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에 올린 글의 조회수가 30,000을 넘었다
가족들의 저녁식사를 준비하는데 브런치 알림음 울린다. 내가 올린 글의 조회수가 1000을 넘었다는 알림이었다. 으잉? 하는 사이 또 알람이 울린다. 이번에는 조회수가 3000을 넘었다고 알렸다. 큰딸이 엄마 핸드폰에 무슨 광고가 그렇게 계속 오냐고 묻길래 그러게 하고 둘러대고는 알람을 꺼두었다. 식사를 다 하고 설거지까지 마치고 나서 다시 핸드폰을 보니 이런 알람이 도착해 있었다.
브런치 글 조회수가 30,000을 넘었습니다.
정확한 문장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30,000이라는 숫자는 정확하게 기억이 난다. 삼만? 내 글을 삼만명이나 읽었다 말이야?
친구들 사이에서 왕따 아닌 왕따가 된 것을 알고 나서 마음이 어지러워 쓴 글이었다. 이렇게라도 풀어내지 않으면 자꾸만 그 생각으로 침잠해서, 그럴바에는 차라리 내 마음을 다 게워내 버리자 하는 마음으로 글을 썼었다. 그런데 그 글이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읽히다니 놀랍고 신기했다. 그리고 생각해보았다.
사람들은 왜 그 글을 관심을 가졌던걸까?
내가 브런치를 시작하고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나를 비롯한 상처받은 엄마들의 치유를 위한 것이었다. ‘엄마 치유’라는 제목을 달고 올린 몇 편의 글들은 꽤 오랜 시간 책을 읽고 고심하고 문장 하나하나를 다듬으며 쓴 글이었다. 그 중 한편의 조회수가 30을 넘었을 때 나는 뭔가 모를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내 글을 읽은 것을 보고 궁금함이 들었다. 검색을 해보니 아마 그 글이 포털사이트에 노출이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독자들이 접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아마 그 영향이 가장 컸던 것 같다. 그런데 그게 다는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 역시도 인터넷에 올라오는 수많은 글들 중에 관심이 있는 글만 선택하여 읽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그 글을 왜 선택했을까? 일부는 마흔살 아줌마가 웬 왕따? 하는 궁금증에 글을 읽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몇몇은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글을 읽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그 글이 많은 독자들에게 읽혔던 이유는 아마도 다른 사람들도 역시 인간관계가 쉽지 않아서 일거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며 사람들은 많은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그 속에서 살아간다. 그런데 그 관계 맺기라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많은 책과 전문가들이 관계에는 적당한 거리가 중요하다고 하는데 대체 그 ‘적당한 거리’가 얼마만큼 인지 도무지 알기가 어렵다. 영희랑은 50cm정도 거리를 두면 적당하다고 생각하고 다가갔는데 막상 가보니 너무 가까워서 부담을 느꼈다. 철수랑은 1m정도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멀어서 어색해져 버렸다. 그러니 관계라는 것이 어려울 수밖에. ‘영희와 철수는 얼마만큼의 거리를 두면 좋습니다.’ 라고 알려주는 요술안테나가 있으면 좋을 텐데 라는 말도 안되는 생각도 해본다.
모임에서 나간 A가 자신의 결혼식에 나만 부르지 않은 사실을 알고 나서 인간관계에 관련된 책을 셀 수 없이 읽었다. 유튜브에 올라온 유명 강사들의 강의도 매일 들으며 내 마음을 살폈다. 그렇게 시간을 가지고 돌아보니 그 일을 겪으며 내 마음이 여러 단계를 거쳐왔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엔 화가 났다. 나만 빼고 어떻게 이럴수가! 하는 분한 마음에 밥을 하다가도 책을 읽다가도 산책을 하다가도 문득문득 그 생각에 빠져 분노했다. 그리고 슬펐다. 외톨이가 된 기분, 믿었던 친구들에 대한 배신감, 그러면서도 남은 친구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이어가야 고민 하는 내 모습이 나를 더욱 슬프게 했다.
