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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성민 노무사 Nov 22. 2020

개와 등대의 시간

퇴사

개와 등대의 시간 

부엉이애호가 


#1. …노예가 되어도 좋다!  


 2013년 11월 말, S사의 최종면접에서 떨어지고, 12월 초, K사의 최종면접에서 떨어졌다. 150개가 넘는 기업에 원서를 썼고, 그 후 내게 남았던 경험은 4번의 최종면접 경험… 떨어진 후, 다시 한번 심기일전하자고 다짐했었다. 내 마음 속에서 수도 없이 외쳤다. “노예가 되어도 좋다! 제발, 제발 사람 구실만 할 수 있게만…! 나를 노예로 뽑아줘…” 하고 말이다. 내게 강 같은 평화가 아니라, 강 같은 여유가 찾아오길, 강물 같은 돈을 얻어 엄마 아빠를 부양하고 연애를 할 수 있길… 

 2014년 2월, 인턴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 뛸 듯이 기뻤다. 그래, 노예가 되어주겠다…!! 비록 그 회사가 내륙지방의 등대 역할을 하고 있어도. 나는 그 곳의 등대지기가 될 수 있었다. 절박했으니까.  


#2. 배움과 갈굼의 시간 

 배움과 갈굼의 시간이 계속됐다. 나의 인신전속성은 오로지 회사와 상사에 있는, 오롯이 ‘노예’에 가까운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나는 회사를 떠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것은 한 달에 한 번 꽂히는 280여만원의 돈 때문이기도 했고, “내가 잘못해서”, “내가 부족해서” 그랬다는 감정때문이었다. 그 시절 밤늦게, 혹은 새벽 1~2시에 집에 들어가 ‘민물장어의 꿈’이란 노래를 샤워하면서 들었다.  

좁고 좁은 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나를 깎고 잘라서 스스로 작아지는 것 뿐 

이젠 버릴 것조차 거의 남은 게 없는데 

문득 거울을 보니 자존심 하나가 남았네… 

 그때 나는 자존심도 남지 못해서 샤워하면서 많이 울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주말에 그래도 틈이 생겨(주말 출근도 잦았다.) 친구들을 만날 때면, 늘 임직원 카드 35% 할인이 되는 곳으로 향했고, 10만원 대 숫자가 5자리로 바뀔 때의 모습을 음미하면서 내 가슴속의 의기를 채우곤 했다. 생활하는 공간에서 “애티튜드가 글러먹었다.”로 시작되는 자존심의 부식속도는 점점 빨라져만 갔지만, 임직원 카드를 통해 위세를 부리는 것은 일종의 자기방어기제였을지도 모르겠다. 


#3. 허덕이는 나. 

 물적 분리로 인해 2015년부터 더 이상 임직원카드를 쓸 수 없게 되었을 때, 회사는 ###게임즈로 독립하고 연봉과 복지를 올려줬다. 2년차에 이르러, 이것이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었다. 문득문득, 이곳에서의 내 삶은 나의 삶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임 속 캐릭터에게 타격을 입거나, 타격을 입힐 때, 우리는 청소년 이용불가 등급이 아닌 대부분의 경우 그러한 타격이나 보너스의 상황을 “빛” 등의 이펙트와 함께 나타나는 “숫자”로 인지하게 된다. 게임즈에서의 내 삶도 마찬가지였다. 내 삶은 숫자로 표현될 수 있었다. 나의 월급, 생활비, 시간. 내가 이 곳에 묶여있는 시간, 갈굼을 받는 시간 속에서 내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내 삶 속에서 중요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지는 점점 알 수 없던 시간들. 마치 게임 속 캐릭터와 같았다. 난 게임을 만드는 곳에서 그에 맞는 역할을 해야 했다. RPG. 롤플레잉 게임처럼. RPG의 캐릭터에게는 그 게임의 스토리에 맞는 역할이 있을 뿐이다. 플레이어는 캐릭터의 “삶”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나의 롤은 아침부터 밤, 새벽까지 계속됐다. 나의 삶은 곧, 그 게임 속의 “롤”이어야만 했다. 늘 게임을 생각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은 회사가 짜놓은 ‘스토리’, ‘전략기획’, ‘GGCC”란 외침 안에서 돌아가는 이야기다. 회사는 나를 움직이는 플레이어였고, 내 삶에 관심이 없었다. 게임 속 캐릭터에게 돈을 들여 아이템을 바꿔 주고 미친듯이 플레이하듯이, 그들도 내게 돈을 주고 나를 플레이했다. 주인공 계정도 아닌 수천의 서브 계정 중의 하나로서. 

