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아,지긋지긋한 첫사랑

by Alte Liebe


1. 지금은 그런 toxic 한 관계를 추구하면 안된다는걸 알 정도로는 사회도 나도 문명화가 되었지만, 10살쯤 읽은 계몽사 세계 문학의 폭풍의 언덕과 제인에어를 빼면 저는 어린시절의 로맨스 판타지에 대한 어떤 얘기도 꺼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른이 되고 본조비나 제임스 헷필드 같은 현실적인(?) 남자들로 이상형이 대체되기 전까지 히스클리프는 모든 소녀들의 강렬한 첫사랑이었죠.


다들 알겠지만 이 책은 두 개 파트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캐시가 히스클리프라는 남자아이를 만나게 되고, 둘은 닳아없어져가는 흐릿한 어른들의 세계에서 처음 만난 생기와 사랑으로 터무니없을 정도로 서로에게 집착하게 됩니다. 하지만 캐시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히스클리프는 온갖 미친짓을 하고, 캐시는 아이를 하나 낳고 죽게 되죠. 여기까지가 1부 - 이번에 나온 로비/엘로디 폭풍의 언덕이 다루고 있는 부분입니다.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 그녀가 14살에 처음 읽었던 작품의 느낌을 담아내고 싶다고 인터뷰 한 적이 있습니다. 소녀들에게 사랑이란 대체 불가능하고 죽음도 불사하고, 나의 존재 전부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다 희생시켜서라도 반드시 지켜야할 어떤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해서 사랑을 얻으면 그걸로 뭐 하나보면, 섹스나 계속하는 거여서 좀 허무한면이 있긴 하지만.. 아무튼 전두엽이 말랑말랑한 어린 시절에는 뒤에 일어날 일은 별로 생각 안하는 면이 있으니까요 ㅋ


2. 14세의 나도 이 부분에 특히 매혹되었고, 이 얘기로 지어먹은 야한 꿈이 한솥은 되겠지만, 사실 둘의 사랑자체는 별로 굉장한 얘기가 아닙니다. 독자들이 둘의 사랑을 동정하고 열정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이 집이라는 공간 때문입니다. 집착과 광기가 유령으로 돌아오고, 학대는 폭력으로 다시 이어지는 저주를 끊기 위해 2세대가 필요했던 정도로 강력한 고립과 폭력의 공간이요.


그 곳은 공간인 동시에 저주의 유전자이자 유령입니다. 히스클리프는 집에 빨려들어가서 몰아치는 광기와 폭력으로 집의 영혼이 되었다가 결국 소멸합니다. 이 소설의 2부는 위대한 사랑 얘기에 덧붙인 불필요한 부가 설명따위가 아니에요. 2부가 없다면 1부의 모든 과도함이 흘러갈 곳이 없이 찝찝하게 썩어들어가게 되거든요.


윌리엄 와일러는 이 작품의 1부까지만 영화화하면서 이 결말이 찝찝하게 썩어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한 장치를 추가합니다. - 80년 동안 안봤으면 앞으로도 안보실거 같지만 아무튼 스포일러는 하지 않을께요!- 만약 이번 폭풍의 언덕이 인터뷰처럼 14세 판타지의 최종본이 되고 싶었다면, 안타깝지만 80년쯤 늦었다고 밖에 할수가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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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년작 윌리엄 와일러의 폭풍의 언덕



3. 쓸데없는 얘기.


미리 보고 온 사람들에게 이 영화가 가진 sm 적인 요소에 대한 얘기를 꽤 들었는데, 원작에도 히스클리프 - 이자벨라의 관계에는 의도적이고 계산된 학대라든지, 가학적 파괴의 코드가 상당히 들어있긴 하죠. 모르겠어요. 일단 이번 작품에서는 이자벨라도 뭐 그런걸 좋아하는 것처럼 보여서 소설을 읽을때보다는 보는 마음이 좀 편하긴 했는데.. ._.)a


제이콥 엘로디가 너무 착해보이는게 문제인거 같기도 한데, 히스클리프-이자벨라 커플은 평생 노닥노닥 강아지 흉내 내면서 죽이네 살리네 하면서 재밌게 잘 살거 같기도 하거든요. 아니 뭐 여자를 목줄에 묶어놓는게 되게 훌륭한 행동은 아니지만, 원작의 히스클리프는 강아지를 진짜 죽였는데요! 비교해봤을때 엘로디 히스클리프가 훨 나은 인간이고, 유머감각이 있는 사람으로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죠.


이동진은 이 작품에 별 4개를 주면서 ‘상처에 파고들어 고통으로 기어이 꽃을 피우는 미친 사랑의 노래’ 라는 평을 남겼는데, 뭐래 진짜. 하긴 남자들이 폭풍에 언덕에 대해 뭘 알겠습니까 하핫.


제가 원작 소설을 너무 좋아해서 좀 박한 면이 있을 것도 같은데, 사과파이를 만들라고 맛있는 사과를 갖다주니까 사과 껍질로 빨갛고 예쁜걸 만들어놓으면 어떻게 되죠? 안성재가 생사과가 제일 맛있었어요. 하고 탈락시키겠죠. 쳇.


근데 어제 친구랑 보고 나오면서 친구가 이거보다 더 못만들었고 그걸 우리가 알았대도 보긴 봤겠지 라고 해서 크게 납득. 아 지긋지긋한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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