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lte Liebe Apr 12. 2019

[중년의 사랑] Fast & Furious 3

2. fast and furious.  

중년이 돼서 시작된 사랑 얘기를 해보자는 생각을 처음 떠올렸을 때 내가 쓸 것 같았던 글은 나이에 따라 원숙해진 지혜와 세상을 바라보는 통찰력을 바탕으로 연애의 과정들을 촘촘하게 파헤치는 글. 사랑이 뭔지, 이별이 뭔지, 인생이 뭔지 어느 정도 알게 된 나이에 시작된 로맨스를, 젊은 열정이나 정염에 휘둘리거나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써 내려가는 것이었던 것 같다. 


나는 40대 중반이다. 그 남자는 50대 초반이다. 우리는 둘 다 많이 읽는 사람들이고, 많이 듣는 사람들이다, 정색하고 말하려니 조금 간지럽긴 하지만, 우리는 인류가 쌓아온 지혜들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인간을 이해하고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쏟아왔던 호기심 많은 젊은 시절을 지나왔다. 이건 사실이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우리는 아마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와 셰익스피어의 타이터스 앤드로니커스와 정명훈이 지휘했던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레이디 멕베스에 대한 얘기들을 나눴던 것 같다. 덜 생각나는 몇 가지 다른 얘기들과 함께.  


아. 

내가 그에게 "키가 어떻게 되세요?" 했더니 그가 "잘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한 순간 같은 건, 기억해놔야겠다. 자기 키를 모르는 남자라니 멋지지 않은가! 생각해보면 키를 왜 기억해야 하지? 정말 사소하고 쓸데없는 정보지 않은가. "고등학교 때 처음 쟀을 때는 175였는데요, 나중에 회사에서 건강 검진할 때 보니까 176까지 나오더라고요. 그런데 작년에는..."으로 이어지는 대화로 나갈 수도 있던 위기의 순간을 그는 정말 현명하게 지나쳤다. 아무렇지도 않게,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무소의 뿔처럼.. 으헤헤.   


이 관계를 실패로 점철된 이전의 관계들과 비교해 봤을 때 가장 큰 차이는, 의외로. 


어마어마한 스피드이다. 말 그대로 fast and furious. 


아마도 이 글을 읽는 싱글 여성들은 술잔이 돌아가고, 알코올 기운에 지능의 30% 정도만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깊은 밤이 오면 겨우 시작되는 중대한 토론회에 참여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 토론회의 주제는 물론, "왜 (자기 앞가림 제대로 하고, 성격도 모나지 않은 데다가 외모도 그다지 나쁘지 않은 우리는) 남자가 없는가"이다. 숱하게 많은 원인 분석과 대안이 제시된 이 진지한 심야 토론회들에서 내가 받은 가장 인상적인 신탁은, "소파를 사라."는 것이었다. 


" 생각해 봐. 니가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나서, 쪽팔린 걸 감수하고 "커피 한잔 하면서 아이폰 충전하고 가실래요?"  같은 여우짓을 했다 쳐. 그 남자가 너네 집 가면 어디 앉아있겠니? 책상머리에 있는 의자에 앉아야 되쟈나. 그 책상에서 무슨 연애 감정이 생기겠니. 게다가 그 남자가 너네 집에 있는 하나밖에 없는 의자를 차지하면 너는 어디 앉아야 되는데? 안절부절하면서 왔다 갔다 자리를 못 잡겠지. 그래서야!!(소리 높임) 무슨 진도가 있으며 무슨 미래가 있겠어." 


"그런 것입니까?!" 


"소파를 사라. 일단. 그렇게 돼야 남자고 관계고 뭐고 생길 수 있는 거야."


아테네 여신의 단호한 신탁에도 불구하고, 소파를 사는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는데, 일단 그런 신탁까지 받고 나니 더더욱 소파를 산다는 일이 좀 너무 속 보이는 거 같았달까...'이 좁은 거실에 소파가 있으면 너무 노골적인 유혹의 사인처럼 보일 수도 있어..라는 식으로 생각이 흘러갔던 나에게는 '소파를 산다.' 는 일이 망사스타킹을 신고 벌레스크 댄스를 추는 것만큼이나 뭔가 수줍은 일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단언하건대. 소파는 필요 없었다. 그는 편안하게 집으로 들어와서 거실의 책장들을 둘러보면서 잠시 대화하다가 의자에 앉았다. 나는 물론 안절부절하면서 커피를 준다든지 음악을 틀어준다든지 하는 수선을 떨긴 했지만, 그는 손을 잡아서 나를 진정시켰고, 안았고, 키스했고, 소파단계 없이 침실로 향했다. 천국은 꼭 연옥을 거쳐야만 갈 수 있는 건 아닌 것이다. 


그래, 섹스. 


첫 섹스를 하고 나서 내가 그에게 말했다. 


" 일본에 가면 자기를 모시는 신사 같은 것도 있어? 첫 섹스를 하기 전의 남자들이 가서 차와 향 같은걸 바치면서 절을 한다든지." 


"없을걸?" 


" 그럼 내가 내일 일찍 일어나야겠네. 집 앞에다 오늘의 섹스를 기념하는 교회를 지어줄께." 


사랑에 빠진 뇌는 도파민을 생성한다. 도파민은 테스토스테론을, 테스토스테론은 성욕을 불러일으키고.. 그런데다가 내 남자는 굉장한 섹스를 한다. 음.. 이런 문장을 너무 자랑하는 느낌이 없이 쓰려면 어떻게 해야하지? 낮에는 회사에 가야한다는 점과, 한달에 5일 정도 있는 어쩔 수 없는 기간, 그리고 그와 나의 나이를 감안하면 꽤 기록할만한 횟수의 섹스를 했다. 


그를 처음 만나고 첫 섹스를 하는데까지는 일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고, 첫 섹스를 한 후에 그는 거의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패스트 앤 퓨리어스. 


그리고, 도파민은 우리를 꺠어있게 한다. 난 우리가 거의 잠을 자지 않고 버티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도 내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라는 걸 확실히 알지는 못했다. 단지, 어떤 좋은 꿈을 꿔도 그와 함께 깨어있는 것보다 좋을 수 없기 때문에 잠을 선택하지 않는 줄만 알았던 거지. 



  







매거진의 이전글 [중년의 사랑] Fast & Furious 4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