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 기차 타고 북극권으로
제일 좋아하는 교통수단으로 늘 기차를 꼽는다. 버스 타면 멀미하고 비행기는 대기 시간이 너무 길고 배는 무섭고 자동차는 운전을 못해서 옵션에 없다.
기차는 버스보다 움직임이 덜해 책을 읽거나 받침대를 놓고 일기도 쓸 수 있고, 답답하면 식당칸에 가서 기분 전환도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기차가 내는 규칙적이고 약한 덜컹거림이 좋다. 좌석에 등을 딱 붙이고 이 진동을 가만히 느끼고 있으면 묘하게 마음이 편안해져 온다.
지금까지 두 번의 야간 기차 경험이 있다. 첫 번째는 20대 초반 떠난 유럽 여행 중 오스트리리아 빈에서 이탈리아 베네치아로 넘어갈 때였다. 양쪽에 세 개의 침대가 겹겹이 쌓여 짐을 둘 수도 없이 좁았고, 제일 꼭대기 침대를 배정받아 허리를 펴고 앉을 수도 없었다. 마침 제일 아래 침대에 한국인이 앉아 있어 양해를 구하고 2층 침대를 접은 후 그분 침대에 같이 앉아 수다 떨다가 너무 추워 벌벌 떨며 쪽잠을 잤던 기억이 난다.
두 번째는 같은 여행 중 그리스의 테살로니키에서 국경을 넘어 터키 이스탄불로 가는 기차였다. 2인실 칸은 빈에서 탄 야간기차와는 비교도 안 되게 넓었고, 화장실과 샤워실도 딸려 있는 데다 무려 미니 냉장고까지 있었다. 이야기할 사람도 없고 스마트폰도 없던 때라 흐르는 바깥 풍경만 몇 시간 동안 멍하게 바라보다 잠들었다.
여기까지 쓰고서 까맣게 잊고 있었던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고2 때 가족들하고 간 패키지 중국 여행에서도 야간 기차를 탄 적이 있다는 걸. 너무 오래되어 어디에서 어디로 갔던 건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한 칸에 이층 침대가 두 개 있는 사인실 침대칸이어서 우리 네 가족이 같이 썼고, 이층 침대에 앉아 건너편 이층 침대에 앉은 동생과 수다 떨었던 것, 그리고 컵라면을 끓여 와 창밖을 보며 가족들끼리 같이 먹었던 게 어렴풋이 생각난다. 그리고 여행 전 일정에 야간 기차 타는 게 있는 걸 알고 기차 안에서 읽으려고 엄청 고심해서 책 두 권을 골라 갔던 것도.
앞의 두 경험만으로는 야간 기차에 대한 낭만을 가지기엔 좀 부족한 거 아닌가 싶었는데 최초의 야간 기차 기억을 되찾고서야 그 낭만이 어디서 온 건지 이해가 간다. 그때가 처음이자 (현재로선) 마지막인 온 가족이 함께한 해외여행이었으니까.
이번에 핀란드를 온 목적은 북극권 라플란드 지역에서 오로라를 보기 위해서였다. 헬싱키에서 북극권의 이발로 공항까지는 비행기로 한 시간 반 만에 갈 수 있지만, 헬싱키에서 북극권의 시작점이자 산타가 사는 걸로 유명한 로바니이메까지 가는 야간 기차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문제는 이 낭만을 느끼려는 사람들이 나뿐만이 아니어서, 여행 3개월 전부터 기차표를 알아봤음에도 이미 매진이거나 남아 있는 표는 200유로가 훌쩍 넘었다. 그리고 침대 하나가 아니라 2인실 침대칸을 통째로 예약해야 하는 시스템이라 혼자서는 가격도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성수기 날짜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침대칸 한 칸을 100유로 이하로 예약할 수 있는데. 이렇게 되면 비행기를 타는 게 더 쌌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기차의 침대에 누워 서서히 북극권으로 향해 가고 싶었다.
며칠 동안 기차 예약 사이트를 드나들며 표를 확인하다가 드디어 원하는 날짜의 밤 7시 반에 출발해서 로바니에미에 새벽 7시 20분에 도착하는 침대칸을 199유로에 예약했다. 비수기 가격과 비교하면 2배 이상이지만 당시 내가 예약할 수 있는 날짜 중에서는 이게 제일 싼 금액이었다. 12월이 되어 표를 사려고 보면 300유로가 넘는다.
