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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성민 노무사 Nov 26. 2020

<사마의: 미완의 책사> 7,8화 리뷰

중드로 보는 정치썰 - 사마의: 미완의 리뷰 (4)

기나긴 시험이 끝난 후, 오랜만에 <대군사사마의>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거의 2년여만에 다시 보는 7화와 8화, 감회가 새로웠다.


특히나 이번 에피소드들은 줄거리상으로는 둘 다 중요한데, 7화는 사마의의 조조 세력 합류에 대한 에피소드이고, 8화는 서서가 개입하여 마치 제갈량 - 유비를 이어주는 장치로 기능했던 것처럼 조비 - 사마의를 이어주는 장치로 기능하게 된다. 사실 전체 드라마 상에서는 8화야말로 중요한 에피소드이다. 조비와 사마의, 사마의와 급포가 본격적으로 이어지기 시작하면서, 혼례 이후 조비와 곽조의 감정선이 좀 더 서로간에 더욱 많이 그려지기 시작하는 에피소드이다.


저는...이 분 좋아합니다...곽조가 견복보다 압도적으로 이쁘다고 확신함.


하지만 정치적으로 본다면 7화에 좀 더 의미있는 장면이 많았다 할 것이다.


#1. 정치의 세계, 본심을 숨기는 역량에 관하여



이 드라마를 본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단순히 이 장면에 대해서 "명장면"이다, 조조와 사마의의 성격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라는 정도의 감상이 많은 것 같다. 물론 동의한다.


그런데, 저 자리는 무엇보다도 "출사"의 자리다. 

곽가는 조조에게 "사마의를 쓸 수 있다면 중용하고, 쓸 수 없다면 죽이라."고 유언을 남겼다.


죽느냐 사느냐, 어쩌면 중달은 "생계형 정치"를 위해 나아간 것이다. 

마치 신세계의 이정재가 경찰을 배신하고 싶지 않았지만, 끝내 깡패들의 우두머리가 되어야 했던 것처럼. 

"정치"란 것, "권력"이란 것은 마치 'Lords Of Rings'에 나오는 절대반지와도 같아서,

원하는 사람은 무수히 많고, 또 반지를 원했던 사람들이 반지를 끼면 골룸이 되는 게 태반이지만,

마치 운명처럼 결코 정치의 길을 원치 않았던 사람에게 아무리 피해도 다가오기도 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이 드라마에서 틈만 나오면 나오는 "tian yi"(天意)다.


정치를 하기 싫었는데 정치를 한다는 것. 이런 느낌이다.


그런 상황에서 조조는 "매의 눈과 낭고상"을 이야기했다. 무엇을 의미할까.


"내가 너를 경계해야 하겠느냐?" 

이런 의미라고 생각한다.


그때 사마의는 그저 고개를 조아릴 뿐이다. 경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당신이 주목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일 뿐이다.


조조가 바둑돌을 던지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곽가의 안목이 틀릴 리 없어. 어디 얼마나 총명한 자인지 볼까?

이 드라마에서 바둑돌, 바둑판은 중요한 의미로 쓰인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양수는 "바둑돌"도 천하를 흔들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부푼 이상을 가지고 움직인다. 반면 조조는 바둑판의 대국을 생각한다. 대국을 보며 판을 좌우할 수 있고, 흔들 수도 있고, 깽판을 놓을 수도 있는 존재다. 조조와 사마의의 대국에서 조조는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 


"投了", 돌을 던진다는 것은 "不計", 수를 계산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계산되지 않은 반응"을 유도할 때, 상대방은 어떻게 나올 것인가.


조조가 알아보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었다.

사마의가 뒤를 돌아보며 마침내 "매의 눈과 낭고의 상"을 보였을 때, 

조조의 웃음은 사실 이런 의미이다.


곽가의 눈은 틀리지 않았어.

그리고, 사마의는 "계산되지 않은 반응", "본심"을 조조의 눈 앞에서 드러냈다. 

이것만큼 조조의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곽가는 죽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신은 그의 속을 알 수 없습니다."


