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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성민 노무사 Aug 07. 2021

<사마의: 미완의 책사> 11,12화 리뷰

중드로 보는 정치썰 - 사마의: 미완의 리뷰 (6)

#1.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양수는 조비의 노복들을 매수하여 조비의 심복들이 불경죄를 저지른 것을 조조에게 일러바칠 수 있었다. 그런 비열한 수에 대해 양수는 말한다. "우리같은 지식인들이 이런 비열한 수를 쓰다니 부끄러울 따름이다."


조식이 "시험"에 혼란스러워 할 때, 그는 말한다. "왜 내가 흰 옷을 입고 다니는 지 아느냐! 마음만은! 내가 깨끗했다라는 것을 늘 다짐하기 위해서다!"라고.


그러나 정치에서 선의만큼 부질없는 것이 또 있을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라는 말만큼 부질없는 말이 또 어디 있는가. 선택, 행동의 과정, 그리고 그 결과. 그것만이 정치로 설명될 수 있을 뿐이다.

미사여구가 많으면 "왜 이렇게 혓바닥이 길지?"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번 한번 뿐", "다신 이러지 않겠다."라고 하는 사람치고 그때만 하는 사람을 별로 본 적이 없다.


정치는 결과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다만, 정치가 다른 분야와 다른 점은 이 결과는 철저히 "과정" 속에서 얻어진 결과라는 것이다.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그 "과정"이 올바르지 못하다면, 언젠가는 사단이 나게 되어 있다.

정치란, 한치 앞이 아니라 열 수 앞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무대다.


그렇지 않은 정치는 결국 스스로를 변명하게 된다.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스스로를 배신하게 된다.


정치는 "바른 다스림", 민심을 얻기 위한 과정이기에 도덕과 윤리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스스로를 배반하는 정치를 하면 할 수록, 도덕과 윤리의 자리에 "합법"이 들어서게 된다.  

그리고 속으로 되뇌일 것이다. "개혁을 위한 나의 헌신은 역사가 알아줄 꺼"라고.


"우리같은 지식인"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누구인가.


#2. 죽은 자는 이길 수 없다.



처음 이장면을 봤을 때는 그저 조조의 곽가에 대한 그리움만 느껴졌다. 곽가에 대한 부러움, 그리고 조조에 대한 어떤, 가슴 속 뜨거운 무엇인가가 느껴졌다. 죽은 곽가의 노선을 그대로 따르는 것. 그렇게 곽가는 주군의 가슴 속에서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두 번째 봤을 때는 어떤 슬픔이 느껴졌다.

순욱은 "장자"를 세자로 책봉하라고 했고, 곽가는 "현자"를 세자로 책봉하라고 했다.


그리고 후계자 시험은 "현자"가 누구인지를 가리기 위해 치루는 것이다.

그리고 조조는 한마디 더 한다. "충이가 살아있었다면 이런 고민 안해도 됐을 텐데..."

똑똑한 막내가 살아있었다면, 그를 세자로 책봉했을 것이란 이야기다.


'산 자는 죽은 자와 경쟁할 수 없다.'


순욱은 더 이상 죽은 곽가와 지혜를 다툴 수 없고, 조비는 죽은 동생과 "적임자"의 자리를 다툴 수 없다.

조조에게 살아있는 순욱과 조비는 그저 죽은 자들 다음일 뿐이다. 순욱은 여기서 어떤 비애와 균열을 느꼈을 것이다. 순욱에게 조조는 자신의 노선이 아닌 곽가의 노선을 따르는 사람이고, 조조에게 순욱은 죽은 곽가의 노선을 따르는데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일 뿐인 것이다. 순욱의 노선은 그에게 무의미하다.


책사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메세지가 주군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다.

내 생각을 실현할 수 없는 높은 자리만큼 책사에게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


옛 드라마 정도전(2014)에서 이성계는 정몽주에게 일갈한다.

"나는 삼봉과 포은, 둘 다 내 양 옆에 끼고, 왕, 할꺼우다."


나는 이 발언이야말로 정몽주에게 가장 잔인한 발언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성계는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정몽주에게 이야기한 것이지만, 정몽주에게는 그것이 순수한 진심이었기에 훨씬 더 가혹했을 것이다.


