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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성민 노무사 Dec 25. 2020

<사마의: 미완의 책사> 9,10화 리뷰

중드로 보는 정치썰 - 사마의: 미완의 리뷰 (5)

M.Weber는 말했다.


정치가가 가져야 할 매우 중요한 심리적 자질로서 균형적 판단은 내적 집중력과 평정 속에서 현실을 받아들이는 능력이자, 사물과 사람에 대해 거리를 둘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거리감의 상실'(Distanzlosigkeit)은 그 자체로서 정치가에게 치명적인 죄과이며, 미래의 지식인들이 거리감을 연마하지 못한 채 정치를 할 경우 정치적 무능력자로 비판받을 것이다.

- M.Weber, <Politik als Beruf> (소명으로서의 정치) 中


이번 화의 내용들은 정치적 거리감이 얼마나 중요한 지 일깨워주는 에피소드들이다.


#1. 임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상대방이 강요한 선택이 아닌, 자신의 결정을 만들어 나아가는 것, 어려운 문제다. 그래서 고달프다.
고조선의 시가, <공무도하가>가 왜 여기서 나오는지를 말하는 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조비와 사마의는 이 장면에서 고뇌한다. 급포를 3일 이내에 정말로 잡아오면, 아버지 조조와 대적하겠다는 뜻이 되고, 급포를 잡아오지 못하면 천하 사람들에게 조비가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정당성을 훼손하게 된다. 


사마의는 그에게 "한번 내디디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 이라고 말한다. 아버지와 맞서는 길이니까. 


그래서 사마의는 조비에게 말한다. 사실 당신은 이 강을 건너지 않아도 된다고. 핵심은 아버지와 대적하느냐, 맞서지 않느냐이며, 맞서지 않으면 된다고. 문학으로 먹고 사는 길을 택하셔도 된다. 그리고 말한다. 


조비는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정치적 소명"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세자의 자리를 포기하라고 강요할수록, 

그의 소명은 "아버지와 맞서지 않지만, 세자의 자리를 포기하지 않는 길"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죽지 않고 강을 건널 수 있는 길"을 찾는 것. 쉽지 않기에, "참으로 고달픈 길"인 것이다. 그 길은 쉽사리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야말로 베버가 말한 "균형적 판단"이 필요한 시기이다. 


균형적 판단Augenmass 에서 Augen은 영어로 eye라고 한다. 상황을 바라보는 안목이다. 균형적 판단은 상황에 대한 이해와 응용, 재구조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러한 균형적 판단을 할 수 있는 "거리감"을 상실하였을 때는 상대방의 '프레임'에 놀아나게 된다. 

물론, 복잡한 상황들은 늘 정치인들을 고뇌에 빠뜨리게 한다. 

뛰어난 인물, 존경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인물이 갑자기 곁에서 멀어져 "저 강"을 건너갈 때는

대개는 그러한 함정에 빠졌기 때문이다. 


"강을 건너가다 빠져 죽어라!"라는 악담과 저주에 결국 강요된 선택, 상대방이 원하는 '게임'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에게는 정치적 판단의 영역과 별개로 연민과 동정을 갖게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상대방의 게임을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안타깝고, 또 안타까운 일이다. 사람들은 그 사람의 상황을 바라봐주지 않는다. 

그저 "정치적 무능"과 "치명적 죄과"만을 보게될 뿐이다.


베버는 정치가의 3요소로 열정, 책임감, 균형적 판단을 말한다. 여기서 열정은 영어로 Passion이다.

"The PASSION of the Christ"의 그 passion이다. 


정치적 열정에는 늘 고통이 담겨 있다. 

수난과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열정이 책임감과 균형적 판단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사실 그 누구에게 수난과 고통을 감내하라고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


정치적 실망은 정치적 기대가 클수록 커지는 것이지만, 이를 별개로 하면 나의 임이 어떠한 강을 건너가든, 

"임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읊조리고 눈물 흘리며 그저 먼 발치에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2. 일개 장군의 시야, 천하를 품은 시야

거리감을 상실하지 말라는 주문이다.


