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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대초록 Nov 27. 2022

모두가 여름 나라로 갈 때
겨울 왕국에 갔다

스웨덴 스톡홀름




스톡홀름 공항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공기가 뺨을 훅 스쳤다. 남부 스페인에서 2년간 살며 가물가물해진 한국 겨울이 바로 기억나는 그런 추위. 오래 잊고 지낸 익숙한 감각이다.


비행기에서부터 잔뜩 껴입고 있던 옷 때문에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는데 몸을 확 식혀주는 찬 공기가 청량하다 못해 상쾌했다. 추위가 기분 좋게 느껴질 수 있는 거였다니.


오후 네 시가 넘은 스톡홀름의 하늘은 새까맸다. 모든 건물 창문마다 커다란 별 모양 조명과 LED 촛불이 깜깜한 밤을 은은하게 밝히고 있었다. 춥고 어두운데 아늑하고 따뜻한 느낌. 이게 스톡홀름의 첫인상이었다.


북유럽 사람들이 해를 찾아 남부 스페인으로 몰려드는 이 겨울에 자진해서 춥고 밤이 긴 겨울 왕국을 찾아온 이유는 어이없게도 어둠을 즐기기 위해서였다.


내가 살고 있는 말라가는 일 년 365일 중 350일 맑고 파란 하늘을 볼 수 있는 곳으로 비와 흐린 날이 귀하다. 축복받은 땅에서 살고 있지만 매일 파란 하늘과 좋은 날씨가 기본값이 되니 감사한 마음을 종종 잃고는 했다.


한국에서 날씨 좋다며 피드에 파란 하늘 사진이 줄줄이 올라오는 날이면 특별할 게 없는 풍경이라 갸우뚱하기도 했다. 이렇게 사람은 좋은 것에도 금방 익숙해지더라.


긴 남부 스페인의 여름은 고역이었다. 일몰 시간은 점점 늦어져 밤 10시 반이 되어야 어두워지니 들뜬 분위기가 하루 종일 지속됐다. 원래도 늦은 저녁 식사 시간은 점점 늦어져 급기야 밤 10시에 시작되어 12시가 되어 끝났다.


더위를 피해 건물 밖으로 나와 앉아 새벽까지 노래를 부르고 떠드는 이웃들 때문에 제대로 잘 수 없는 날들이 이어졌다. 어둠 속에서 열기를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하루를 정리할 밤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이런 여름을 보내며 밤과 어둠 또한 낮만큼이나 중요한 시간이란 걸 알게 된 것이다.




버스에서 내린 후 돌바닥 위로 캐리어 끄는 소리를 요란하게 내면서 구시가지인 감라스탄으로 들어섰다. 숙소로 가는 길에 우연히 크리스마스 마켓을 발견했다. 짐만 놓고 얼른 다시 와야겠다 생각하며 숙소로 향했다. 에어비앤비 호스트를 만나 집에 대한 설명을 간단히 듣고 왔던 길을 되돌아 크리스마스 마켓으로 달려갔다.



그 잠깐 사이에 마켓의 가판 반 정도가 문을 닫았다. 한 가판에서 뱅쇼하고 비슷한 따뜻한 와인 글럭을 팔고 있어서 일단 하나를 주문했다. 현금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나라라고 해서 환전을 안 해왔는데 마켓 가판에서조차 카드로 계산이 가능한 게 신기했다. 아몬드와 건포도가 들어있는 글럭은 지금까지 마셔 본 뱅쇼보다 10배는 더 달짝지근했다.



어느 이층집에서 전통 음악인지 신기하고 이상한 노래를 부르는 것을 좀 구경하고 감라스칸 골목골목 예쁜 가게들을 구경하며 시내 중심부로 갔다. 다리 너머로 보이는 시원시원하게 뻗은 건물들과 어두운 강물까지도 다 예뻤다.





