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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te Liebe Apr 12. 2019

[중년의 사랑] Fast & Furious 2

1.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1.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태초에 말씀이 있었으니..


신은 세상을 언어로 창조했다. 내 유년기를 장악했던 신은 확실히 그러했다. 신이 세상을 언어로 창조했다는 사실은 빅뱅이 일어나고 별들이 생겨나고 초신성 폭발에 의해 물질들이 만들어졌다는 얘기에 비해 얼마나 강렬하고 아름다운지. 주일학교 시절 나는 평화와 안정이 필요할때 신이 아직은 갈라지지 않은 물들이 가득찬 어둠 속을 조용히 떠다니다가, 문득 뭔가 중요한걸 잊었다는 듯한 표정이 얼굴에 잠시 스치고, 조금 한숨을 내쉰 후에 빛이 있으라 라고 나지막히 속삭이던 순간을 떠올리곤 했다. 손에 쥘 수 있을 것 같은 작은 빛이 눈앞에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세상으로 퍼지는 그런 느낌.


유대교의 성인식은 어른이 된 아이들이 히브리어로 경전을 읽는 일로 마무리된다. 말과 언어로 세상을 만들어낸 신들의 직계 자손 답다. 유대교의 성인식을 바 미쯔바 Bar Mitzvah 라고 하는데 이는 계명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입밖으로 뱉어낸 말들은 율법에 대한 책임감을 만들고, 그 책임감이 어른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을 창조한 바로 그 언어가, 연인들을 만든다. 시라노의 연애편지가 당치도 않은 사랑을 이뤄냈다는 이야기를 처음 읽었던 때부터 지금까지도, 나는 언어 속에서 로맨스를 채굴해내는 사람들만이 도달할수 있는 어떤 사랑의 특별한 경지가 있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21세기. 카카오톡과 틴더의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의 생각으로는 아무래도 좀 부적절한 것 같기도 하고, 설령 요구한다고 해도 에너제틱하게 솟아오르는 로맨틱한 영혼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사랑의 고백같은 걸.. 받아볼리가 없지 않겠는가. - 한국에서 보통의 남자들에게 받게되는 연애편지란, 선물의 크기에 비해 터무니 없이 작은 - 아마도 보통은 우표 4장 정도의 사이즈일까? - 카드에 " **야. 정말 사랑해!!! " - 그리고 사랑하는 만큼의 (혹은 공간이 허락하는 만큼의) 느낌표!!


2.

처음 그를 만나고 돌아온날 그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밤인사를 인용해서 카톡 메시지를 보냈고, 비가 오는 날에 내가 보낸 프로스트의 시를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는 우리집에 처음 왔을 때, 내 책장에서 자신이 갖고 있는 것과 같은 책을 발견하고 진심으로 기뻐했고, 그 책이 아주 유명한 책은 아니었기때문에, 그건 다소 오바해서 말하자면, 운명의 별이 머리위에서 빛나는 것 같은 아주 좋은 싸인이었다.


하지만 어느 현자의 말처럼 "니가 좋아하는 쓰레기를 그가 같이 좋아한다고 해서 둘이 운명의 상대는 아닌 법. 하지만 다른 존재의 안에서 빛나는 나의 어떤 면을 발견하는 경이의 순간을 누가 무시할 수 있을까?


그는 언어를 사랑한다. 그는 책을 아주 많이 읽는 사람이고, 읽을 것의 리스트가 계속 늘어나고 있는 사람이다. 새로운 도시에 가면 책방에 들르고 싶어하고, 처음 만났던 순간에도 그는 와인바에서 나를 기다리면서 책을 읽고 있었다. 머리속에 담겨져있는 인상적인 스냅샷 중에 한장은 나란히 앉아서 책을 읽다가 문득 바라본 그 친구의 모습이다. 책에 집중하고 있는 옆모습에 대한 기억은 관계에 소중한 양분이 된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 순간 나는 "내 남자친구는 책을 읽어!! "라고 외치면서 골목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정도로 감동했다는 쪽에 더 가깝겠지만,


아 그리고 어느 아침엔가는 아침에 화장실을 쓰면서 음악을 틀어놓고 들어갔는데, 나오니까 그가 노래를 흥얼흥얼 따라부르고 있었다. 그 때 나오던 음악은 서푼짜리 오페라에 삽입된 Mack the knife 의 독일어 버전이었는데, 그 순간 머리속에 도파민 둑이 와장창 무너지면서 뇌가 제 기능을 상실했다. "어머, 나 이 노래를 부를줄 아는 남자랑 연애하고 있는거야?"


같은 음악을 좋아하고, 같은 책을 읽는건 어째서 그렇게나 매력적인 것일까. 서푼짜리 오페라는 유명한 작품이고, 맥더 나이프는 연극 자체보다도 더 유명한 노래이다. 굳이 독일어가 아니라면, 루이 암스트롱부터 마이클 부블레에 이르기까지 수 없이 많은 가수들이 이 노래를 불러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마도 따라부를 수 있는 사람들도 수백만, 수천만에 이를 것이다.  


만약에 그 노래가 맥 더 나이프가 아니라 김광석이나 유재하의 노래였다면 어땠을까? 내 침대에 누워서 유재하를 흥얼거리는 남자였다고 해도 물론 좋았겠지만 간신히 막아놓고 있는 도파민 둑이 터질 정도였을까? 왜 이 노래는 운명의 별을 밝히고 유재하의 노래는 그렇게 안될까? 희소성이란 그렇게도 중요한 걸까? 독일의 어느 침실에서는 한국 노래에 빠져든 한 독일 여성이 김광석을 따라부르는 아시아 문화에 해박한 남자친구에게 반하고 있을까?


진화 심리학자들이 뭐라고 하건간에, 사랑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매우 중요한 순간은 상대방의 안에 있는 나를 발견하는 순간이 아닌가 싶다. 서로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라면서, 다른 교육을 받고 다른 친구들을 만나고, 다른 경험을 한 상대방의 내면에서 내가 사랑하는 것들, 내가 해온 일들, 내가 생각하던 것들을 찾아 내는 것만큼 관계의 확신을 주는 것이 또 있을까? 우리는 어쩌면 상대방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좋은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은게 아닐까? 나는 그동안 많은 실패와 어려움을 겪으면서 그저그런 성취만을 해온것 같았는데, 실은 꽤 괜찮은 삶을 살았고, 다른 사람들을 매혹시킬 만한 좋은 것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확인하고 싶은건 아니었을까?  


아니, 사실 솔직히 말하면 이 사람은 나와 전혀 비슷하지 않다. 내가 이 남자가 9개 언어를 할 줄 안다고 말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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