 아니, 사실 나는 돈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들이 내게 치트키 하나를 썼기 때문이다. “포괄임금제”라는 치트키를. 게임 핵 프로그램, 불법 유저는 강력히 제재하겠다는 회사는, 정작 우리의 근로계약서 속에는 “핵”을 설치해놓았다. 그 핵을 걸러내고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디버깅 도구는 아마도 노동조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있던 회사는 노조를 허락하지 않았다. 


#4. 개새끼가 되지 못하면 등대를 떠나라! 

 허리가 아작나기 시작했다. 수면 부족은 디스크에 치명적이건만, 수면이 부족한 것은 일을 못하는 나의 태도가 글러먹었기 때문이었다. 실체가 무엇이든, 그렇게 이해되었다. “글로벌 원빌드”, “글로벌화”를 외치는 회사는 더 많은 시간의 할애를 내게 요구했다. 하지만 나도 내 삶과 건강이 중요했다. 그 긴장상태를 회사에서는 “충분히 기회를 줬는데 애티튜드가 글러먹음”으로 이해를 한 것 같았다. 

 미처 맡은 업무의 리허설 장소를 예약하지 못했을 때, 팀장이 말했다. “다 필요 없고, 부엉이애호가님 잠깐 나 좀 봅시다.” 하고. 

 그리고 지금도 생각하면 머릿속이 하얘지는 그런 말을 이야기했다. “나는 너에게 충분히 기회를 줬다고 생각한다. 인사팀에서 한 1~2달 치 위로금은 챙겨줄 테니 권고사직하는 걸로 하자. 뭐 네가 안 받을 수도 있는데, 아마 그럼 일반해고로 가는 절차를 밟을 것이고. 네가 버티기 쉽지 않을 거다.” 

 “이쯤 됐으니 다 한번 말해보자. 저번 회식 때, 왜 자전거 끌고 왔어? 그렇게 집에 빨리 가고 싶었나? 그런 게 기본적인 태도가 안됐다는 거야.”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잦은 야근 때문에 집을 회사 근처로 옮긴 상황이었고, 그래서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회사를 나왔는데 회식을 회사 밖에서 하니, 그래서 자전거도 가지고 온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만약 그런 이유였다면, 회사에 자전거를 대고 있다가 회식이 끝나면 그때 회사에 가서 자전거를 다시 끌고 와야 되는 게 당연한 예의라고 하였다. 더구나 그 다음 날 나는 바로 그, 팀장이 시킨 업무를 오전까지 끝내놓으란 지시를 받은 상황이었다. 그는 내가 업무를 오전까지 끝내기 위해 1차 끝나고 갔던 게 불만이었던 걸까.  

 물론, 그도 바보는 아니었을 것이다. 새로운 상무가 온 뒤의 첫 회식이 있은 뒤로, 내가 회식을 불편해했음은 명백했으니까. 첫 회식, 공교롭게도 여자 직원들은 모두 1차가 끝나고 빠졌다. 2차가 남자들만 남자, 새로 온 상무는 노래방을 가자고 했다. 그리고 아가씨를 부르라고 했다. 자기가 쏠 테니까. 여러분들에게 자신이 잘해보자고 하는 거니까. 여러분들도 잘하자고.  

 내 옆에는 쫙 붙는 원피스를 입은 여성이 본인의 몸매를 드러내며 앉았다. 대각선에는 다른 비슷한 옷차림의 여성이 상무님께 “오빠~ 한 잔 따라드릴게요. 다음엔 나한테도 한 잔 따라줘~” 라고 하면서 위스키를 따르고 있었다. 그 녀의 ‘오빠’는 아버지 뻘이었다. 

 내 옆의 여성도 계속 내게 붙으려고 했다. 나는 정말 이건 아닌 것 같아서, 살을 닿지 않으려고 허벅지를 움츠렸고, 계속 노래책만 붙잡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구질구질하지만, 난 그래도 진보정당 당원이라고 되뇌면서. 

