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사랑에 대한 영화
#자산어보 후기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하염없이 눈물이 나왔다.
"버텨라."는 정조의 말은, 어쩌면 그 자체가 그 누구도 버텨내지 못한다는 복선이었을까.
버티라는 말은 사실은, 현대의 우리에게 사회생활의 나에게 일상적으로 찾아드는 존재에 대한 배반을 버티라는 말일 것이다. 이 영화의 창대가 그러했듯이.
자신의 주체를 구성했던 이념의 실현, 존재의 구현이었던 청운의 꿈이야말로
현실속에서는 자신이 여지껏 형성해온 존재를 배반해오는 길이 아니었던가.
정약전은 유배생활을 버텨냈지만, 끝내 동생과 같이 풀려나지는 못했다. 임금도 필요없는 세상을 꿈꿨던 그도 "중히 쓰임"을 기다리다가 신유박해를 맞이하였고, 흑산도에 유배되었다.
"주자는 힘이 세구나."
초반부의 명대사로 오래 여운이 남는 말이다.
"상놈의 자식" 창대가 '사학'(邪學, 사악한 학문)을 욕하며 성리학의 도리를 말할 때 약전의 대사지만,
약전의 회상 속에서 그 말은 전혀 다른 용법으로 쓰였다.
솔직하게 왜 말을 못하냐. 그냥 공부해서 출세하고 싶다고 하면 되지. 란 말.
사실은 그 말만큼 잔인한 말도 없다.
내가 00이 되었으니 이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겠다는 생각.
내가 하면 잘 할 수 있을거야. 내가 위치한 곳에서부터 천천히, 서서히 바꿔 나갈거야 라는 생각.
물론 결과적으로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이야말로 여태까지 배워왔고, 형성해왔던 그의 세계관을 지키는 일이었다.
성리학 공부의 본질은 결국 청운의 꿈, 속세의 공명을 실현하는 권력담론이 아니었던가.
수신하여 비로소 제가할 수 있고, 수신제가함이 비로소 치국할 수 있으니, 치국을 하여 비로소 평천하할 수 있다는 것이 유학의 원리라 한다면, "충과 효"를 위해 살아가는 선비로서의 배움의 "실천"은 결국 제 식구들을 살리기 위한 '제가', 그리고 '치국'을 함께 할 수 있는 일, 바로 "세상에 나오는"(出世) 일일 수밖에 없었다.
배운 대로 살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오죽 불우했을까.
나는 이렇게 재능있는 사람인데. 나는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인데.
대체 내가 왜.
"뭍에 가면 좋겠지?" 라는 아내의 말에 결정적으로 창대가 움직였던 건, 여지껏 갈고 닦아 "수신"해온 뒤에 식구들을 챙겨 집안을 안정(제가)시키고자 하는 길이 맞닿아있었기 때문이다. "修身齊家治國平天下"는 주희가 새로 편찬한 "大學"에 나오는 내용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존재론적 실천은 세상에 나온 이래, 끊임없이 세상에서 버티고 버티기 위해
자신이 가고 싶어했던 "목민심서"의 길을 철저히 버려야만 계속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아전들과 창대의 술자리가 오늘날의 갓 임관한 위관장교와 부사관들의 술자리, 또는 갓 입사한 젊은 경력직 실장과 터줏대감인 실, 국원들의 회식자리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드는 것.
그걸 "버티는 것"은 사실은 성리학이 썩어서가 아니고, 유학이란 권력담론 자체의 속성이기도 하고, "식구들을 책임져야 하는" 현실의 무게이기도 했다.
배운대로 열심히 살아왔는데, 왜 이렇게 세상은 나를 힘들게 할까.
제정신으로 살고 내 존재를 지키기 위해서는 내 존재의 다른 한켠을 배반해야 하는건가.
창대는 자신이 글공부를 통해 배워온 이상을 저버릴 수 없어서 아전을 공격했지만,
사실은 "식구들을 지키고", "임금의 윤음을 대리"하는 목민관의 꿈을 버림으로써 치국을 포기했고, 사실은 그로 인해 "제가", 집안의 안정마저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어느 선택이든 자신의 존재 한 켠을 배반할 수밖에 없는 상황.
자신에게 책임지기 위해 자신을 배신해야 하는 그 상황.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계속 울음이 나왔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는 돌아가는 배에서 말한다. "지는 흑산이 좋아유."
좋아서 그런 말을 했겠는가.
자산어보는 존재론과 사랑에 대한 영화이다.
오늘 아내와 같이 봤다. 아마 아내와 곧 주중에 다시 보러 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