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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성민 노무사 Feb 28. 2018

<사마의: 미완의 책사> 1~2화 리뷰

중드로 보는 정치썰 - 사마의: 미완의 리뷰 (1)

이 드라마의 1화는 '의대조(衣帶詔) 사건'이다. 사마의의 아버지가 옥에 갇히는 사건이 주요 에피소드가 되는 2화 또한 그 연장선이라 할 것이다. 두번째 다시 보니 이제 좀 알 것 같다. 이 '의대조' 에피소드는 드라마의 빠른 전개를 위해 정치세력과 인물의 '갈등구조'를 쏟아내고 있다. 


내가 뽑아낸 주요 키워드는 월단평, 양수, 사마의, 순욱이다.



1. 월단평

과거제도 이전의 인사채용은 "명사에 의한 추천제 채용"이었다.

처음 이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은 이 월단평을 의대조 사건 이래 사마의의 정치적 출사의 배경이 되는 사건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이 드라마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사마의의 "신개혁"의 가장 핵심 화두는 바로 '구품관인법'이었고, 바로 여기서부터 드라마 후반부의 대립이 시작된다. 


'삼국지'의 시작을 흔히 "환영의 혼란"(한 환제, 영제 양대의 혼란) 이후 초래된 황건적의 난과 그 이후 동탁의 등장과 군웅할거로 많이 설명하지만. 사실 진짜 배경, 근원은 "당고의 금"이다. 흔히 사대부와 환관과 외척 세력의 대립이라고 표현되는. 1,2차에 걸친 당고의 금을 통해 청류와 탁류가 나뉘고, 그때 기존의 인재 채용제도 였던 "향거리선제"(천거제)가 붕괴된다. 지방호족, 사대부들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급속히 떨어지고 권력의 독과점이 진행됐기 때문이다. 그때 등장한 것이 '명사'에 의한 평가가 여론이 되면, 그 여론을 좇아 인재를 채용하는 방법이 성행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월단평'은 사실 난세의 혼란했던 시기에 적합한 인사채용제도였다.


현재의 우리가 곱씹어 볼 것은 월단평의 역사적 배경이 아니라 바로 "인사평가", "인재확보"의 철학에 있다. 정치는 흔히 신념을 위한 지난한 과정으로 이야기 되지만, 그 정치과정은 사실 권력의 확보와 유지를 위한 투쟁이며, 그 투쟁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바로 "신념"이다.


그러면 그 신념은 보통 무엇으로 대변되는가?

정치는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조직이 필요하다. 정치인의 신념은 다시 그 '조직', "또 다른 사람"을 어떻게 임명하느냐에 따라 드러난다. 최근 문재인 정부의 김이수 헌재소장 임명 실패, 김명수 대법원장 임명동의가 바로 그런 과정이었다. 인사의 문제는 바로 권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떤 인사를 등용하느냐 여부와 함께 우리가 주목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럼 어떤 인재가 좋은 인재인가?", "좋은 인재를 어떻게 선발해야 하는가?" 

의 부분이다.


여기에 대해서도 사람들의 의견은 대립되고, 이에 대한 갈등 역시 조직화될 수밖에 없다. 정치는 "신념"을 위해 싸우는 전쟁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정치를 위해 '어떤 사람과 함께 할 것인가'를 둘러싼 평가에 대한 대립이다. 우리가 흔히 정치를 "자리 싸움", "밥그릇 싸움"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각기 다른 평가제도에 의해 들어온 사람들은 보통은 서로 갈라지기 쉽다. 이른바 '지균충', '수시충', '정시충' 등이 나뉘는 세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조조의 "불인불효 유재시거" (어질지 않고 불효하다해도 재능이 있으면 쓰겠다) 라고 하는 선언과 이에 대한 한나라 신료의 대립은 그렇기 때문에 꽤 중요하고 분명한 이념적 대립의 구도다. 


바로 개인의 "덕"은 역량일 수 있는가? 개인의 "재량"만이 역량인가? 에 대한 가치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 또한 오늘날까지 쉽게 결론을 내지 못하는 영역이기에 의미가 깊다. 

최근의 한 사건을 봐도, 우린 개인의 역량에 "덕성"을 포함할 지, 그렇지 않을지 꽤 혼란스러워하는 듯 하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좀 더 올바른 인사채용의 문제, 더 나은 공정성의 문제*는 군주제 사회에서 꽤 치열한 이념적 대립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조조와 신료들의 대립은 그래서 필연적이다.