정치인이 언제나 가장 경계해야할 인물은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다. "불측의 상대"만큼 신용할 수 없고, 그래서 나를 불안에 떨게하는 상대는 없다. 조조에게 있어, 사마의는 그래서, 곽가의 안목으로 얻어낸, "재기 넘치는 유망주"였을 것이다.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아직은 자기 손아귀에 있는. 


바둑돌의 본심, 속마음을 볼 수 있는 존재. 사실은 속마음을 도저히 알 수 없는 상대만이, 대국의 "상대방"이 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수를 예측하는 AlphaGo가 두려운 것은 바로 이때문 아닌가.


재기 넘치는 모습이야말로, 사실은 미숙함이었으며, "계산되지 않은 반응"을 유도하는 상대의 수에 끝까지 "계산"을 하는 노회함이야말로 정치적 성숙함을 보여준다.


그래서 조조는 웃을 수 있고, 그래서 사마의는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날 수 있었다.

이 에피소드의 제일 명장면은 그래서 바로 다음 부분이다.


황도, 승상부의 한복판을 혼자 걸어 나오는 사마의, 정치 초년생의 고독과 각성을 나타낸다. 

 

정치 심장부의 복판에서 사마의는 쓸쓸히 홀로 걸어나온다. 

이 장면이야말로 한 인물에게 "정치란 무엇인가"란 생각을 하게끔 한다. 

홀로, 오롯이, 그러나 의연하게. 

정치 심장부를 한번 뒤돌아보고, 다시 의연하게 발길을 옮기는 사마의. 이 순간 그가 "대권"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그 순간마다 

사마의는 정치의 세계에서 어떤 무서움, 권력에 대한 자신의 갈망, 그리고 미숙함을 확인했을 것이다.


거울, 모니터링, "본심"을 숨기는 연습

그는 왜 거울을 샀을까?

자신의 모습을 모니터링하기 위해. 자신을 통제하기 위해. 

결국 이는 본심을 숨기고 통제하기 위함이다. "본심"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사람. 

여기서 이미 그는 바둑돌로 살고자 하지 않고 판을 움직이는, 

"대국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고자 함을 알 수 있다. 

대국을 바라보는 사람은 타인에게 수를 읽혀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대국을 추구하는 자는 그래서 표현의 자유를 잃어버리게 된다.

마음대로 말을 할 수 있고, 자신의 본심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은, 그래서 슬프다. 

아무도 그를 주목해주지 않고, 아무도 그를 불러주지 않는다는 뜻이니까. 대국을 읽어대도, 나의 관점은 그저 바둑판 바깥의 훈수질일 뿐이다. 나는 바둑돌도 아니고, 대국을 좌우하는 사람도 아닌 것이니까. 

그런 슬픔 속에서 많은 이들은 그저 바둑돌이라도 되어 바둑판에 끼고 싶어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마의는 거스름돈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꼭 무엇인가에 홀린듯이, 그는 거울이 있어야만 했다.

거울을 사는 돈은 정치에 이제 막 입문한 그에게 너무 저렴한 수업료였다.


#2. 양수, 순수한 이상주의자

"이상"을 위해 무엇이든 하는 사람, 양수.


이 드라마에서 양수는 사마의와 대결하는 악역, 빌런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양수야말로 이상주의자다. 그는 스스로 대국을 보는 눈을 굳이 추구하지 않는다.

"대국"은 승상이 추구하면 된다. 

왜냐하면, 바둑돌도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마의:미완의 책사 4화 中

꿈과 이상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집념.

그러나 그 이상에 걸리적거리면 너무 많은 사람이 다친다는 것. 사람들은 그런 양수를 보고 "빌런"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지만. 어쩌겠나. 우리 사회엔 사실 "양수"와 같은 사람을 칭송하고, 그와 같은 "이상주의자"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누군가의 이상에 걸리적거리면 "적폐"가 된다. 하지만 우리는 "적폐청산"에 열광하곤 한다. 

나의 군주에게 목표를 일깨우기 위해서는, 남의 과자를 뺏어먹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누가 감히 양수를 욕할 수 있을 것인가? 

