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초딩들과 첫 프랑스어 수업

빠리가 아니고 빠히

by 열대초록

나의 프랑스어 수준은 제로이다.


대학생 시절 프랑스에 배낭여행을 갔을 때 매일 사용한 봉쥬(안녕하세요) 봉수와(봉쥬의 저녁 버전), 메씨(감사합니다) 빠흐동(실례합니다) 같은 인사 표현이 내가 아는 프랑스어의 전부이다.


당장 수업에 들어가게 될 줄 몰랐기 때문에 책이고 뭐고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기분 좋은 긴장만 가지고 교실로 들어갔다. 학생은 나 포함 아홉 명이었고 대부분 초등학생 저학년 정도로 보였다. 추가 등록으로 새로운 학생이 몇 명 있어 선생님은 프랑스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 했다. 손을 든 사람은 나와 한 남학생 둘 뿐이었다. 완전 기초 수업인데도 다들 프랑스어를 좀 알고 있다는 데 좀 놀랐지만 후에 스페인 학교에 제2 외국어로 프랑스어를 배운다는 걸 듣고는 수긍이 갔다.


스페인어가 유창한 프랑스인으로 추정되는 선생님은 수업 규칙에 대해 스페인어로 이야기하다가 수업 시작과 동시에 프랑스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외국어는 영어, 일본어, 중국어, 스페인어를 배워 봤는데 영어와 일본어는 학교에서 배웠으니 성인이 되어 제로부터 시작한 외국어는 중국어와 스페인어였다. 둘 다 한국의 학원에서 한국인 선생님한테 배워 완전 기초 단계를 원어민한테 해당 언어로 배운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것도 프랑스어를 스페인에서.


한 단어도 이해하지 못한 채 소리로만 저게 프랑스어구나 인지해야 하는 상황은 꽤 충격적이었다. 한국의 한국어 학교에서도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면 한국어로만 수업하는데 한글 수업 때 우리 학생들이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이미 수업이 2주간 진행됐고 그 사이 알파벳, 자기소개, 국적까지 진도가 나간 상태. 간단히 알파벳 읽는 방법을 복습했는데 책도 없고 참고할 게 없어 일단 들리는 대로 한국어로 옮겨 적기 시작했다. 스페인어 알파벳 읽는 방법과 비슷한 것도 많았지만 e, o, r의 발음이 독특했했다. 마스크 때문에 선생님의 입모양이 보이지 않아 정확한 발음을 알 수 없었다.


알파벳 복습이 끝나자 선생님이 학생 한 명을 지목하고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 I*Du%**($#@?

학생: 쥐마뻴 Maria


이름이 뭐냐는 질문 같다. 다들 쥐마뻴 뒤에 이름을 붙이길래 나도 "쥐마뻴 Dana"라고 했다. 그다음은 한 사람을 지목하고 또 다른 사람 가리키며


선생님: *&^%())(*&^?

학생: 엘사뻴 Cristina.


저 사람 이름이 뭐냐는 건가 보다. 여자는 '엘사뻴' 남자는 '일사뻴'이라고 하는 걸 보나 '쥐'는 나, 일'은 그, '엘'은 그녀겠지. 추리에 추리를 더해가는 수업. 프랑스어 철자법을 모르니 공책은 한국어와 스페인어가 뒤섞여 난리다.


외국어는 어릴 때 배워야 하고 나이가 들면 머리가 굳어 효율이 떨어진다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듯하다. 스펀지 같은 흡수력은 떨어져도, 내가 가진 다른 지식을 참조해서 요령껏 공부할 수 있는 능력 또한 나이가 들었기에 가능한 일. 정말 오랜만에 엔도르핀이 팡팡 돌고 머리도 팽팽 돌아갔다. 프랑스어 첫 번째 수업은 생각보다 꽤 즐거웠다.





새로 배운 표현

- Très bien.트헤 비앙 = 아주 좋아요. 스페인어 muy bien.

- A만 읽어도 아주 잘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초 수업은 칭찬을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시간.


발음

-/r/ 발음 - 목구멍에서 끌어올린 '흐' 소리. 예전에 스페인어 수업에서 프랑스어가 모국어인 친구가 r 발음할 때마다 '흐' 소리를 내던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Paris의 프랑스어는 '빠히'였다.


-/e/발음 - 입모양을 '우'로 하고 '으'로 발음함.

이 어려운 두 발음이 다 들어간 단어 '러시아' 'Russe'.

너무 어려워서 쓰지도 못하겠지만 굳이 쓰자면 '흐이씨' 정도. 모르고 들었으면 나라 이름이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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