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의 은밀한 유혹

황석영 <할매> 리뷰

by Alte Liebe


황석영의 할매를 순식간에 다 읽음. 황석영은 진짜 훌륭한 소설가이고, 컨디션 좋은 날의 판소리 명창처럼 숨도 안쉬고 뽑아내는 굽이굽이 이야기 능력이 진짜 발군이다. 생각해보면, 그 나이가 된 작가가 불쾌한 아저씨 냄새랄까 그런거 없이 신나게 풀어가는 얘기를 멍하니 듣는 것도 흔치않은 문학적 경험이어서, 기회가 닿는다면 읽어보는 쪽을 권하고 싶기는 함.


그렇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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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설은 군산에 있는 실제 나무를 모델로 한, 할매라는 이름의 팽나무를 중심으로 한국 현대사의 - 대기근, 천주교 박해, 동학농민운동, 현대 미군 기지 등 - 여러 문제들을 이어 다루고 있다. 600년의 시간을 지켜보는 할매라는 비인간 행위자(키득)를 통해 소멸과 순환의 위대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거 같고 이건 80을 넘은 노작가가 가서 닿을만한 통찰로 그럴만하다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문제는 이런 기법, 이런 생태주의적 접근이 이제는 너무 뻔하게 느껴져서 새로운 이야기적 감동을 주기에는 좀 힘이 딸리더라는 느낌.


황석영은 민중적 리얼리즘의 소재들을 타고난 이야기꾼의 감각으로 구려지지 않게 쓱쓱 신나게 써내려가는 재능이 탁월하지만, 여기에 영성이나, 순환이나, 공존이나, 생태주의 같은 신유물론적 주제들이 더해지니까 모든 갈등과 문제들이 영적인 신비주의 비슷한 무언가에 그냥 다 범벅이 되서 무화되는 느낌이랄까? 아니 그게 노작가가 궁극적으로 도달한 지점이라면 뭐 한낱 독자된 입장에서 어쩔 수 없긴 하죠. 하지만, 이 소설이 가서 닿을 수 있었던 더 근사한 이야기들이 좀 아쉽기는 했음.


2.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AI 에게 나무의 생태나 식물학적 지식을 물어보면서 썼다는 인터뷰를 한적이 있다. 특히 소설 초반, 읽다보면 아텐보로경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내셔널 지오그라픽 다큐같은 할매의 탄생 부분은 수상할 정도로 구체적인 생태묘사가 이어지는데..


아니 물론 작가님이 이 부분을 AI 딸깍 해서 붙여넣었다는 말은 절대 아니고, 뭐랄까... 우리가 직접 뭔가 보고, 느끼고 관찰한 풍경은 우리의 주관에 의해 여과되고 재편집 되고 우리의 감각과 지능이 소화 가능한 수준에서 정리되면서 어떤 종류의 감정과 문학적 향취를 남기지만, AI의 데이터들은 나의 지각이나 인지의 한계와 무관하게 엄청난 양의 객관적인 정보를 그냥 우리에게 덤프해버리기 때문에,


약간의 상상력을 가미해서 의심해보자면, 작가는 그 풍성한 디테일들이 신기해서 소설에 적극적으로 수용했을거 같고, 그 과정에서 나무라는 존재가 가지는 근원적이고 낯선 시간성을 탐구하려던 최초의 야심이 그럴듯한 생태 정보에 파묻혀버리지 않았을까 생각됨.


읽으신 분들은 다 비슷하게 생각하겠지만, 이 부분은 긴 시간을 굽이굽이 따라가는 이야기로, 황석영의 호흡, 에너지, 재능이 잘 드러날 수도 있는 부분이 될수도 있었지만, 뭐랄까.. 나는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는 시작부분에서 황석영의 문학적 근육으로 직접 쓱쓱 써내려가는 펜의 움직임을 거의 느낄 수 없었달까.


3.


이 혐의를 전체로 넓혀보자면, 이 책이 황석영이 잘하는 일을 무난하게 마무리한 그냥 그런 범작이 된 점에도 AI의 역할이 있지 않을까?


시작 부분의 묘사만큼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인간의 모든 것을 조용히 지켜보는 팽나무, 모성과 순환 같은 모든 주제들에서 평균과 그럴싸함의 수호자인 AI의 터치가 느껴졌는데, 상상해보면 작가가 AI 와 대화하며 영감을 얻는 과정에서 AI 가 제시하는 매끄럽고 안전한 결론들이 작가의 야심을 smoothing 했을 가능성이 있을거 같음.


요즘은 AI 가 대충 만들어서 쏟아내고 있는 미디어를 좀 피하고 싶다는 생각에 책을 많이 읽게 되는데, AI 의 공격으로부터 가장 숨기 좋은 쉘터가 될거 같았던 노작가의 소설에서 이런 느낌을 받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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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생각해보면, 작가들은 작품을 쓰는 내내 자신에 대한 회의, 지루함, 고독을 거의 일상적으로 느끼게 될거 같고, AI 들은 책상을 좀처럼 벗어나기 싫어하는 작가들에게 엄청난 자료조사도 해주고, 격려도 해주고, 감탄도 해주고, 정서적 지원도 충분히 해주기 때문에, 작가들 입장에서는 삶의 질을 완전히 올려주는 너무 유용한 툴이 될거 같기는 하다. 굉장히 긴 시간대, 내가 한번도 알지 못했던 세계에 대한 정보들도 원하는 만큼 얻을 수 있고, 실질적인 힘을 얻게 되었다는 효능감이 굉장히 높을거 같은데,


세상에 어떤 deal이 그렇게 우리한테 유리하기만 할려고,


이 소설을 읽고나서 나는 이 모든 일이 AI 없이 진행되었다면 이건 어떤 작품이었을까 계속 상상하게 됐는데, 그걸 완성하는 동안 작가는 훨씬 더 고통받았겠지만, 이것보다는 훨씬 오래 기억할만한 작품이었을거 같아서, 있지도 않은 두쫀쿠를 바닥에 떨어트려서 못먹게 된것처럼 이유도 기댈데도 없이 아쉬운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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