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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대초록 Nov 27. 2022

계절성 무기력이 덮칠 때


추워졌다. 마침내.


드디어 추워졌다고 썼다가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탕웨이가 말한 것처럼 써 보았다. 갑자기 궁금해져 사전에서'드디어'와 '마침내'의 정확한 뜻을 찾아보았는데 '드디어'는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 결과로', '마침내'는 '드디어 마지막에는'이라고 나와 있다. 나는 '기다림 끝에'라는 뜻으로 '드디어'를 쓴 건데 사전적 정의로라면 오히려 '마침내'가 더 가깝지 않나?


아무튼,


도통 기력도 활력도 의욕도 식욕도 없는 날들이다.


이 시기면 늘 그랬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작년 딱 이맘때에는 너무 쉽게 피곤해져 피검사도 해 봤다.(결과는 다 정상) 학기가 시작하고 벌써 입술이 두 번이나 터졌다. 감기 증상도 몇 번 왔다 갔다 했다. 날이 추워져서라고 하기에는 올해는 11월은 작년보다 훨씬 따뜻했는데도.


낮에는 26도까지 올라가는 날들도 있었다. 추워져야 할 시기에 추워지지 않는 건 기후 위기의 현상이니 따뜻한 11월이 반갑지도 않았고, 긴긴 더위가 정말이지 지긋지긋했다. 공기는 탁하고 아침에 춥다고 껴입고 나가면 오후에는 땀이 났다. 어차피 추워질 거 얼른 추워졌으면 했다. (그렇게 추워져도 최저기온은 10도다)



직년 겨울, 스톡홀름의 어느 창문



11월 셋째 주가 되며 본격적으로 추워지니 수업에 들어가면 두세 명은 목소리가 안 나오고 두 세명은 기침하고 있고 두 세명은 콧물 흘리고 있다. 나도 작년 이맘때에 목소리가 나갔는데, 올해는 나갈 뻔하다가 다행히 다시 돌아왔다. 여기 사람들 몸은 환절기만 되면 참 정직하게도 반응한다.


계속 공기가 안 좋아서 최근 달리기하러 나가지도 못했다. 뭐 공기가 괜찮을 때도 안 나갔다.


운동을 해야 활력이 생기는데 운동하러 나갈 기력이 없는 게 딜레마다. 이번 주말에 있는 힘 없는 힘을 쥐어 짜내 이 주 만에 체육관에 나가서 필라테스를 하고 사우나도 했다. 따뜻한 물에 몸 지지니까 역시 좋더라.


먹고 싶은 것도 맛있는 것도 없다. 그렇다고 굶지는 않고 때가 되면 뭐든 꾸역꾸역 먹긴 먹는다.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맛있는 걸 먹고 싶다. 베를린에서 먹은 비건 쌀국수를 먹으면 입맛이 돌아오려나.


지금 당장 제일 먹고 싶은 건 망원동 가원의 비건 짜장과 짬뽕, 들깨칼국수, 청국장 쌈밥 이런 것들. 다 여기서는 쉽게 먹을 수 없는 것들이다.



비건 천국이던, 무려 비건 베트남 식당에서 먹은 쌀국수



말라가에서 아무것도 당기는 것도 먹고 싶은 것도 없는데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비건 도넛 가게에 가서 매번 다른 도넛과 오트라떼를 먹는다. 하도 자주 갔더니 지난주에는 사장님이 어디에서 왔냐며 말을 걸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자기 한국 음식 좋아한다면서 말라가 한식집에서 먹은 한식 사진을 줄줄이 보여줬다.


말라가 오기 전에는 마드리드에 살았는데 거기에서 자주 간 한식집 사진도 보여줬다. 비건 도넛집을 운영하고 있으니 당연히 사장님이 비건일 줄 알았는데 사진에 있는 음식에 고기 들어간 게 많아서 조금 놀랐다. 뭐, 비건 아닌 사람도 비건 도넛집을 할 수 있지.


나오는 길에 사장님이랑 통성명을 했다. 놀랍게도 내가 먼저 이름을 물었다. 여기 사람들은 단골집 사장이나 종업원들과 서로 이름을 알고 자잘한 개인 정보도 알고 수다 떠는 게 일상적인데 어떤 단골집에 가도 반갑게 눈인사만 하고는 조용히 갔다 조용히 나온 내게는 엄청난 발전이다.



비건 도넛과 오트라떼



몇 달 전 오랜만에 자주 가는 카페에 갔는데 주인이 바뀌어 있었다. SNS를 보니까 주인 커플은 긴 커피 여행을 떠났더라. 그렇게 자주 드나들었는데 서로 이름도 모르고 작별 인사도 제대로 못해 못내 아쉬웠던 게 자극이 된 걸까.


사장님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름을 말하고 내 이름도 묻고는 악수를 건넸다. 안달루시아 생활 3년은 극내향인 꼬레아나가 이런 것도 하게 만든다.


여기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스몰토크가 세상에서 제일 싫고, 모르는 사람들이 한 트럭 있는 모임에서 이야기하는 거 너무 스트레스였는데(사회적 가면을 쓰고 티 안 나게 엄청나게 애쓰긴 하지만) 여전히 좋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힘들지도 않다. 삼십 대에도 성격이 바뀔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최근 문자 보내는 데 힘이 많이 든다. 정확히는 문자에 답장하는 게 힘들다. 묻는 질문에 단답형으로 대답만 하면 되거나, 어떤 수치를 알려주는 그런 문자가 아니라면 도통 바로 대답하지를 못한다. 원래도 이메일이나 문자에 답할 때 오래 생각하고 쓰는 편인데(손은 급해 오타를 많이 내는 것과 별개로) 에너지가 없을 때라 여기까지 쓸 힘이 없나 보다. 문자가 힘든데 하물며 블로그 쓰는 건 오죽할까.


이 포스트도 며칠에 걸쳐서 작성했다. 그나마 딱 작년 이맘때 똑같은 증상을 겪고 그걸 남겨놓은 기록을 본 게 좀 위로가 됐다. 이것도 다 흘러가는 시간이라고. 그러니 받아들이되 그렇다고 나를 너무 놓아버리지는 말라고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내게 일러준다.


.스스로 으쌰으쌰 할 힘이 없으면 책임감의 힘이라도 빌려서 밖으로 나간다. 기운을 뺏어가는 사람은 만나지 않고, 주는 사람들이 부를 때는 무조건 응한다. 막상 약속 시간이 닥치면 너무 나가기 싫은데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나가게 된다. 그렇게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햇볕을 쬔다.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갑자기 계절이 바뀔 때 어떻게 자기를 추스르며 사는지 궁금하다.

다들 잘 자고 잘 먹고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기세 등등한 파파야 나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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