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당의 누군가가 이준석 당 대표에게 "시험으로 세상을 바꾸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시험지가 구조적 불평등을 겪는 모두에게 어떻게 공정한 기회를 제공할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고 들었다. 또다른 누군가는 "출발선이 다른 현실을 삭제한 이야기"라고도 비판했다고 들었다.
사실 나는 그 사람들이나 그 사람들이 몸담고 있는 세력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 않다. 다만 나는 오히려 이준석 대표를 싫어하는, 또는 싫어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고작 그런 것이 아니었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말꼬리잡기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기 때문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애초에 공정이란 개념은 차별적 분배를 수용하기 위한 "Fair"한 분배결정 체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공정이란 말과 개념은 필연적으로 승패가 나뉘고 서열이 나뉜다. 아무리 공정해봤자 공정성의 본질은 어쩌지 못한다.
그럼 불공정한게 낫냐? 뭐 이런 말을 하려는 것도 아니요, 우리가 조국이다! 라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소위 이준석의 반대편에 있는 세력이 진보이기 위해 왜 그들과 똑같이 공정성을 말하고, 어떻게 공정하냐만을 말하는 지가 의문이다.
공정하다라는 것은 당연한 가치다. 우리 사회에서 보수, 우파라는 사람들도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할 수 있다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부터 배워나가야 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공정성이 과연 공정한가?"라고 자꾸 말꼬리잡고 늘어지고, 되뇌는 것이 속좁아 보이는 것을 넘어 불편하기까지 한 것은, 나의 상대방이 이 사회 안에서 유효하고 올바른 보편적 가치를 "추구할리 없다!"라는 생각을 저변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저쪽 말은 반대하는 게 국룰"이란 말이 웬지 익숙해서 그런 것이라면, 그 익숙함의 의미는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가 여전히 더욱 성숙해 나가야 한다는 것일 게다. 그런데 만약 그것도 아니라면?
공정이라는 화두에 대해 "진짜 공정해?" "공정하지 않다." 류의 반론이 먼저 나오는 이유는, 공정이 최우선적인 가치임을 양대 세력이 모두 공유하고 있기에 그렇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모르겠다.
내가 지지하는 정치세력, 내가 함께 일익을 담당하고 뭔가 돕고 싶은 정치세력은 공정성은 알겠고, 미래 대안으로 "공정으로 용인될 수 있는 차별의 정도"는 어느 정도인가? 를 논쟁의 화두로 제시했으면 좋겠다.
과거 어떤 사람이 "국회의원 월급을 최저임금의 5배로 연동시키자."는 제안을 입법발의했다. 나는 그걸 보고 참 포퓰리즘적이고, 외려 정치혐오를 조장하는 법안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최저임금의 5배"는 그들이 만들어야 하는 세상의 용인될 수 있는 차별의 최대치인가?
막말로 좌파가 용인할 수 있는 차별의 정도와 우파가 용인할 수 있는 차별의 정도가 다를 것이다. 공정성은 "차별의 수용성"을 다투는 것이기 때문에, 이견이 있을 수 없고, 억지로 만들면 십중팔구는 이전투구가 되버린다. 그러나 공정성으로 만들어지는 차별의 정도에 대한 용인 수준은 사람마다, 집단마다, 공동체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용인되는 차별의 수준에 따라 Affirmative Action도 도입될 수 있는 것이다. 이른바 "할당제"는 공정성과 함께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공정성이 작동하고 있는 결과의 재배치 과정에서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용인될 수 있는 차별의 "선"이 우리 사회에서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논의를 제기할 수 있는 집단이 이준석 반대편의 주류였으면 좋겠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가령 스웨덴의 "인민의 집" 모델은 앞서 언급한 누군가가 말한 "구조적 불평등"을 겪는 발달장애인들에게 이른바 "단종법"을 강요했다. 이 법은 1935년 사회민주당 정부가 통과시켰다. 덴마크 사회민주당의 복지국가체제의 설계자 칼 크리스티앙 스테잉게는 보편적 복지국가의 기본원리가 "모두가 기여하고 모두가 누린다"는 대원칙에 근거할 때, "기여하지 못하는 자"들은 줄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전제 하에 1924년 '거세와 단종수술을 위한 위원회'를 구성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차별과 배제는 이른바 우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는 것, 그리고 좌든 우든 치열한 논쟁과 공방전은 대개 "공정성"이란 가치 자체가 아니라 정당화하고 용인될 수 있는 차별의 정도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전선에서 벌어진다는 것이다.
"최저임금 5배"가 우리 사회가 용인할 수 있는 차별의 최대치인가?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찔러보기 식 선명성 경쟁이 오히려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논의의 수준을 정체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차별금지법, 공정성, 할당제는 모두 어느 정도 연결된 의제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공정한 경쟁을 통해 나타나는 차별 중 어떤 것이 금지되고 어떤 것이 용인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가 빠진 채로 차별금지법과 공정성-할당제 의제는 각각 따로 놀고 있다.
어떤 차별을 금지해야 하는지가 아니라,
"어떤 차별을 용인해야 하는가"가 이준석 대표와 맞서는 반대편의 주논의가 되었으면 한다. 용인하고 수용해야 될 차별의 대상이 아닌 것은 원칙적으로 모두 금지되거나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차별금지법과 할당제는 그런 논의 안에서 일정한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