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와 순환
영화를 보고 느낀 감상은 자유롭다는 점이었다. 4명의 주인공이 한정된 공간에서 가까워지다 멀어지고 상대를 바꿔가며 마음을 주고받는 게 꼭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전개가 빠른데, 대사 위주로 이어지다 보니 많은 부분이 생략되었고 대사 하나하나에 많은 의미가 담겨 있어 심정 변화를 추론해볼 뿐이었다.
사람들은 어떤 점에 끌릴까? 비슷한 부분에서 동질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나와 다른 부분에서 매력을 느끼기도 한다. 영화에서 눈여겨본 부분은 서로가 비슷해서 끌리기도 하지만 너무 비슷해서 멀어지기도 한다는 점이다. 주드로와 나탈리는 마음을 숨기는 데 능한 작가, 스트리퍼로 등장한다. 주드로에게 영국 출신 스트리퍼, 나탈리는 작가로서 창작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이자 신비로움 그 자체다. 알 수 없는 여백에 상상의 나래를 펼쳐 그녀에 대한 소설 한 권을 완성해낸다.
그리고 출간 기념사진을 찍는 자리에서 솔직, 진솔한 직구녀 로버츠를 만난다. 매번 장난스럽고 물음표 가득했던 나탈리와 달리 순수하여 대번에 파악이 되는 로버츠의 투명함이 신비롭다. 바지런히 나탈리를 탐색하던 그가 조금은 명확한 솔직함을 가진 로버츠에게서 매력을 느끼며 천착하게 된다.
로버츠는 피부과 의사인 래리와 연인관계이다. 주드로가 인터넷 채팅으로 자신을 속여 19금 채팅을 이끌고 둘을 만나게 한 게 해프닝의 내막이었다. 없던 것도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게 주드로의 성향이고 그가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라면 로버츠와 래리의 관계는 상당히 진실되고 솔직하게 시작한다. 래리는 직진남, 호불호 명확한 의사로 등장하는데, 직업 성격 탓인지 모든 것을 끝까지 들여다보고 확인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로버츠는 그런 그가 좋았지만 어느 순간 갑갑하게 느껴진다. 지나친 솔직함, 강요된 투명성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이 든 것이다. 특유의 말장난과 완곡어법으로 그녀를 탐색해오던 주드로가 싫지 않은 상태가 되고 사진작가로서 알아가고픈 상대가 래리에서 주드로로 바뀌게 된다. 존중하며 탐색하는 그의 모습이 해부하듯 파고드는 래리와 다른 점이었기 때문이다.
본능에 끌려 가까워진 지점이 낯섦을 느끼게 하는 순간이 있다. 이렇게 꼬인 관계도 결국 남녀를 다시 바꾸며 순환을 한다. 춤을 출 때도 몸통은 늘 이곳에 있지만 팔, 다리는 원하는 곳에 닿아보길 시동을 거는 동작이 많다. 중심과 순환이라 정리해보고 싶은데, 그들의 관계가 늘 불안하면서도 상대를 찾아 합을 내는 과정이 춤의 그것과 비슷했다.
조금 단어를 바꿔서 진짜 내 사랑, 내 편이란 무엇일까? 주인공 모두 각자의 사랑하는 대상이 다르다. 주드로에게는 처음 보는 여자, 나탈리에게는 거짓도 이해해줄 남자, 로버츠는 알아가고픈 대상, 래리는 명확하며 확실한 여자다. 각자가 자신의 영역에서 무심코 발을 디딘 상대를 탐색하며 온전히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한 분투가 영화의 주된 메시지였다. 그게 진짜 내편인지, 아니었는지를 끝까지 확인할 수 없었다.
내 편, 애초에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인간이 얼마나 여린 존재인지를 돌이켜본다. 정치를 하고 국가를 만들고 때로는 종교에 의지하고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의 존재를 상대방에게 찾고 이해해주길 바라며 자신의 편을 찾는 유약함의 발현이 아닐까 싶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너도 나를 사랑하는가? 나를 이해할 수 있나? 진실이든 거짓이든 모든 장애를 넘어 서로가 같은 편이 될 수 있는가? 이 모든 것들이 쉽게 답할 수 없는 숙제로 남는 이유를 생각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