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의 아픔속에서 진짜 나를 찾아가기
나와 A는 고등학교 친구였다. 나와 A를 포함하여 다른 친구 3명까지 우리 5명은 각자 다른 대학에 진학하고 서로 다른 직업으로 사회에 나가서도 꾸준히 연락하며 만남을 이어갔다. 서로의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풀고, 맛있는 음식점을 찾아가고 때때로 여행도 함께 가는 이 친구들과의 모임은 나에게 둘도 없는 소중한 만남이었다.
이런 만남에 변화가 생긴 것은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부터였다. 친구들 중 가장 먼저 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나는 그 친구들과의 만남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이 나를 배려해주었음에도 육아라는 현실적인 한계 속에서 나는 이전과는 다른 ‘엄마’라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일 년에 몇 번 없는 친구들과의 모임자리가 내게는 손꼽아 기다리는 날이 되었다. 아이들을 남편에게 맡기고 친구들을 만나러 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이야기도 나누고 오는 날엔 그동안 쌓인 육아 스트레스가 한 번에 다 날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모임에서 회비를 담당하고 있는 친구 B가 A가 더 이상 이 모임에 나오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밝히며 그동안의 회비를 돌려받고 싶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우리는 모두 충격에 빠졌다. 대체 무슨 이유로 모임에서 나가는 것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그렇게 A와의 인연은 끝이 났다. 오랜시간 ‘친구’라는 이름으로 지냈는데 이렇게 한순간에 그 관계가 끝이 난다는 것이 내게는 꽤나 큰 상처로 남았고, 그렇게 A를 제외한 나머지 4명은 이전과 같은 관계를 이어갔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 다른 친구 한명이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결혼식에 친구 A가 참석을 했다. A를 보는 내 마음은 반갑기도 했지만 묘한 마음도 들었다. 결혼하는 친구와 A친구는 연락을 하고 지냈나? 하는 의문이 마음속에 들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후에 회비를 담당하던 친구 B를 만나 조심스레 A의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A가 다른 친구의 결혼식에 와서 좀 놀랐고 그 친구가 A 친구와 연락하고 지냈는지 몰랐다고 했다. 그러자 B친구도 내게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그동안 A친구가 결혼을 했고 나를 제외한 세 명의 친구는 A친구의 결혼식에 다녀왔으며 그 사이에도 몇 번 서로 만남을 가졌다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얼음이 되었다. 정말 말 그대로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럼 A친구가 모임에서 나간 이유가 바로 나 때문이었단 말인가? 그리고 그동안 다른 친구들은 그 사실을 나에게 비밀로 했었단 말인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셀수없이 많은 감정들이 내 속에서 일어났다. 배신감, 서운함, 자책, 바보가 된 기분 등등 너무나 많은 감정들이 얽히고 설키며 나를 집어삼켰다. 잠깐 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내게 B는 위로가 담긴 어떤 말을 해주었던 것 같은데 B의 이야기는 듣기엔 나를 둘러싼 감정의 벽이 너무나 두껍고 혼란스러워 내 귀에까지 닿지 못했다.
그렇게 B와 헤어진 뒤 나는 그때를 다시 떠올려보았다. 초보 엄마였던 나는 그 친구들을 만날 때면 잠시나마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역할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친한 친구들을 만난다는 사실도 좋았지만 엄마역할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설레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의 자유에 취해 다른 친구까지 신경 쓸 마음을 남겨두지 못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다른 친구들은 관심도 없는 아이 키우는 이야기나 시댁 이야기 등 내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고는 ‘아 이렇게 다같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니 정말 좋다’ 하고 느꼈던 것 같다. 사실 이야기를 나눈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벽을 쌓고 있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나는 나의 외로움, 자만심, 우월감으로 포장한 열등감, 이기심 등을 낱낱이 살펴보게 되었다. 그 친구들을 만나며 나는 유치하게도 학창시절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자부심처럼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오래된 친구라면 무조건 모든 것을 이해해주고 받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그런 관계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더군다나 정작 나는 다른 친구들에게 그런 존재가 되지 못하면서도 나의 이기심을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처음엔 나를 제외한 A와 친구들이 만났다는 것을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하지만 조금 더 지나고 생각하니 상처받았을 나를 배려하기 위해 서로 조심하느라 얼마나 애썼을까 참 고맙다 하는 마음이 올라왔다.
