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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성민 노무사 Mar 02. 2018

<사마의: 미완의 책사> 3~4화 리뷰

중드로 보는 정치 썰 - 사마의: 미완의 리뷰(2)

3~4화는 1~2화에서 나온 '의대조 사건'의 뒷 마무리와 이를 둘러싼 사마의와 양수의 대결을 그리고 있다.

비밀스러운 조력자 '급포'를 얻는 에피소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사마의를 둘러싼 조조, 곽가, 조비의 각기 다른 접근법.

그리고 양수가 난세를 살아가는 자세와 태도에 좀 더 눈길이 간다.


이번 에피소드의 핵심 키워드는 "다음 세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 양수: 바둑돌이 되고 싶은 자


양수를 보다 보면, '굿와이프'의 신입 변호사 '이준호'(이원근 분)란 캐릭터가 생각난다.
세대 차이. 경험의 차이. "하고자 하는 것"과 "되고자 하는 것"의 차이.


이번 3, 4화에서 양수는 자신의 출세와, 조조를 죽이려 한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심지어 사마의를 죽이려는 계략까지 꾸민다. 사마의를 칼로 찌른 뒤에는 비명을 지르며 운다.  다시 알고 보니 순욱과 사마의의 계략에 역으로 걸린 것을 알았을 때 뒤늦게 발악하는 그의 모습은 참으로 추하다.


그렇지만 그는 뒤이은 순욱과의 대화에서 평면적인 악역이 아님을 드러낸다. 사마의 가문은 결코 무고하지 않으며, 사공(조조)을 죽이려 한 건 매우 큰 죄라고. 자신의 아버지도 한나라의 충신인데 나의 아버지는 누가 지키냐고. 아버지를 위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사공의 사람이 되려 한다. 좋은 새는 나무를 가려서 둥지를 튼다면서.


순욱은 양수의 항변을 듣고 말한다.


나아가긴 쉬우나 균형을 잡긴 어렵고, 사람을 죽이긴 쉬우나 구하긴 어렵네. 자네는 자네의 총명함으로 난세의 형국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보나? 절대 그렇지 않네. 자네나 나나 결국은 수단에 불과해. 그들의 손에 놓인 바둑돌일 뿐이야.

저 순욱의 말에 대한 대답이 바로 저 위의 이미지에 있는 "작은 바둑돌도 큰일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 순간부터 나는 양수를 미워할 수 없었다.

나는 이제 회사원이지만, 불과 5년 전만 해도 취업준비생이었다. 노예라도 좋으니 제발 취업이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마음속에 되뇌고 또 되뇌었다. 번듯한 회사원이 되고 싶었으니까. 큰 그림을 보라고? 결국 나중엔 다 잘될 거라고? 당장 써주질 않는데 어차피 그런 이야기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우리 2030 세대 상당수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보다 "무엇이 될 수 있는가?"는 훨씬 더 절박하다.

무엇도 되기 쉽지 않은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순욱은 양수에게 "어떤 바둑을 두어야 할지 잘 생각해봐."라고 충고한 것이다.

양수는 순욱에게 말한 것이다. "일단 바둑판에 놓일 수 있어야" 뭐라도 할 수 있다고.

무능한 황제의 충신은 아무것도 못하지만, 사공의 바둑돌은 많은 것을 할 수 있다고.


양수에게 순욱은 한나라의 충신이면서도 '사공이 가장 아끼는 바둑돌'이었다.
그렇기에 순욱의 충고는 지극히 옳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칫 "꼰대의 참견"이 될 수 있는 것이다.

586세대와 2030 세대의 간극이라고 해도 딱히 틀린 거 같진 않다.


양수는 스스로를 '좋은 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사실을 천하와 사공(조조)에게 인정받고 싶어 한다.

흔히 말하듯 정치는 "무엇을 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지만, 정치에서 올바른 태도를 갖는다고 하여 항상 잘되는 건 아니다. 순욱의 이후를 보면 답이 나온다. 쉽지 않은 문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양수와 같이 "무엇이 될 것인가, 어디까지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이 과연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까? 잘 모르겠다. 어디까지 될지를 고민하는 것은 사실 너무나 흔한 우리네 모습이긴 하다. 합격에 기뻐하고, 취업에 기뻐하며, 승진에 기뻐하면서 갈수록 평가에 집착하게 되는 우리들. 이것은 비단 취직걱정을 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정치를 하고 싶어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흔히 빠지는 함정이기도 하다.


내가 무엇을 하느냐보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더 중요해질수록 내 삶, 내 일이 아니게 된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누구보다 열심히 함에도 불구하고.



2. "다음 세대"

많이 가져야 다음 사람을 준비할 수 있다.

권력을 가진 자는 늘 더 많은 권력을 탐하고 그런 자신의 "자격"을 과신한다.

그런 사람, 그런 세력은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자신의 집권 이후를 이끌 다음 세력을 준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권불십년이란 말은 결코 헛된 말이 아니다.


그럼에도 '다음 사람', '다음 세대'를 준비할 수 있는 사람과 세력도 결국은 대부분 자원이 많은 쪽이다.

자원이 없었던 유비의 경우를 보자.


지난 2화에서 유비는 "의대조"를 받았다고 천하에 공표한다.

삼국지연의는 이를 자못 아름답게 그리지만, 사실 이 드라마에서 보듯 현실은 갈급해진 상황에서 자신의 '명분'을 취하기 위함이었고, 이로 인해 동승 등의 거사(?)는 불가피하게 빠르게 시도되어야 했다. 결과적으로 유비는 수도에 있는 자신의 우호세력을 깡그리 몰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만약 유비에게 자원과 여유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자원이 많을수록 정보도 많이 들어오고, 정보가 많을수록 대국을 볼 수 있다.