 그때, “오빠”가 내게 말했다.  

“부엉이애호가 님. 여자를 싫어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말했다. “아, 아닙니다. 저 여자 좋아합니다.” 

“근데 왜 그래?”  

“아, 노래 찾는데 열중하느라…제가 한 곡 뽑겠습니다!” 

그쯤 되니 그 여성도 오른쪽 옆의 다른 이에게 붙었다. 하지만 참으로 수치스러웠다. 사창가를 가는 것만이 성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들 또한 분명히 성노동자였고, 난 성노동 구매의 공범이 되었다.  

내가 “2차”에 대한 거부감을 갖게 된 것도 그날 이후부터였다. 그 날의 수치스러운 기억, 마음이 더러워지는 장면을 더 이상 겪고 싶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나의 “태도가 글러먹은” 현황을 이야기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내게 말했다. 

“부엉이애호가 님. 가혹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생각했어. 부엉이애호가 님한테 이게 다 교훈이 될 거야. 교훈이 되라고 이렇게까지 하는 거니까 이해해주길 바래. 이걸 통해 뭔가 배우는 게 있었으면 하고.” 

뭐? 교훈?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건 명백한 부당해고다. 그럼에도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나갈 때도 저항 할 수 없었다. 몸이 떨렸고, 가슴은 계속 먹먹했고, “무너진다”는 기분을 그렇게 생생하게 느낄 수가 없었다. 

면담이 끝난 뒤 20층 옥상에 올라가서 말 없이 하늘만 바라봤다. 그냥 문득 생각이 났다. 그때 당시 한창 어느 진보 논객의 여자친구 폭행이 폭로되어 시끄럽던 때였다. 그때 그 상황을 폭로하는 글에는 “저는 페미니스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렇게 당했다. 그냥, 이렇게 페미니즘, 페미니스트의 정체성을 갖고 있음에도 남성의 폭력에 무기력할 수 있다는 걸 사람들이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란 문장이 있었는데, 그 생각이 났다. 난 지난 10여년을 진보정당의 당원으로 살았고, 노동에 관한 나의 권리를 챙기면서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문제가 닥쳤을 때, “회사”의 압도적인 힘에 난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었다. 그게 너무 억울해서 떨리고 눈물이 났다. 

인사팀과 면담을 하니, 팀장의 말과는 다르게 본인이 퇴사한다고 하셔서 나가시는 거 아니냐, 권고사직 처리 안된다. 위로금은 무슨 소리냐라고 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나는 일단 자사주를 팔 수 있는 권리가 생기는 내년 2월까지 버틸 요량으로 그럼 나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 3일 뒤, 3개월 전부터 팀에 말해놨던 (하지만 그때 알겠다고 이야기한 팀장은 출발 3주 전, 그런 걸 왜 상의도 하지 않고 통보를 하는 거냐. 협의를 해야지. 라고 이야기했다.) 러시아 여행을 떠났다.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여행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장수상회라는 영화를 봤다. 마지막에 눈물이 났는데, 이상하다. 왜 눈물이 멈추질 않는 거지? 

불이 꺼진 야간비행의 시간, 그렇게 2~3시간을 계속 울었다. 문득 내가 뭐 한다고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이곳에서의 일은 내가 하고 싶은 일도, 날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일도 아닌데.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 내 마음 속에는 두근거리는 두 글자의 외침이 자리잡았다. 

“퇴사” 


#5. 호기롭지 마라. 당신은 화가 나 있다. 

  귀국 2주만에 퇴사를 했다. 새로운 마음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돈 보다 하고 싶은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으로 정치컨설팅 회사에 들어갔다. 돈보다 더 중요한 건 하고 싶은 일이라고 되뇌면서.  

 그런 호기가 당신의 제2의 선택을 망칠 수 있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어 보이는 곳이라고 해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또한 내 노동의 가치를 지켜주는 곳인지도 봐야 한다.  