정치에서 죽은 자에 얽매이는 것은 현실의 산자들에게는 고통스럽다.

죽은 자는 신비화되고, 성역화되고, 머릿속에서 나쁜 점은 잊혀진다.

조비의 고통과 조비와 조식의 골육상쟁은 결국 조조가 죽은 이의 노선을 그대로 따랐기에 벌어진 일이다.

누군가의 노선이 죽음을 통해 무오류의 신앙이 되어 산자들의 고통이 계속되는 정치,

우리에게도 낯선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3. 공정한 시험이란 무엇인가


"공정성"이 화두가 된 우리 사회에 이 드라마와 같은 시험은, 아마 참으로 "골때리는" 이야기일 것이다.

우리 시대에 화두가 되는 공정성은 "출발선"에 대한 논의가 대다수를 차지한다. 하지만 조조의 시험은 사실 그 명목상의 "출발선"이 하나도 의미가 없다. 명목상으론 조비와 조식을 시험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양수와 사마의를 시험하는 것이고(물론, 어떤 사람을 책사로 거느리고 있느냐가 현자를 가르는 의도가 있으니 여전히 조비와 조식을 시험하는 것일 게다.) 심지어 승패 자체도 중요한 게 아니었다. "시험 유의사항"에 나와 있는 것과 점수기준이 당락에 하나도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이다.


"공정성"의 잣대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미안한 이야기지만, 사실 우리 인생사 대부분의 일들이 이런 게 더 많다.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상대방과 소통하고 협상하고 싸우고 화해해야 한다. 정치를 할 수 있는 "자격시험"이란, 그래서 어떻게 보면 참으로 부질 없는 이야기다


양수와 사마의 모두 이 시험의 "승패"가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양수는 말한다. "우리의 싸움은 승패가 아니라 생사가 걸린 일"이라고.

사실 시험을 치르는 한국의 젊은 사람들 대부분이 이런 심정 아닐까. 나 또한 이런 감정을 느꼈다.



사마의는 말한다. 방법은 모르겠는데, 이치는 깨달았다고. "신하의 예와 자식된 도리"를 다 해야 한다고.

"승패 너머의 옳고 그름"을 봐야 한다고.


사실은, 난 이 장면을 몇 번을 돌려봤다.

"천하가 모두 승패에 신경쓸 때에도 옳고 그름을 더 염두에 두어야 한다"

라고 사마의가 조비에게 진언할 때, 난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기는 것보다 옳은 것을 생각하면, 옳은 것을 선택했을 때 과연 이길 수 있을 것인가? 상대가 더티하게 나오면, 그때도 옳은 것만을 생각해야 하는가? 정치 뿐만이 아니라 우리들 삶의 많은 영역이 사실은 그렇지 않은가.


이 장면은 사실 "정치를 왜 하는가?"에 대한 텍스트이다.

양수는 "천하를 제패할 수 있는 자"를 가려내는 게 이 시험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사마의는 "천하의 승패보다 옳은 것을 추구하는 자"를 가려내는 게 이 시험의 "Rule"이라고 판단했다.


정치인에는 두 부류가 있다.

뭔가가 되고 싶은 정치인. 그리고 뭔가가 하고 싶은 정치인.


구의원이 되고, 시의원이 되고, 구청장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고...도지사가 되고... 끝없는 상승욕구가 정치의 원동력인 사람이 있는 반면,

기후 변화에 대응하고자 하는 사람, 노동자의 인권을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 공정한 시장가치를 확립하고 싶은 사람..."뭔가를 하고 싶은 사람"들도 소수지만 존재한다.


물론, "하고 싶은 사람"이 늘상 옳은 것만을 선택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뭔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 잘 나가는 게 부아가 치밀어서 더욱 규칙을 어기려고 하는 "유혹"을 떨쳐내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왜 모르겠나.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흔들리는 건, 원칙을 지켜도 험한 꼴을 더 많이 당하기 때문일 것이다.


조비 또한 그 유혹이 있었는데, 이겨낸 것 아니겠나.


"천하가 염두에 두는 것" (승패) 보다 더 위에 있는 나만의 관점(옳고 그름)을 가진 자,

그런 사람이 정치를 할 수 있는 것이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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