"순수한 꿈", "진정성" 운운에 특히나 많은 감동을 받는 사람들이 있을 진대. 

자신의 원칙을 위해 타인의 원칙과 보편적인 Rule은 어길 수 있는 "이상주의". 

이것을 우리는 反민주주의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열정이 넘치는 운동권을 우리 사회는 늘 낭만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이상주의자"에게 "위대한 패배자" 등의 딱지를 붙인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안티 풋볼" 소릴 들을지라도 "이기는 축구"를 추구할 수 있는 사람이 더 목표지향적이라서 좋아하는 편이다. '전통적인 나의 모습'을 추구하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나의 모습을 포기하고 인내할 수 있으면서도 마침내 작은 승리를 적립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야말로 정치를 할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좋아할까?

그리고 드라마 속의 다음 장면에서, 희한하게도 우린 누구에게 감정을 이입할까?


사마의: 미완의 책사 7화 中


"정치"는 더러워하고, "운동"은 순수하고 깨끗해 한다.

하지만 정말 "정치의 자세"와 "운동의 자세"를 비교해보면, 사회적 순기능은 어느 태도에 더 있을 것인가?

판단은 뭇 사람에게 맡길까 한다.


#3. 공감이라는 것, 역량을 키운다는 것


사마의: 미완의 책사 8화 中


'승상부의 마굿간'이라는 곳.

꼭 필요한 곳이다. 관리들의 이동수단이기도 하고, 말은 천하재패의 수단이 되는 동물이다. 좋은 말을 알아보고, 말을 잘 길러내는 건 천하에 꼭 필요한 일이다. 누구도 그것이 필요하지 않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천하에 필요한 일을 반드시 내가 해야할까.


사마의가 마음이 편한 건 진담일 것이다. '하찮은 일'을 하는 그에게 더 이상 그 누구도 신경쓰지 않으니까.

조비의 채근함은 사실은 사마의 스스로에 대한 이야기다.


세상의 영웅들이 모두 천하를 구하겠다고 나서는데, 나는 여기서 허송세월만 보내고, 내 시간을 썩히고 있잖소. 정말 평생 여기서 말이나 돌볼 작정이오? 나와 갑시다.


조비는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면서 사마의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애원하지만,

사실 조비는 사마의 본인이 마음속 깊이 생각하는 스스로의 처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것이다. 

대국을 보는 눈이 있는데, 대국을 좌우할 수 없다는 것만큼 스스로에게 괴로운 일은 없다. 아무리 욕심을 버렸다고 해도, 어찌 하여 불끈불끈 끓어오르는 마음을 외면할 수 있을 것인가.


사마의는 승상부의 마굿간에서 같이 일하는 할배에게 스스럼없이 조조를 풍자할 수 있다. 

그에겐 표현의 자유가 있다. 

하지만 그는 그런 표현의 자유가, 문득문득 고통스러울 게다. "내 시간을 썩히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정치무대의 중앙으로 올라갔을 때, 쉽게 마주할 수 없는 여러 인간군상, 취약한 사람들을 직접 볼 수 있다는 면에서, 백성의 삶을 바로 볼 수 있다는 면에서 그곳은 정치적 자산이 될 수도 있는 곳일 게다. 그것이 그가 마음을 편해하면서, 기꺼이 그곳에서 일을 하는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허송세월"을 보낸다는 느낌. 그것은 '세상의 영웅들이 모두 천하를 구하겠다고 나서는데', 내가 그들보다 못나지 않다는 걸, 나의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는 알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느낌이다. 


저런 새끼도 000을 하는데...

 이런 마음이, 사람이라면 어떻게 없을 수가 있겠는가?


사마의가 "말돌리지 않고 말씀드리겠다."고 한 이유는, 결국 조비가 그의 공감을 샀기 때문이다. 

공감을 얻어낸다는 것은 이다지도 중요한 일이다.


하찮아 보이는 커리어에서 역량을 키우고, 기회가 올 때까지 마음의 안정을 취하는 것.

어쩌면 그 자체만으로 정치를 꿈꾸는 자에게는, 큰 역량일 것이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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