헬싱키에서 로바니에미로 떠나는 날 눈이 왔다. 헬싱키에 있는 동안은 제일 추운 날이 영하 5도 정도로 그렇게까지 춥다고 느껴지진 않았는데, 영하 20도가 넘어가는 북극권의 추위는 어떠려나.
야간 기차에선 식당칸도 한번 가 줘야지. 북유럽 아니랄까 봐 맥주 값이 무시무시하다. 다른 북유럽 국가들처럼 핀란드도 주류세가 매우 높아 술이 정말 비싸다. 맥주를 기준으로 스페인의 2.5배에서 3배 정도 비싼 듯. 하지만 무알코올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편.
맥주를 마시며 로바니에미 일기 예보를 확인해 봤는데 아니, 해가 11시에 떠서 1시에 진다고? 처음에는 휴대폰 설정이 잘못된 줄 알고 몇 번이나 화면을 새로고침했다.
헬싱키에서 9시 반에 해가 떠서 3시가 넘어지니까 그것보다 좀 더 일몰이 빠를 거라고 예상했지, 해가 뜨자마자 질 줄은 몰랐지.... 그런데 여기서 더 가서 사리셀카는 해가 7일 동안 아예 안 뜬답니다 ㅋㅋㅋㅋㅋ 그저 헛웃음만 나옴.
오전 7시, 침대칸 안에 딸린 알림이 울려서 깼다. 도착 시간이 너무 일러서 연착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어쩜 단 1분도 넘기지 않고 7시 20분 정각에 기차는 로바니에미에 도착했다.
일단 기차역 안에 있는 사물함에 짐부터 보관하고 역내 식당에 가서 아침부터 먹었다.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다 모여든 듯 식당 안은 금세 꽉 찼다. 천천히 아침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며 정신을 어느 정도 차린 후 기차역 바로 앞에서 버스를 타고 산타 마을로 바로 갔다.
산타 마을은 역에서 10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버스비는 무려 7.5유로. (나중에야 이 시기 한시적으로 운영하는 산타 버스가 왕복 8유로에 운행하는 걸 알았다) 9시가 조금 넘은 눈 덮인 산타마을은 꼭 밤 9시처럼 깜깜했고, 예뻤고 매우 추웠다. 헬싱키와는 비교도 안 되는 차가운 공기에 드디어 북극권으로 들어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여기서부터 북극권 시작. 원래 바닥에 북극선 표시가 있는데 눈에 뒤덮여서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선 엽서를 부치면 2024년 크리스마스 때 엽서를 받을 수 있다.
여기는 전 세계 아이들이 산타한테 쓴 편지. 예전에 그 산타한테 편지를 쓰면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답장이 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는데 그때는 편지 써주는 산타가 여기 살고 있는 줄은 몰랐네.
산타가 박혀 있는 0유로 지폐산타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고 산타 접견을 예약했다.. 산타에 대한 로망 같은 건 수십 년 전 없어진 이 어른이도, 한때는 산타 할아버지 기다리다가 잠들고, 일어나 머리맡에 놓인 선물을 보고 기뻐하던 어린이 시절이 있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산타를 안 만나고 가면 아쉬우니까.
예약 시간에 맞춰 가면 바로 산타를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무려 한 시간을 기다려 산타를 만났다. 산타는 매우 풍채가 좋고 수염이 길고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아이들이 산타를 만나면 무서워서 운다던데, 확실히 주변을 압도하는 분위기가 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한국말로 간단하게 인사해 준다고 하더니, 이날은 올 한 해 즐겁고 좋은 일만 가득하기를 바란다며 간단한 덕담만 해 주셨다. 밖에 줄이 끝도 없이 있는데, 하루 종일 이 방안 작은 의자에 꼼짝없이 앉아 사람들하고 말하고 사진을 찍어야 한다니, 산타로 일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네. 이래서 산타는 핀란드 공무직인가.
산타를 기다린 시간 한 시간,
산타를 만난 시간 1분,
산타와 찍은 사진은 35유로,
디지털 파일은 50유로,
(내가 사서) 산타에게 받을 깜짝 선물은 30유로.
스페인에서 온 한국인 어른이는 자본주의 끝판왕 산타를 만나 꿈과 희망이 깨진 채 시무룩하게 기차역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