저녁 먹을 시간이라 근처 식당들을 찾아보니 일곱 시인데도 대부분 문을 닫았다. 결국 길에서 파는 비건 소시지를 사 먹었다. 길거리 가판대에서도 비건 소시지를 팔다니, 그것도 비건 프리미엄 안 붙고 일반 소시지랑 가격 똑같은 것도 감동. 여기서도 물론 카드 결제가 됐다.








일어나 창문을 열어보니 밤 사이 소복하게 쌓인 눈 위로 동이 트고 있다. 새벽에 엄청나게 시끄러운 소리에 잠시 잠이 깼는데 제설차 소리였나 보다.



교회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인 에어비앤비 호스트는 연주 리허설 때문에 이미 나가고 없다. 조용한 집에서 혼자 어제 사 온 오트밀로 아침식사하고 꽁꽁 싸맨 뒤 밖으로 나갔다.


길 위에는 눈이 소복했다. 일부러 눈이 쌓인 곳에 가서 눈위 자박자박 걸으며 발자국을 남겨 보았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눈이다. 무려 영하 9도의 크리스마스 이브. 이렇게 밤이 길어도 아침에는 제대로 해가 뜨는구나. 그런 거면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한 건 오산이었지… 이때만 해도 여행의 반을 해를 전혀 보지 못하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24일에 문 여는 곳이 없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을 것 같아 전날 워킹투어를 예약해 두었다 가이드를 따라 시내 곳곳을 걸어다녔는데 한 시간쯤 지나니까 발끝이 얼얼해지기 시작하며 가이드말이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영하 9도에 워킹 투어는 무리였나...



숙소로 돌아가 기모 레깅스 안에 얇은 레깅스를 하나 더 덧입고 양말도 하나 더 신고 나와 힙스터 동네라는 쇠데르말름 쪽으로 걸어갔다. 거의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았지만 흥미로워 보이는 숍이 많아서 연휴가 끝나고 문 열면 다시 오려고 구글맵에 표시를 해 두었다. 





스페셜티 커피로 유명한 쇠데르말름의 Drop Coffee는 문이 닫혀 있었다. 혹시나 하고 근처에 있는 또다른 커피 맛집 Johan Nystrom에 가 보니 문이 열려 있었다. 사진상으로는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 않았는데 실제로 들어가니 인테리어도 분위기도 훨씬 아늑하고 좋았다. 


오트라떼를 한 잔 시키고 커다란 창 앞에 앉아서 사람들을 구경했다. 이브에 열려 있다니 감동이잖아. 들어오는 사람들이 왜 하나같이 다 영어만 하나 했더니 이브였네. 이브날 굳이 밖에서 카페를 찾는 사람들이란 관광객들밖에 없겠지.


밖은 추워도 어딜 들어가도 금세 따뜻하지는 게 좋다. 커피 가격은 한국과 비슷한 수준. 스웨덴은 커피를 리필해 주는 문화가 있어서 필터 커피를 주문하면 대개 한 잔 더 무료로 마실 수 있다.






창밖으로 이 영하의 추위 속에서 유아차를 끌고 다니는 사람들이 보인다. 오전에는 눈 위에서 아랑곳하지 않고 조깅하는 사람도 봤다.


여행 오기 전 스웨덴에 관한 책을 몇 권 읽었는데 그중에서 기억에 남는 내용이 있다. 여기 사람들은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아이들 면역력을 기르기 위해 하루에 꼭 한 번은 아기를 유아차에 태우고 밖을 산책한다는 것.


학교에서도 날씨가 영하로 내려가든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정해진 시간 야외 활동을 한단다. 이 땅에서 태어난 이상 일 년 중 절반에 가까운 긴 겨울의 추위와 어둠 속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조금만 추워져도 날씨 핑계를 되며 좀처럼 집 밖을 나가지 않으려 하는 내가 배워야 할 삶의 자세다. 그리고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풍경은 영하의 추위 속에서도 옷을 입지 않고 주인과 산책하는 반려견들이다. 말라가 사람들이 영상 10도에도 춥다고 개들 옷 입혀서 산책 시키는 걸 생각하면 여기 사람들은 개까지도 강인하게 키우는구나 싶어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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