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는 어떻게 '몰락'의 함정을 파게 되는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프랑스 변방 코르시카 태생이다. 그는 군인이 되어 공을 쌓으며 초기에는 루소의 광팬이었다. 청년시절 그는 코르시카의 독립을 꿈꿨다. 청년 시기, 그는 코르시카 의용대 대장이 되어 프랑스 혁명을 이끌었다. 이후 그가 쓴 ‘보케르에서의 저녁식사’란 정치 팜플렛은 “왕당파와 공화파가 아무리 사상논쟁해봤자 결국 공화파가 토론에서 이긴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출세를 위해 혁명을 지지했다.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자코뱅파가 몰락하면서 그도 결국 투옥되고, 기요틴의 이슬로 사라질 일만 남았었는데, 방데미에르 13일 사건으로 왕당파의 쿠데타를 진압하고 결국 그는 복권된다. 이후 그는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로 통령에 오른 뒤, 종신통령을 거쳐 스스로 황제의 위에 오른다. 그는 프랑스 혁명의 공화주의를 부정하지 않았으며, 프랑스를 사적으로 소유한다는 프랑스 황제란 말을 거부하고, 프랑스 국민의 지지로 선출된 권력이라는 의미로 “프랑스인의 황제”란 칭호를 사용하였다. 나폴레옹 즉위에 대한 국민투표는 352만표대 2579표, 압도적 찬성으로 가결되었다. 프랑스인들은 혁명과 전쟁 끝에 안정을 희구하였기에 초반에 그의 황제 즉위를 반겼다.
나폴레옹은 “주권은 인민에게 있다”란 말을 반복적으로 사용했다. 그는 자신을 국민의 대표로 정의하며, “신뢰는 아래로부터 오고, 권력은 위로부터 온다.”는 사상에 의해 “선출 권력”인 행정부 수장의 권한을 절대적으로 만들었고, 입법부의 권력은 토론만 가능한 호민원, 토론은 불가하고 투표만 가능한 입법원, 그리고 나폴레옹이 직접 임명한 국사원 의원들이 법안 발의를 독점하게끔 하여 그 권한을 쪼갰다. 그리고 선출권력에 의한 전문가 임명이란 체계를 완성하여 선출권력 아래에 임명권력이라는 공식을 완성시켰다.
1806년 11월, 유럽 대륙을 사실상 제패한 황제 나폴레옹은 베를린에서 하나의 칙령을 발표한다. 그의 숙적, 영국의 숨통을 끊기 위한 카드, 이른바 ‘대륙봉쇄령(Continental System)’이다. 그 목적은 명료했다. 영국의 막강한 무역과 산업 기반을 대륙에서 완전히 고립시켜 경제적으로 무너뜨리겠다는 ‘경제 전쟁’의 선포였다. 황제의 강력한 의지는 유럽 대륙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장벽으로 만들어, 영국의 상품이 단 하나도 발붙이지 못하게 하려 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초강력 수요 억제패키지였다. 유럽 대륙의 모든 항구를 봉쇄하고, 영국 및 그 식민지와의 모든 거래, 심지어 서신 왕래까지 금지했다. 그러자 영국은 긴급 명령 1807년을 발표, 프랑스와 연합국과의 무역을 전면금지하고 영국 해군이 프랑스와 연합군 해안을 역봉쇄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러자 황제 나폴레옹은 밀라노 칙령으로 영국의 항구를 이용하거나 영국에 관세를 내는 중립국 상선도 영국 국적으로 간주해 나포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한편, 모든 유럽상선들은 프랑스의 항구에 1차적으로 정박해 “실제로 영국과 교역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확인받고 출항하게끔 했다. 한편, 전 유럽 국가들과 프랑스 연합국에 대해 모든 대 영국교역을 전면 금지시켰다. 특히 틸지트 조약으로 명목상 동맹국이면서 사실상 굴복시킨 러시아도 영국과의 교역을 전면 금지시켜버렸다. 아울러 대륙봉쇄령을 강화하기 위해 라인강을 넘어 네덜란드 전역과 독일 북해안, 엘베강 하구, 발트해 거의 모든 항구를 프랑스가 점령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 접경지대인 올덴부르크 공국, 한자동맹 도시들을 합병했는데, 이런 부분도 러시아를 크게 자극했다.
나폴레옹의 위세에 눌린 러시아는 초기엔 미온적이나마 대륙봉쇄령에 동참했다. 그러나 교역 감소, 즉 거래량 감소로 인한 경제적 피해는 예상을 훨씬 더 초과했다. 러시아의 주요 수출품목의 대영국수출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생필품 부족은 극심해졌고 물가는 폭등했다. 생필품과 수입품의 급격한 부족과 물가상승으로 말미암아 유럽 각국의 대도시에서는 금지된 영국제 면직물과 럼주, 직물, 설탕, 커피, 고가 사치품 등에 대해 언제 공급이 차단될지 모른다는 공포에 의한 사재기, 이른바 ‘패닉바잉’이 나타났다.