*'주어진 평가를 공정히 하느냐'의 문제는 공정성이 아니라 오히려 기회의 평등 문제에 가깝다. 그래서 사실 오늘날 우리의 '공정성' 논란은 그 단어가 오용되고 있는 느낌이 짙다. 오히려 진짜 공정성은 '어떤 평가제도인가?'의 문제의식에 가깝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공정성 논란은 아직 '더 나은 공정성'을 상상해내고 있지 못하거나, 그 상상이 차단되고 있다는 부분에서 좀 아쉽다. 


원소와의 전쟁이 가까워졌으니 월단평은 미루는 게 낫지 않냐는 반론에 조조는 "나는 내가 원소 너 따위와 전쟁을 하든 안하든 이걸 안정적으로 할 수 있다."라는 걸 보여주는 자체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 부분도 인상적이다. 회사에서 채용을 하지 않는 건 회사가 꽤 어려워졌을 때니까. "나는 건재하다."는 단순히 허장성세가 아니다. 건재하다고 대내외에 선포를 해야 그 힘의 크기를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으니까. 결국 인재 채용과 인사 평가의 문제는 결정권자의 상황과 가치관의 문제일 뿐이다. "인사" 문제는 '공정함'의 문제일 수 없다는 뜻이다. 그것은 특정한 권력과 가치관의 "필요"에 얼마나 싱크로 되는지 여부에 의해 결정되는 문제다. 


그것이 정갈한 언어로 "사람-직무 적합성"이라고 표현되며, 

구직자의 언어로 "운"이라고 표현되는 것 뿐이다.



2. 양수 vs 사마의

난 학자가 아니지만, 사실 "올바른 학문의 태도"는 양수가 취하고 있다고 본다. 학문은 "옳고 그름"이 분명한 것이기 때문이고, 시비를 가리기에 '학문'일 수 있는 것이다.

저런 태도라면 위작을 가려낼 수 없다. "학문"은 정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시비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전에 이야기된 양수의 말, 즉 위작을 선별하는 문제는 학문의 구조와 일관된 체계를 얼마나 잘 꿰고 있느냐의 문제지 '요약'해서 대충 총론적으로 무슨 말을 하는 지 아는 것은 학문의 자세라기보다는 "교양"의 자세에 가깝다. 


이를 테면 '알쓸신잡'. 학문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과의 관계를 두텁게 할 수 있는 훌륭한 무기가 바로 '교양'이다.


사마의가 저 발언 직후 대중들에게 환호를 받는 것 또한 이때문이다. 학자와 대중 모두에게 시간은 유한하고, 각자의 니즈는 다르다. 그러므로 각자의 생업에서의 전문성을 기를 수밖에 없는데, 학자가 학자인 이유는, 그저 학문이 '업'이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대중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두텁게 하고, 좀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해 그저 '교양'을 쌓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학식의 옳고 그름이 "태도"에 있다고 하는 순간, 모두가 학문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모두가 학자가 될 수 있는데 어떻게 안 좋아할 수 있을까? 


이건 흔히들 잘 말하는 명제, "쉬운 글을 써야 좋은 글이다.", "보그병신체 극혐" 등과 연관된다. 자신이 이해되지 않고 설득되지 않는 문제와, 자신이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진리가 아닌 문제는 사실 전혀 다른 차원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전자와 후자를 혼동하거나 (의도적으로) 섞어버리는 태도다.


그럼에도 이때 사마의가 처음 조조의 눈에 들었던 이유는, 이 자리가 사실 "학문의 높음"을 논하는 자리를 가장한 "정치적 출사"여부가 결정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백성의 지지를 가져올 수 있는 정치 동량을 확보하는 자리. 사마의와 양수가 모두 조조의 눈에 든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정치는 바로 "시비" 이전에 근원적으로 관계와 감정으로 결정되는 것이므로. 


대중들의 환호도 비슷하다. 저 월단평 자리는 "정치 인재" 채용 박람회 같은 거였다. '선거', '투표'라는 과정이 연상되는 건 당연한 수순. 선거, election은 원래 "elect", 엘리트를 뽑는 귀족정적인 성격의 것이기도 하다. '결정하는 위치', '참여에 대한 열망'에 대한 환호는 나의 '교양'을 옹호해주는 이에 대한 환호이기도 했다.



