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 일기 1

마음의 짐

by 얼그레이

토요일 아침, 여의도에서 러닝을 시작한다. 주중에는 직장인으로 바글바글한데, 금요일 저녁만 지나면 굉장히 한적한 곳이 된다. 특히 여의도 공원이 더욱 그렇다. 정확히 9시, 공원 한 복판에 서면 나 혼자 서 있는 경우가 많다.


이 곳에서 보는 파란 하늘을 추천한다. 서울 토박이로서, 이렇게 넓은 하늘을 마주할 수 있는 데가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맑은 날에는 C-47 비행기에서부터 저 멀리 농구장까지 파란 하늘을 훑기만 해도 일주일의 자질구레한 스트레스들이 희미해지는 기분이다.


평소 같으면, 자거나 어영부영 보냈을 시간이다. 별 일 없을 토요일 오전인데, 러닝을 시작한 이후로부터 토요일이 길어지고 무엇보다 맑은 기운으로 주말을 맞이하는 기분이 좋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니, 내 일주일의 시작이 월요일이 아닌 토요일이 되어가는 기분이다. 토요일 오전, 러닝을 시작하면 그렇게 한 주가 남들보다는 빨리, 그리고 좀 더 건강한 기분으로 진행되는 기분이다.


무슨 연유에선지 3년 전, "2020년 운동 대회를 나가겠다"는 장기 플랜을 세워놨었다. 러닝이든 수영이든 사이클이든, 무언가 목표를 정하고 나의 페이스대로 높여가는 운동을 하고 싶어 진 것이다.


대회에 나가는 것은 별다른 이유는 없다. 그저 함께할 사람들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앞서 말한 운동들은 남을 이기는 것이 아닌 자신의 목표와 대결해서 성장하는 활동들이다. 그래서 함께 할 '크루'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같은 운동들을 해나가는 게 지금 내 인생의 시기에 꼭 필요한 것들이라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9시가 지나면 지각자가 커피를 쏜다. 나는 신규 회원이라, 그 포지션이 되고 싶지는 않다. 성격 탓인지, 어떤 방식으로든 미안함을 표현하는 게 스스로에게 미안해지기 때문이다. 학교 다니는, 한참 예민할 때에는, 지각할 것 같으면 수업을 걍 째기도 했다. 오늘 수업은 다음으로 미루자며, 그땐 그게 쿨하게 다가왔다.

그런 내가 지금의 9시는 꼭 지키려 애쓰는 마음이 감사하게 다가온다. 오늘도 해냈다는 사실, 더 나아가서는 지금도 잘 모르겠을 어릴 적 모난 부분들이 다듬어질거란 기대도 들기 때문이다.

오늘은 여의도 한 바퀴 도는 코스로 정했는데, 주변을 돌다 보니 재건축 아파트가 눈에 띄었다. 내가 알기에 여의도는 공항이었다. 본격적인 개발을 시작하면서, 대단위 아파트가 생겨 나기 시작했다. 그때 지어진 신축 아파트들이 바로 이 회색빛 아파트들인 것이다.

첫 러닝을 시작할 때는 마천루 빌딩 사이였는데, 어느새 회색 시멘트 아파트 옆을 한참 지나가고 있었다. 더 황량하게 느껴졌다. 중심부에서는 위로는 스카이라인, 땅으로는 초대형 지하공간까지 개발을 지속하고 있는데, 이 회색빛의 시멘트 덩어리들만 멈춰진 시간 속에 버티는 존재들 같았다.

지어질 때만 해도 신축이었겠지만 지금은 매매가, 전세가 차이가 하늘과 땅인 그저 자리값만 차지하는 존재가 돼버렸다. 그들에게 지금 시간들은 어떻게 느껴질까? 누구든 시간을 이길 수는 없다고 본다. 각자의 계획대로 지금의 순간들과 미래의 순간들이 등가 교환되기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변수도 있고, 애초 계획 자체가 불가능할 때도 있고, 결국 유한한 시간 앞에 포기하는 것들도 생기기 때문이다.

물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행복은 재개발이 이뤄지는 미래에 있다. 재개발만 된다면, 아파트 값이 얼마나 뛸까? 그런 고민을 하고 있자니, 이런 고민을 하는 내 시간이 아까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돈이란.. 시간이란...그렇게 한 바퀴를 돌았다.


내 마음속에서도 짐이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본다. 묵혀 두었던 꿈, 계획들 사소하게는 읽다만 책들, 펴다 만 다짐들, 내 마음속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것들, 어두웠던 한 켠의 스위치들이 하나 둘 켜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꼭 하고 싶은 것들이 생겼고, 지금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8km를 뛰었다. 애플 워치가 그려놓은 러닝 코스는 고구마와 같았다. 다시 보는 여의도 공원의 파란 하늘은 정말로 근사했다.

작가의 이전글영화 리뷰 : 500일의 썸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