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싱키에서 보낸 크리스마스
3년 연속으로 겨울 휴가 때 추운 나라를 여행하고 있다. 재작년에는 스웨덴, 작년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그리고 올해는 핀란드. 모두 추울 뿐 아니라 해도 서너 시면 지는 나라들이다.
한국에 살 때는 워낙 추위를 많이 타서 겨울만 되면 남쪽 나라로 도망 가기 바빴던 내가, 자진해서 겨울 왕국을 찾아가게 된 건 일 년 내내 아낌없이 해가 나는 말라가에 살기 때문일 거다.
북유럽의 추위는 스페인의 으슬으슬한 얕은 한기와 달리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맛이 있다. 이러다가 며칠 해를 못 보면 슬슬 집에 가고 싶어지고, 말라가에 도착해서 새파랗고 쨍한 하늘 보면 급 행복해져 다시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진다. 이런 매력에 계속해서 겨울 나라를 여행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원래 작년 겨울에 핀란드에 가려고 했지만 휴가가 얼마 남겨 두지 않고 준비하니 비행기표도 숙박비도 모든 게 너무 비싸서 포기하고, 이번에는 무려 3개월 전부터 여행 준비에 둘어갔다.
말라가에서 헬싱키까지는 무려 4시간 45분. 지금까지 여기 살면서 가 본 유럽 나라 중에서 가장 멀다. 크리스마스이브라 그런가, 헬싱키 행 비행기는 텅텅 비었다. 한 열이 한 명 겨우 앉을까 말까 한 정도.
아이패드로 책을 읽고 있는데 승무원 한 분이 쓱 다가왔다. 태블릿 꽂이 사용하는 법을 알려 주시며 화면을 보고는, ”한국 사람 맞죠? 책 보니까 그런 것 같은데?“라고 흔다. 그렇다고 하니까 반가워 하며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하고는 사라졌다.
비행기에서 내릴 때 잠시 이야기를 나눠 보니, 비행하며 한국도 몇 번 갔고, 와이프가 한국 드라마를 너무 좋아해서 자기도 한국어 몇 마디를 좀 배웠다며 헬싱키에서 좋은 시간 보내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쾌적한 비행과 친절한 승무원 덕분에 시작부터 점수를 따고 들어간 핀란드 이미지는 공항에서 시내에 가는 버스에서 와장창 깨졌다.
미리 검색해 놓은 버스가 들어왔을 때 방향이 헷갈려서 버스 기사님께 휴대폰을 보여주며 이쪽으로 가는 게 맞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기사님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노 잉글리시!’라고 소리쳤다.
아니, 지도상의 방향만 확인하면 되는 건데? ’시티 센터?‘ 하고 다시 물어봤지만 또다시 나가라는 듯한 손동작을 하면서 큰소리를 냈다. 대체 내가 영어를 한 게 화가 나는 걸까, 질문한 게 화가 나는 걸까? 황당하고 기분이 상했다.
결국 그 버스를 그냥 보내고 추위 속에서 십여 분을 다시 기다려 같은 버스가 왔다. 다시 물어보니 이번에는 이번에는 너무나 친절하게 시내로 가는 버스가 맞는다고 알려주시는 기사님.. 헬싱키에 발을 제대로 들여놓기도 전에 기분을 잡칠 뻔했지만, 다음날이면 잊어버릴 일 하나 때문에 내 여행의 시작을 망치고 싶지 않다. 얼른 흘려 보내자.
예약한 에어비앤비는 커플이 살고 있는 집인데 크리스스마스 휴가 동안 가족들 만나러 간다고 집을 비워 며칠을 혼자 지내게 됐다. 내가 도착해서 배 고플까 봐 준비해 놓았다는 웰컴 박스를 열어 보니 메시지와 함께 비스킷과 컵 파스타, 핫초코, 차, 커피, 계란과 초콜릿이 들어 있었다. 비건인 내가 못 먹는 음식이 반이었지만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식물과 색색깔의 패브릭과 촛대와 그림으로 꾸며 놓은 집은 너무 예뻐서 놀랐고, 물 마시려고 찬장을 열었더니 컵도 그릇도 모두 마리메꼬와 아라비아 핀란드라서 또 한 번 놀랐다. 유리컵은 모두 이딸라. 덕분에 그동안 눈여겨보았던 마리메꼬 그릇과 컵에다가 밥을 먹는 호사를 누렸다.
크리스마스 날은 문을 다 닫아서 딱히 할 게 없어서 워킹 투어를 신청했다. 지금까지 말라가, 리스본, 스톡홀름, 런던, 더블린에서 워킹투어를 해 봤는데 여태껏 한 워킹투어 중에서 이번 투어가 제일 재미있었다.
