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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성민 노무사 Mar 09. 2018

공동정범 리뷰

점심때 친한 동생과 밥 먹다가 이충연 씨에 대한 평가가 또다시 엇갈리는 걸 보고,

아니 왜...? 란 생각과 함께 지난번 썼던 영화 리뷰를 업데이트해본다.


여러분 공동정범 꼭 보세요 두 번 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8i-hW5XI1Ag


영화 끝나고 인사하고 내가 "이충연 위원장이 정말 훌륭한 사람이었네."라고 하니까 친구가 나보고 너는 왠지 그럴 거 같긴 했는데 그런 게 바로 감정맹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든 거 아니냐.  

라고 하길래. 이건 그 친구의 특이한 감각이겠거니 하고 여자친구와 함께 내 여자친구의 어릴 적 살았던 동네로 향했다. 그리고 여자친구가 24년 전까지 살았다고 했던 그곳은, 23년 전 지어진 아파트만 있었을 뿐이었다. 재개발 영화를 보고 재개발된 거대한 아파트 숲을 본 것.


이후에 공동정범과 관련된 몇몇 게시물들을 봤는데, 내 생각과는 좀 다른 감상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논란이 된 한 인물", "한 사람을 너무 가해자로 만드는 것 아니냐"라는 등의 이야기들이 꽤 있었다.

내가 사람들의 감상과 다르게 느끼는 것 같아, 이 부분에 대해 기록을 남겨두려는 마음을 갖게 됐다.


'논란이 된 인물'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든 사람', '가해자로 만들어진'

그런 느낌을 갖는 분들에게 있어서 "피해자"란 건,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

피해자는 누구일까, 아니 누구여야 하는가.


(물론, 이 영화는 '주범'과 '종범'으로 기소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굳이 '공동정범'으로 기소를 했던 국가의 폭력, 통상적인 철거 투쟁의 공식(?)을 따르지 않았던 이례적인 국가폭력과 그 이후의 처리 상황에 대한 책임자의 무책임과 국가의 폭력에 우리가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 영화의 주제의식은. 이런 피해자들의 대립을 만든 그 자체가 바로 가장 큰 국가의 폭력임을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근데 일단 그건 차치하고.)


나는 이 영화 속에서 이충연 씨가 다소 격하게 말하는 그 상황과 감정에 오히려 이입해서 봤다. 그런 격한 발언들이야말로, 아파하고 있는 거다. 그리고 아프고 억울한 상황에서도 정말 정신줄 놓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그야말로 발버둥 치고 있는 상황으로 보였다. 너무 아파서, 생각하면 죽을 것 같아서 외면하고 싶고, 그래도 그러면 안되니까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제한된 옵션들 중에서 최선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과 감정. 난 그런 게 느껴져서 너무 아... 하면서 봤다. 그리고 보면, 정서적으로도 사실 그렇게 다른 피해자 분들과는 잘 맞지는 않았던 것 같다. 술 마실 때도, 사람은 크게 3 부류가 있지 않은가. 슬프면 술을 찾는 사람과 기쁘면 술을 찾는 사람. 그리고 슬플 때는 절대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 이충연 씨는 내가 보기에 3번째다. 나도 3번째에 가깝다. 자기 연민에 빠지기엔, 아픈 상황을 한탄하고 있기에는 내가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권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믿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뿐이다. 나는 내 주변 사람들에게 책임질 것도 많고, 기대받는 것도 많다. 나는 그런 것들을 갚아야 한다. 살면서. 그런 나의 삶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한 이들에 대한 채무가 더해진 것이다. 나의 삶을 허송하는 것은 그 빚을 늘리는 것뿐이다. 아마 이충연 씨도 그런 비슷한 마음이었을 거 같다. 그래서, 그게 너무 공감 가서 계속 감정 이입하면서 봤다.


다른 피해자 분들을 탓하는 것은 아니다. 화도 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보긴 했지만, 그게 그분들 탓은 아니고... 특히 김주환 씨는 이 영화에서 가장 착하고 여려서, 그래서 너무 안타깝게 느껴진다. 어쩌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른바 '피해자 서사'에 가장 걸맞은 캐릭터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영화에 나오는 모두는 "용산의 피해자"이고, 그 개개인이 얼마나 피해자답게 보이냐는 사실 큰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린 여전히 "착함"과 "연대"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어쩌나. 모든 피해자가 그러지 않고, 그럴 수 없음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피해의 해결에 보다 더 빠르게 다가설 수 있다.


이충연 씨가 전화라도 해줬더라면...이라는 아쉬움을 다른 피해자분들이 이야기할 때, 그건 너무 당연한 이야기다. 근데 다른 제삼자들이 그걸 말하면서 이충연 씨한테 뭐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당연한 것, 할 수 없는 물리적, 정서적, 감정적 상황이었을 테니까. 그걸 이해 못하는 건 감정맹이 아닌가? 란 생각도 들었다. (ㅇㄱ아 이거 너한테 빡쳐서 말하는 건 아님 ㅋ) 사실 그런 상황에서 피해자들의 연대를 이충연 씨가 꾀할 수 있었다면, 딱히 용산참사 진상규명위원회의 역할이나 박래군 씨의 역할도 필요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건 거의 정치인 급이지.


아마 이 영화의 뒤에도, 참사의 진실이 밝혀진다 해도, 그들은 웃으면서 "동지적 연대"를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이충연 씨와 다른 분들의 정서상의 차이뿐만 아니라, 세대 간의 차이도 어느 정도 존재하는 것 같다는 느낌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영화 막바지에는 천주석 씨의 "차마 말 못할 기억"과 이충연 씨의 괴로운 고백이 만난다. 그리고 김창수 씨의 (사실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 이어진다. 서로의 갈등과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해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참사의 진실을 여전히 파헤쳐야겠다는 상기를 해나갈 수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오늘 이 영화를 보고 여자친구와 지인들 2~3명과 함께 꼭 용산의 #레아 에 가서 맥주라도 한두 잔 마시고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올해 내에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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