초기 대륙봉쇄령은 영국의 무역에 일시적인 타격을 입혔다. 실제 나폴레옹은 경제상황에 대해 “일시적 하락을 용인하는 용기”를 내면 영국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영국의 실질임금은 초기 3분의 1까지 감소했고 대미 수출은 10분의 1까지 감소하였으며 영국 노동자들의 폭동으로 런던에 5만명의 상비군을 상시배치해야하는 지경에 놓였기 때문이었다.
나폴레옹은 수요를 강하게 억제하면 장기적으로 영국의 산업이 고립되어 생필품 투기가 차단되고, 프랑스의 시장지배를 통한 소비시장 안정이 이뤄지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거래절벽은 각국의 대륙봉쇄령 이탈을 낳았고, 밀수가 증가하였으며, 反프랑스 여론의 폭발적 증가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특히 영국을 향한 밀수선단과 암시장거래는 유럽 각국 경제성장의 새로운 통로가 되었고, 봉쇄령의 목적이었던 경제안정은 오히려 투기적 자본의 확산으로 변질되게 되었다.
물가앙등 상황에서도 나폴레옹은 영국만 바라봤다. 조금만, 조금만 더 쎄게 밀어붙이면 영국을 경제적으로 무너뜨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대영 수출이 30%에 달한 러시아로서는 자신들의 수출시장에 대해 대체 공급도 안해주면서 실제 경제주체들의 수요만 틀어막는 프랑스에 대한 불만이 쌓여만 갔다.
러시아로서는 화가 나는 일이었다. 만약 나폴레옹이 러시아에게 새로운 대체시장을 공급해주거나 남아도는 러시아 물건을 대신 구매해준다거나 했다면, 러시아는 대륙봉쇄령을 충분히 감내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러시아의 알렉상드르 1세는 나폴레옹과 협상에 들어갔고, 대륙봉쇄령의 폐지와 관계 개선을 요구했다. 대륙봉쇄령의 부작용은 점점 심해져 나폴레옹이 다른 유럽국가들에 세워놓은 “친족 왕” 들의 국가들도 反프랑스 대열에 동참하려하는 조짐이 보였다.
영국은 영국대로 아메리카와 아시아라는 새로운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비유럽 식민지 대륙은 영국의 새로운 풍선이었다. 자본은 막는다고 사라지지 않고, 가장 수익성이 높은 곳으로 끊임없이 찾아 흘러들어가는 유동성 전이의 속성을 따랐다. 나폴레옹의 의도와는 다르게, 영국은 유럽 대륙에 대한 의존도를 빠르게 줄일 수 있었고, 전세계적 해상패권과 금융중심지 지위를 확립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국내외 반발을 무시하며 밀어붙인 대륙봉쇄령이 실효성을 가지려면 러시아부터 굴복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폴레옹에겐 어느덧 러시아의 굴복이 곧 영국의 굴복을 위한 시금석이었다.
그는 러시아 원정을 준비하라고 명을 내렸고, 외무상 탈레랑, 주러 프랑스대사 아르망 드 콜랭쿠르는 러시아원정에 반대했다. 특히 콜랭쿠르는 알렉산드르 1세는 전쟁을 원치 않는다고 무려 5시간동안 나폴레옹에게 보고했지만, 나폴레옹은 그러거나 말거나 이미 전쟁을 결심했다. 자신은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사람이란 자신감이 그의 모든 것을 휘감았다.
그 이후의 역사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승리를 의심치 않았던 상승장군 나폴레옹의 68만 대육군은 러시아원정에서 그야말로 “대몰락”의 길을 걸었다. 러시아 원정의 괴멸적 손실로 나폴레옹의 자랑이었던 기병전력은 나폴레옹 전쟁 종결시점까지 그 규모를 회복하지 못했다.
나폴레옹은 이성을 잃었다. 자신의 전략전술은 완벽했고, 조금만 더 하면 영국을 이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는 협상하러 온 메테르니히에게 러시아원정에서 죽은 이들은 대부분 프랑스인이 아니라 독일인들, 즉 너희 독일인들이 제대로 못 싸워서 우리가 진 것이지 우리에게는 잘못이 없다고 말하며 협상에 나선 모든 이들을 적으로 돌렸다.
1813년 밀고 들어오는 제6차 대프랑스동맹군을 향해 나폴레옹이 믿었던 건 40만에 이르는 오스트리아의 예비병력이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들은 독일인 메테르니히가 나폴레옹의 뜻대로 할 리 만무했고, 결국 라이프치히 대전과 뒤이은 전역에서 나폴레옹은 46만의 대군을 상실하였다.
1814년, 밀고 들어오는 대프랑스 동맹군은 마침내 파리에 무혈입성하고, 나폴레옹이 자랑했던 측근 4원수는 나폴레옹을 찾아가 “파리가 모스크바 꼴이 나게 할 수는 없다”며 하야를 권고했다. 그 해 4월 11일, 퐁텐블로 조약의 체결로 나폴레옹은 엘바섬으로 쫓겨났다.
그리고 그것으로 보나파르트 왕조도 종언을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