그리고 또 하나 깨달은 것이 있다면 어떤 관계도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연이라는 것은 붙잡는다고 붙잡아지는 것도 아니고 떠나라고 떠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언제나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도, 상대도, 상황도 언제나 변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오직 ‘모든 것은 변한다’는 진리 뿐이라는 말을 다시 새겨 보았다.
이번 사건으로 나의 이중성 또한 여실히 볼 수 있었다. 과거에 나 역시도 마음 맞지 않는 여러 사람들과 연락을 끊고 지냈다. 일부러 피하기도 했고, 연락을 받더라도 시큰둥하게 반응함으로서 ‘나는 너와 잘 지낼 마음이 없다’는 분위기를 은연중에 풍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태도를 보이면서도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우리는 서로 맞지 않는 사람이고 맞지 않는 사람과 스트레스 받아가며 인연을 이어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이렇듯 나는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에게 냉랭하게 대해 놓고는 누군가가 나를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에는 왜 이리 분노하고 슬퍼하고 감당하기 어려워하는 것이었을까. 이것은 나는 되지만 너는 되지 않는다는 말도 안 되는 나의 이중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는 마치 나도 누군가에 대해 험담을 한 적이 있으면서 남이 나를 험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별개로, 이 일로 인한 나의 아픔은 정말로 신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듯한 고통이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생각이 떠오를 때면 마음뿐만 아니라 몸에서고 고통이 느껴지는 것을 분명히 감지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의 자만심이나 열등감, 외로움, 이기심은 정말 오랜 시간 나와 함께 자라왔고 자연스럽게 나의 일부로 존재하고 있었기에 이것을 털어낸다는 것은 나의 한 부분을 떼어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들을 언젠가는 떼어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직면 할 용기가 없어 모른 척 밀어두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그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그렇게 몇날며칠을 괴로움과 싸우던 중 문득 나는 이 아픔이 과거에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주었던 아픔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동안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수도 없이 많은 상처를 주었다. 그리고 때로는 일부러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줘 놓고도 모른척 외면해 버린 적도 있었다. 내가 타인에게 준 상처는 타인의 잘못 때문이 아니었다. 그렇게 포장하곤 했었지만 사실 그것은 나의 상처를 남에게 투사한 것뿐이었다. 이번 일을 통해 뼈아픈 고통을 느끼면서 나는 그동안 내가 타인에게 주었던 아픔을 되돌려 받고 있는 중인 것이다. 이런 마음이 들자 나는 이 아픔을 피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대신 이 아픔을 온전하게 느끼고 아픔이 느껴질 때마다 내가 상처 주었던 사람들을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용서를 구하기로 했다.
나는 친구들이 나의 모든 부분을 이해해주고 인정해주기를 바랐다. 아마도 어린시절에 부모님으로부터 채우지 못한 인정을 주변사람들로부터 채우고자 하는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 얼마나 유치하고 미숙한 생각인가. 어떤 누구도 아무 조건 없이 다른 사람에게 잘해주는 일은 거의 없다. 하물며 나 역시도 친구들에게 무조건적으로 잘해주지 않았다. 어찌 보면 나를 인정해주는 대상이 필요했기 때문에, 내게 소속감을 주는 모임이 필요했기 때문에, 나의 외로움을 달래줄 상대방이 필요했기 때문에 관계를 이어나갔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은 나의 내면에 있는 외로움과 공허함과 인정욕구를 달래기 위한 이기심이 일으킨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나약한 나 자신 때문에 열등감을 느꼈고, 그래서인지 내가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좀이 쑤셨다. 무력한 자신을 숨기고 부정하며 그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약함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자, 긴 인생의 짐을 내려놓은 듯한 편안함이 찾아왔다.
코이케 류노스케 <나를 버리는 연습> 중
부끄럽지만 과거의 나는 내세우기를 좋아했다. 별것 아닌 시시콜콜한 것까지 자랑거리로 만들어 남들이 나를 치켜세워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런 나의 마음은 나약함을 가리고자 하는 얄팍한 속임수에 지나지 않았다.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나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지혜란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이라는 말처럼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고,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보고,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보는 것. 그런 지혜야 말로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였다.
나는 그 일을 기회로 아픈 만큼 더 성숙해지기를 바란다. 물론 여전히 그 기억은 나를 힘들고 아프게 하지만 세상이 애써 열어준 상자를 또다시 불행으로 채우고 싶지는 않다. 오랫동안 담아둔 이기심, 외로움, 열등감을 말끔히 비우고 이제는 새로운 것들로 상자를 채우고자 한다. 가능하면 이번에는 배려와 지혜, 수용과 인내 등으로 그 상자를 채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