미래를 위한 비전을 준비하고, 다음 세대를 키우는 것도 결국 부익부 빈익빈인 것이다.


정치는 종교가 아니므로, '다음 세대'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없다면 '다음'이 될 사람들은 떠날 수밖에 없다.

적절한 관심과 지원 없이 젊은 사람들을 남기기 위해서는 결국 정치의 종교화에 기댈 수밖에 없다.

자신들의 옳음을 절대화하고,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세상이 진보할 수밖에 없다고.

언젠가는 세상이 너희를 알아줄 테니까 그때까지 헌신하라고.


이 종교화는 그 정치세력의 힘과 크기, 시야에 반비례한다. 종교화가 극의에 달하면 성당기사단과 같이 일종의 비밀결사가 되기도 한다. 흔히 말하는 '비선', '언더 조직'같은 것.


"그 사람 쓸 만해?"와 같은 말은 그래서 함부로 할 수 없는 말이다.

쓸만한 사람이 주변에 없다면, 자신의 불행을 한탄할 게 아니라 평소에 그 자신과 주변 세력이 미래를 위해,

다음을 위해 무엇을 준비했는지 곰곰이 고민해볼 일이다.


조조와 곽가는 원소와의 전쟁이라는 일전을 앞두고도 "다음 세대"의 양성을 고민하고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급하다고 해서 "다음 세대"를 잊지 않는다. 정치가의 안목인가? 그저 자원이 많아서 시야가 넓어진 탓인가? 곱씹을 대목이다.



3. "작은 비밀을 가진 부부": 정치가와 참모

"작은 비밀"
민간의 평범한 부부들도 평소엔 작은 비밀을 갖지만, 큰일이 닥쳤을 때는 한 마음이 되는 법이오. 그대와 나도 마찬가지지.
상서령이 내 맘을 알아주니 더 한이 없소.
(곽가에게) 지금은 마음 놓고 허도를 맡길 사람이 상서령밖에 없소.

정치는 늘 조직이다. 정치는 갈등을 전면에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선수", 정치인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혹은 그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바로 정치인의 참모다. 참모가 어떤 사람인가, 참모를 누굴 쓰느냐, 참모와 얼마나 의기투합 하느냐에 따라 그 정치인의 방향이 결정된다. 정치는 결코 혼자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인은 참모에게 의존한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일수록 그에게 의지하게 된다.


그 반대급부로 정치인도 참모에게 요구한다. Royalty를.


"충신불사이군"은 신하의 마음가짐이 아니다.

유학에서 신하의 도리라고 이야기하는 이 경구는 군주의 바람이며 신하의 생존을 위한 가르침일 뿐이다.


조조와 순욱은 군신의 관계다. 하지만 순욱은 언제나 마음속에 "한나라의 충신"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다. 조조의 입장에서는 "두 마음"을 가진 셈.

 이것은 신뢰하는 '부부'간의 '작은 비밀'인 것이다. 그러나 민간의 평범한 부부들에게 이 '작은 비밀'이 비밀일 수 있는 건, 그 비밀을 파헤치겠다고 서로 덤비는 순간, 그 관계가 지속될 수 없음을 서로가 알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너무나 아끼는 사람이면 더더군다나 그렇다.


군신관계를 나타내는 옛날과 지금은 다를지도 모른다? 별로 그렇지 않다.


"정당은 현대의 군주"라고 했던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에 따라, 이 드라마에서 한나라를 '정당'에, 조조를 정치인에, 순욱을 참모에 대입해서 생각해보자. 우리는 늘 "당성"을 강조하고, "이념"과 "신념"에 따른 정치를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당정치가 중요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보통 한 가지 간과하는 것은, 정당은 어떤 갈등유형들에 대한 일련의 대처방식들을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 구성체" 정도로 기능할 뿐이지, 보통 그 정당을 구성하는 것은 결국 정치인과 참모, 그리고 그들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당원과 지지자들로 이뤄진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당의 성격은 적지 않은 경우 인물이나 집단을 중심으로 변모할 수 있다. 보수당이라고 생각했던 당이 어느새 진보정당에 가깝게 재편되기도 하고, 진보라고 스스로 규정짓던 쪽이 언제부턴가 더 이상 진보정당의 성질을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피터 메이어의 <정당과 정당체계>에서 말하듯, 정당체제는 한 나라의 사회가 현출 하거나 잠재하는 갈등을 최적화해 표현하려는 성질을 갖고 있어서, 정당들은 끊임없이 한 사회의 갈등에 적응하면서 변화한다. 그리고 이 변화는 정당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는 것이다. 정치인과 참모들이 어떤 갈등을 조직화하고 대변하느냐에 따라 정당의 모습은 더 공고해지기도 하고, 달라지기도 한다.


정치인과 참모가 정당을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가끔 동상이몽이 발생한다. 즉 정치인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사고하는데 반해, 참모는 그 정치인보다 자신이 속한 "당"에 충성하면서, 그 "당"에 필요하기 때문에 정치인을 모시는 경우다. (이런 경우, 적지 않은 확률로 여기에서의 "당"은 자신, 참모 스스로가 생각하는 "당의 이상향"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그 누구도 아닌 참모 스스로 인식하는 당에 대한 지평.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정치인과 참모의 "공통 지평"에 균열이 간 상황이다.)


인간적인 슬픔과 애통함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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