가이드가 조곤조곤면서도 어찌나 스토리텔링을 맛깔나게 잘 하는지, 딱히 아는 게 없던 핀란드라는 나라에 대해서 알게 됐고, 이 나라에 더 흥미가 생겼다. 오늘 들은 이야기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을 몇 개만 정리해 보자면
- 핀란드는 600년 동안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고, 그 후에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따라서 핀란드의 제2 공식 언어는 스웨덴어라고 함. 실제로 표지만 등에 핀란드어와 함께 스웨덴어가 쓰여 있음.
- 핀란드에서는 정해진 특별한 국가 기념일을 제외하고서는 국기를 게양하는 게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걷다 보니까 우크라이나 국기는 많이 보이는데 왜 핀란드 국기가 안 보이나 생각을 했는데, 이런 법이 있었다니! (이유는 가이드도 열심히 찾아봤지만 모른다고 함)
하지만 정부 청사가 들어서 있는 광장에 가면 정작 핀란드 국기는 안 보이는데 스웨덴 대사관에 떡 하니 스웨덴 국기만 펄럭이고 있으니 관광객들이 혼란스러워한다며 핀란드 내에서 논란이 되었고, 결국 대응책으로 스웨덴 대사관 바로 옆에 있는 헬싱키 시청에만 국기를 게양하도록 허는 방안을 마련했다고.
- 핀란드는 부모들이 돈을 내는 것이 금지되어 있어서 사교육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모든 학교는 공교육으로 이루어지며 수학여행 같은 모든 활동 또한 무료라고 함. 경쟁 체계가 없어서 학교에 시험이란 게 아예 없다고 한다.(그럼 대학 입학은 어떤 방식으로 하지? 대학교도 시험이 없나? 궁금해짐) 그런 만큼 세금을 수입의 60퍼센트까지도 떼간다고 함.
- 헬싱키의 대관람차를 보면 하나만 색깔이 다른데 그건 사우나 칸이라고 한다! 북극권인 라플란드에 살던 사미족들로부터 시작된 사우나 문화는 핀란드 사람들을 삶에 너무나 깊이 관여되어 있어서, 사람이 있는 모든 장소, 학교, 회사, 정부 청사 등에는 다 사우나가 있단다.
사우나가 있는 버거킹도 있고 심지어 헬싱키 대관람차에는 사우나 칸이 있다! 그리고 새로 만드는 집에는 다 사우나가 설치되어야 한다고 함. 전통적으로는 출산도 사우나에서 하고, 장례식 전에 시체를 사우나에서 씻기기도 했다고.
투어가 끝나고 크리스마스 날 유일하게 열려 있는 사우나인 알라스 씨 풀(Allas Sea Poola)에 갔다. 수건을 빌릴 수 있을 줄 알고 따로 안 챙겨 갔는데 수건 대여비가 8.9유로?? 결국 안 빌리고 머리는 꼭 짜서 드라이기로 말리고 몸은 자연 건조했다.
수영복을 입고 들어가는 남녀 공용 사우나 안에는 커다란 통창이 있어서 밖의 바다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창 바로 앞에는 달궈진 돌이 담겨 있고, 한 번씩 자동적으로 물이 뿌려져 칙- 하는 소리가 났다. 핀란드 사람들은 한겨울에 사우나에 들어갔다가 답답할 때면 나와서 바로 앞의 얼음 물에 뛰어든다는데, 이 사우나에는 야외 수영장이 있어 얼음물 대신 데워진 수영장 물에 뛰어들 수 있다.
대략 15분쯤 앉아 있다 보니 좀 답답해져 영하 2도에 수영복만 입고 다다다 뛰어나가 수영장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물은 아주 따뜻하지는 않았지만 수영하면 춥지는 않았다. 영하 2도에 야외 수영이라니!
그래도 물에서 나와 매서운 공기를 뚫고 사우나로 들아가는 순간은 너무 행복하지요.
사우나에서 나와 헬싱키 대성당에 영어 캐럴 부르는 행사가 있다고 해서 보러 갔다. 대성당 내부는 사람들로 꽉 찼다. 한 분이 오르간 반주에 맞춰서 캐럴을 부르면 참석한 사람들이 조용히 함께 따라 불렀다.
커다란 성당 내부에 오르간 소리가 퍼져서 분위기가 사뭇 경건했다. 모르는 캐럴이 많아 중간에는 좀 졸다가 마지막 캐럴린 ’고요한 밤‘을 함께 부르며 고요한 헬싱키의 크리스마스 밤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