 편한 대도시인 마인드로 살고 있었나 보다. 다니엘 아저씨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나도 한번은 내 이웃에게 다정할 것을 다짐하며 힘차게 뛰었다. 러닝 벨트 안에서 열쇠의 울퉁불퉁한 감촉이 느껴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마음이 자꾸 가라앉는 날에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