3. '출사'의 순간, '균열'의 순간

"나는 정치를 하려고 하는 게 아니야!" : 정치 시작 직전에 가장 많이 하는 말
'정치적 동지'와 균열의 순간. 편안한 균형에서 '불편한 균형'으로.


사마의의 월단평 등판은 사실상 '정치적 출사'다. 

그리고 서서의 '먼저 쓸모있는 사람이 되든지, 출세하든지' 란 말에 대해 사마의는 말한다.

"너무 멀리 갔다. 난 그저 아우의 분풀이를 위해 나가는 것."이라고. 


이쯤되면 약간 동아시아적 전통이란 느낌마저 든다. 이 드라마 뿐만 아니라, 가령 '랑야방-권력의 기록'에서도 황제가 되는 정왕은 '권모술수에 관심없고 권력욕이 없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한국 드라마들도 '어셈블리' 등의 정치 드라마나 많은 사극에서 권력의 자리에 다가가려는 사람은 항상 권력에 욕심이 없는 사람으로 나온다. 물론 권력은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절대반지'의 느낌이라서, 누구나 중독되면 골룸이 될 수 있지만서도. 한국의 정치는 '권력을 어떻게 선용하겠다.'라는 로드맵을 그리기보다는, '나는 (썩은) 정치인이 아니야.' 라는 선언을 더 많이 한다. "권력을 어떻게 하면 잘 쓸 것인가?"에 대한 고민없이, "나는 저 진흙탕에 가기 싫어"라는 말만 되뇌이면서도 정치의 자리를 기웃거린다면, 사실 좀 실망스러운 일이다. 정치는 앞서 말했듯 갈등의 조직화이고, 이해관계 간의 치열한 전쟁의 무대다. 그 진흙탕에서 옷을 더럽힐지언정 새 옷을 준비해놓을 순 있을 것이다. 새 옷을 미처 준비하지 못하고 더럽혀진 옷을 갈아입기 위해 남의 옷을 빼앗으려 하는 많은 순간, 정치인의 타락, 혹은 몰락의 순간이 가까워진다. 다만 사마의는 이후에도 출사를 하지 않기 위해 다리까지 부러뜨리는데, 어찌 보면 정치적 각성의 순간까지는 아직 좀 더 기를 모아야 한달까.


어쨌든 한 인물의 정치적 각성의 순간이 의외로 사소하고 느닷없을 수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사마의의 '초심'은 '최후의 승자'에 이르기까지 남아 있을까. 이 드라마의 또 다른 관전포인트다. 


'초심'이 권력을 어떻게 이용할지에 대한 설계 (이 설계는 사실 권력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신념에 해당할 것이다.) 가 아니라 권력에 대한 혐오, 권력을 멀리 하고자 하는 마음에 불과하다면,

"깨끗한 정치", "진심", "진정성"을 강조하고 좋아할 수록, 이후 정치의 무대에서 그는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저는 아무 자세한 설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마의 말고 그 바로 밑에 단 4가지 컷 이미지는 

2화에 "모든 한나라 신료를 대리시로 끌고 가 심문하라!"라는 명령에 순욱이 "나도 한나라의 신하다."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아마도 순욱의 지향은 조조라는 걸출한 인물이 한나라의 "주공"(논어에 나오는 주공 단)이 되길 바랬을 것이다. 그 균열이 2화에서 처음으로 표면화된 순간이다. 조조와 20년을 알고 지낸 최측근. 서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 


한나라의 신료들이 조조가 답답해하는 '기득권'이라면, 순욱은 거기에는 동의하지만, 그것은 조조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한나라에 대한 충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조는 순욱의 "충성"의 방향에 동의할 수 있을까? 이 균열은 정치인이 참모에게 바라는 "로열티"와 참모가 정치인에게 바라는 "내 이상을 실현해줄 사람"에 대한 불안을 드러낸다. 이 부분에 주목하면서 이후의 에피소드를 보면, 좀 더 풍부한 감상이 가능할 것이다.



다음 화는 언제 쓸 지 모르겠다. 시간 여유가 좀 있으면서 스트레스가 충전된 어느 시점이 아닐까 싶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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