사마의는 조비에게 "인의", "민심"을 통해 아버지와 대적하지 않으면서 아버지가 강요한 프레임으로부터 벗어나라고 충고한다. 조비는 그런 사마의에게 "과거 나의 아버지는 서주 사람들을 도륙하였는데 인의란 말이 통하겠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그때 사마의는 말한다.

과거의 승상은 일개 장군의 시야였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했지만,

지금의 승상은 천하를 품에 안았기 때문에 (抱負, 포부) 그러실 수 없다고.


그래서 사마의는 조비에게 주문한다.

대담하게 행동하라는 게 아니라, 대담하게 생각하시란 말입니다.

2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천하를 품은 아버지의 시야를 이해하고, 그와 맞서기 위해 아버지의 시야를 이해하고 염두해야 한다는 것과, 일개 장군의 시야가 아니라 천하를 품에 안은 시야로 대담하게 생각하라는 것. 


"대담한 행동"은 생각보다 고통스럽지 않다.

그러나 "대담한 생각"은 "늘"은 아니지만 거의 항상 고통스럽기 일쑤다. 정치적 "상식"을 벗어나서 사고하되, 정치적 "객관성"을 유지하라는 것이기에 그렇다. 이는 보편성을 추구하지는 말되, 보편성이 무엇인지 늘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과 같다.  이러한 균형감각을 유지하는 건 어떤 절실한 대의(큰 뜻)가 있어 그 뜻에 대한 헌신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베버는 그 대의에 의한 헌신을 바로 열정Passion이라 불렀다.


#3. 정치적 도구와 정치적 동지

말을 말로 다룰 때는 "말이 칼이 될 때"를 생각해야 한다.
출사의 순간
정치적 동반자를 얻는다는 것

사마의는 승상부의 마구간에 있었다. 조조에게 사마의는 정치적 동반자나 정치적 동지가 아니었다. 그저 정치적 "도구"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들을 걱정한다. 


"적로"란 말을 아냐고. 재능이 출중한 백마인데 그 주인을 죽이는 말이라고. 사마의가 적로가 될 수 있다고. 


조비가 조조에게 사마의를 데려가겠다고 말하는 장면,

그리고 사마의에게 "노비가 아니라 스승이자 벗을 찾는 것"이라고 말할 때, 관련된 장면들이 떠올랐다.


유비가 채모에게 쫓겨 단계 앞에 다다랐을 때, 적로에게 "힘을 내다오"라며 부탁할 때, 

그 순간의 적로는 유비의 동반자였다. 존중받은 적로는 힘을 내어 유비를 구했던 그 장면.


서서가 유비에게 "저 말은 주인을 죽이는 흉마이니, 장수 하나를 먼저 태워 그 장수를 죽게 하시고 타시면 별 탈이 없을 것." 이라고 진언하자 유비가 대노하며 자신이 탄 장면.


정치적 도구를 한 존재로 인정해줄 때, 정치적 동지이자 정치적 동반자로 인정해줄 때, 

그 도구는 도구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 


사마의가 책사에서 "최후의 승자"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결국 조비 이후 조조의 후손들은 그를 "정치적 동반자"가 아닌 "정치적 도구", 마굿간의 "말"로써만 생각하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말을 말로만 보고, 졸을 졸로만 볼 때, 우린 경계해야 한다.

"말이 칼이 될 때"를. 나의 말일지언정, 사람처럼, 동지로 대우하면 충성을 얻을 것이다.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그 칼에 베이지 않을 자신이 있어야만 할 것이다.


출처: 연합뉴스



#4. 창업의 순간


비유법의 끝판왕을 본 느낌이었다.


"이리 험한 산길"은 바로 정치판을 말함이다.

그래서 조비는 말한다. "그대 같이 신중한 사람이 험한 길인줄 알면서 왜 날 따라온 것이오?"

"떨어져 죽을 걱정을 하기보다, 함께 전력을 다해 최고에 올라야지 않겠소?"


그래서 사마의는 말한다. 산천을 품고, 날개를 펼쳐보겠다고.

천하를 품에 안아(포부)보겠다는 것이다.


창업의 순간은 늘 가슴벅찬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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