그런 폭풍같은 강한 감정들이 지나가자 두 번째 단계에서는 자책을 했다. 그때 그러지 말걸, 왜그렇게 눈치 없이 굴었을까, 내가 그때 한 말이 A에게 상처를 주어서 그랬을까 등등. 그렇게 있는 생각 없는 생각 다 떠올리며 자책하다보니 한동안 내 속이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렇게 자책을 하다보니 덩달아 조금씩 성찰이 되었던 것 같다. 폭풍같은 감정의 단계를 지나고, 자책을 하고 나니 조금이나마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힘이 생겼다. 정말 다 내 잘못일까? 우리가 안 세월이 몇 년인데, 서운하면 나한테 귀띔이라도 해주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러다 보니 차츰 그 사건이 수용되기 시작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A도 그럴만한 상황이었을 것이고, 나 역시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그래도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들도 있는걸 보니 문제만 있는 사람은 아닐거라고.
그렇게 많은 단계를 거치고 드디어 깨달았다. 모든 관계의 중심에는 우뚝 서 있는 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예민하고 소심한 성격이었다. 그래서 누가 어떤 말을 하면 그 사람이 내게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혼자 온갖 상상을 해가며 의미를 끌어 붙였다. 남에게 들은 기분 나쁜 말이 있으면 곱씹고 곱씹으며 혼자서 상처받고 끙끙 앓곤 했다. 남이 내게 준 쓰레기 봉지를 버리지 못하고 계속 열어보며 더럽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유튜브 <유세미의 직장수업>을 듣다가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지하철 문에 보면 ‘기대지 마시오’라고 쓰여 있는데 사람 사이의 관계도 이와 같다고. 지하철 문에 기대어 있다가 문이 열리면 중심을 잃고 쓰러질 수 있기 때문에 문에 기대지 말라고 하는 것처럼, 타인에게 기대어 있다가 타인이 떠나버리면 나 역시도 넘어지게 된다고. 지금 내게 너무나도 필요한 조언이었다.수많은 관계들 속에서 상처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지만 내가 내 두발로 바르게 서 있을 때 넘어지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완전히 기울어져 쓰러지지는 않을 테니까.
어쩜 나이 마흔이 될 때까지 이걸 몰랐을까. 아마 타인의 눈치를 살피고, 남들의 인정을 바라는 내 안에 어린아이와 같은 유치한 마음이 남아있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내 안에 남아있는 내면아이에게 다가가 이제는 성장할 때가 되었다고 이야기 했다. 그동안은 아픈 상처를 치유하는데 우선순위를 두었지만 그제 그 상처가 많이 아물었으니 성장을 향해 나아가야 할 때라고.
내게 성장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다. 그저 남의 말에 조금 덜 흔들리는 것, 때때로 터질 것 같은 감정을 무심하게 바라볼 줄 아는 것, 지나간 일들에 대한 기억에서 벗어나 지금의 삶을 살기위해 노력하는 것, 남과 비교하는 삶이 아닌 나의 삶을 묵묵히 걸어나가는 것. 어찌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일 수 있지만 지금 내게 꼭 필요한 것들이다. 얼마전부터 나는 이것들을 목표로 조금씩 연습을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몇 년 후엔 자연스러운 나의 일부가 되어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희수야, 다시 말하지만 인생이란 너무 눈부시게 살 필요는 없다. 오히려 눈에 잘 뜨이지 않지만 내용이 들어 있는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것은 결단코 남과의 비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느끼고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만들어 살아가고 어딘가 빛을 만들며 사는 일, 그것이 아름다운 삶이라고 할 수 있지.
신달자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
신달자 선생님의 책 제목처럼 나는 마흔에야 비로소 생의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했다. 언젠간 걸음마를 시작한 그 다리가 튼튼하게 자라 혼자서도 우뚝 설 수 있게 되길 바라며, 그렇게 나는 오늘도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느리지만 단단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