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드로 보는 정치썰 - <사마의: 최후의 승자> 제갈량 예고편을 보고
아래의 글은 작년에 한창 <사마의:미완의 책사>를 다 보고 나서 2부를 기다리며 데굴데굴하다가 찾은 2부 <사마의: 최후의 승자> 제갈량 예고편을 보고 쓴 글이다. <미완의 책사> 리뷰를 쓰기 전에 이 드라마에 대한 리뷰를 한 곳에 모아놓는 의미로 여기에 이 글을 옮겨 놓는다. 이 드라마가 4월에서야 나온다는 데에 매우 애도...
https://www.youtube.com/watch?v=Ygj3eVBcjj8
이 예고편을 보면 한 2분 48초에서 3분쯤에 제갈량은 눈물을 흘리며 피를 토한다. 오나라의 협공이 실패했기 때문인지, 관흥이 죽었을 때인지, 유선이 총퇴각을 명해서 장수들이 물러날 수 없다고 집단 항명을 해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혼자 남았을 때 피를 토한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눈물과 피는 또한 감동적이다.
3분이 지나서 제갈량의 육성이 나온다.
"나는 선제의 유지를 받들어 하루도 쉰 적이 없고 한 순간도 중원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지 않은 적이 없다.
하루라도 멈추지 않겠다."
여기에 사마의는
"내가 당신보다 나은 단 한 가지가 있다면 그건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오직 하나의 부탁, 그것 때문에 이미 다 망한 나라를 왜 회복시키려 하는가?"
라고 대꾸한다.
제갈량이라고 해서 그걸 모를까. 한나라가 이미 다 망했음을.
사마의와 제갈량은 당고의 금, 환영의 시기에 한나라에 충성한 사람이 아니다.
순욱은 160년대 생이고, 청류파를 자임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들은 그게 아니었으니까.
내가 주목하는 것은 제갈량의 "의지"다.
그의 유년기는 조조가 서주에서 20만 명을 "잔륙/갱살"(진수 삼국지의 표현)할 때 멈춰야만 했다.
서주에서 일가족이 피난하면서 형은 양주(오)로 출사 하러 가고, 자신은 형주에서 공부를 했던 것이다.
조조에 대한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당연히 억울하고 분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공부를 했다.
그렇게 공부하길 10여 년, 자신에게 삼고초려하면서 나타난 유비는 그에게 어떤 사람이었을까.
유비와 함께 했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감정은 더 이상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공, 나아가 천하를 위한 "대의명분"이 되었다.
선제의 부탁 한마디에 대한 "집착"은 그래서 이해가 간다.
제갈량은 "장군이 아닐 때의" 조조에게 가족이 학살을 당했지만, (사마의: 미완의 책사의 표현)
사마의는 "천하의 큰 그림을 보는 장군"일 때 조조를 만났다.
그 차이가 누군가에게 집착을 만들어내고, 만들어내지 않았다.
왜 무너진 나라에 대해 집착하냐고 사마의가 이야기할 때, 다시 제갈량은 말을 받는다.
나는 단지 한의 이름을 회복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바람, 세상의 화목을 회복하려는 것이오.
북벌로 옹양의 백성들을 매년 어지럽게 한 게 누구냐고 하지 말자. 나는 저 "세상의 화목을 회복하겠다."라는 말이야말로 그가 '서주에서의 기억'을 잊지 않았음이 표현된 것으로 봤다.
세상에는 많은 대의명분이 있지만, 그 천하를 위한 대의명분의 근원에는 결국 자신의 경험이 있다.
자신의 뼈저린 경험과 명분이 합치되었을 때, 그 명분은 반드시 이루고 싶은 무엇이 된다.
그럼에도 제갈량은 피를 토하고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 그 집착이 이뤄질 수 없는 환경 때문에.
사마의는 말한다. "그가 무제처럼 천하를 호령하려 했다면 신은 감히 그와 일전을 겨룰 수 없었을 것."
그의 뜻, 세상의 화목을 위해 해야 할 일은 사실 세상의 화목을 해쳐왔던 조조가 되는 길이었다.
선제의 부탁, "내 아들이 황제의 재목이 아니라면 그대가 제위에 올라 한을 회복해주시오."은,
그래서 따를 수 없는 명령이었다.
조조와 그 유산을 멸하고 "세상의 화목"을 회복하는 길을 위해 조조가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사마의는 그 약점을 파고들었기에 여인의 옷을 제갈량이 보내자 옷을 입고 춤을 출 수 있었다.
그때 한 3초간 짧게 지나간 제갈량의 슬픈 얼굴은 바로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의 상황 때문이었을 것이다.
유년기의 제갈량에게 조조는 괴물이었을 게다.
북벌 당시 제갈량의 정치적 선택들은 모두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질주한 길이었다.
그래서 모든 장수가 퇴각해선 안된다고 하는데도 퇴각을 선택한 것이다.
흔히 우리는 들을 수 있다. "괴물을 죽이기 위해 괴물이 된다."는 말을.
제갈량의 피와 눈물에 내가 감동을 느낀 것은
그가 '사람인 채로' 괴물을 없애기 위해 일생동안 노력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선택들이 때론 정답이 아닌 걸 알면서도, 혹은 정답이었음에도 하늘의 뜻을 얻지 못했던지 끝내 원하는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상황들. 보통의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서 점점 '괴물의 길'로 들어가는 데, 그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스트레스를 받아 눈물과 피를 쏟을지언정.
그것은 숭고함이다. 자신의 삶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자신이 처음 세운 "뜻"에 대한 존중이기에 숭고하다.
'몸과 마음이 다해 몸이 부서질 때까지 노력해 죽음에 이르러 이를 그만두리라.'
(鞠躬盡膵 死而後已국궁 진췌 사이후이)는 유명한 글귀가 이 영상에서도 나오는데,
사마의는 "이것이 그의 집착이었구나. 천하에 다시없을 기재로다."라고 말한다.
'선생'. 그는 선생이라고 불릴 이유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