 언론사를 빙자하고 실제로는 자신과 계약을 맺은 정치인의 보도자료를 그대로 기사로 내줘서 언론보도실적을 내주는 식으로 각종 영업을 하는 그곳은 나와 연봉협상을 하고 2주 뒤에 근로계약서를 주고서 약속한 금액이 다르다고 따지니 “퇴직금까지 포함해서 말한 것”이라고 했다. 욕지거리는 다반사였다. 그는 항상 자신이 진보적이며, “노회찬 선배와 친하다.”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는 직원들에게 폭언을 행사하였고, 때론 물건을 집어 던지고, 늘상 벌어지는 야근을 강요했다. 결국 2달만에 나의 선택이 크게 잘못되었음을 시인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꼬인 스텝을 수습하고 어찌어찌하여 지금 이곳, 서울노동권익센터에서 일하게 되었다. 


#6. “하고 싶은 일”과 “생활”의 사이 어딘가. 

퇴사 이후가 더 중요하다. 특히, “호기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퇴사 막간의 2~3달이 매우 중요하다. 흔히들 생각한다. 돈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이것보다 나은 곳일 거라고. 그렇지 않다. 한국의 노동현실은 매우 열악하다. 이건 어느 정도는 세대의 문제인 것 같기도 하다는 고민도 든다. 우리 세대와 윗 세대의 노동감수성 자체가 다르다. 그래서 우리는 “하고 싶은 일”만을 쉽게 선택해서는 안 된다. 우리 인생의 다음 앞 길을 위해서는, “생활”도 중요하다. “호기로운 선택”에는 약간의 “화”가 스며들어있다. 그리고 그 화가 내 스텝을 꼬이게 할 수 있다. 

“하고 싶은 일”과 “생활”의 사이 중간 어느 지점을 목표로 앞으로의 스텝을 고민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내가 “하고 싶은 일”도 무엇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과 생활의 중간 지점에 나를 놓기 위해서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도 좀 더 구체적으로 계획을 짜게 된다. “호기로운 선택”의 순간에 한 번 더 냉철해져야 한다. 


#7. 에필로그 

2번째 퇴사 이후의 우여곡절을 겪던 어느 날이었다. 나보다 늦게 입사했던 분의 메시지였다. 본인도 퇴사하게 되었다고. 회사에서 너무 힘들게 해서 퇴사했는데, 얘네가 권고사직을 도저히 안 해준다고. 다른 계약직 직원에게도 메시지를 받았다. 그 친구는 1년만 계약직으로 일하고 정규직 전환을 해주겠다고 한 친구였다. 알고 보니 3개월씩 6번을 나눠서 계약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정규직 전환에 대한 욕심 때문에 내가 퇴사한 후로 내가 하던 일을 하느라 계약직임에도 맨날 밤늦게 퇴근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 1년째 되던 날 정규직 전환이 안되고 6개월만 더 계약직으로 일해보고 전환 여부를 이야기하자고 해서 그 이후로 자기 할 것만 하고 시키는 일을 전혀 안하니까, 정규직 전환이 안되고 23개월 될 때 까지만 계약을 연장하자고 했다고 한다.  

화가 났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그 정체는 이것이었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었어…내가 멍청하고, 태도가 글러먹었던 게 아니었어…”  

왜 내가 그 권고사직 이야기를 듣는 전후로 12~3명 있는 실에서 5명이 이직을 해야 했는지. 그들은 온전히 그들의 뜻으로 이직을 한 것인지. 궁금해지면서도, 더 이상 궁금하지 않은 순간.  

누군가의 괴로운 소식이 내겐 괴로움과 함께 안심으로 다가왔다. ‘길티 플레져’였을까.  

그 몇 달 뒤, K신문에서 제법 크게 기사가 났다. “게임산업”, “등대에서의 노동자.” 노동부는 내륙지방의 등대를 침입하였고, 포렌식 장비를 동원해 특별근로감독으로 1년치 체불임금의 지급을 명령했다. 체불임금에 대한 임금채권은 3년이라서, 나의 연장근로, 야간근로, 휴일근로 수당에 대한 채권은 그대로 있지만, 그 기억을 또 떠올리긴 싫어서 따로 청구는 하지 않았다.  

나에게 그저 다행이고 중요했던 것은, 중요했던 것은 “내가 잘못되지 않았다.” “내가 무능한 사람이어서가 아니었다.” 라는 내 자존의 회복이었다.  

우리의 노동, 일터에서의 삶은 나의 자존심이고, 자신감이고, 자존감이다. 이 글을 읽는 모두가, 우리의 자존을 위해 한 번쯤 퇴사를 고민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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