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은 어린시절의 기억을 안고사는 엄마들의 치유를 위하여
이 책의 저자인 마가스님은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이 책을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참 많이 울었다. 스님의 아버지는 스님이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 이웃집 아주머니와 도회지로 나가서 살림을 차렸다고 한다. 이런 아버지에 대한 스님의 분노는 고등학생 시절 절정에 다다라 결국 아버지를 미워하다 못해 증오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아버지는 공부도 하지 않고 친구들과 어울려 말썽을 부리며 잘못된 길을 가는 아들을 보면서 안타가워 했지만 스님은 오히려 그런 아버지를 지켜보면서 희열을 만끽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주었던 상처를 아버지에게 똑같이 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많은 아픔을 가진 스님에게 당시 마음의 의지처가 된 유일한 곳은 교회였기에 스님은 목사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제가 목회자의 길을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교회에 찾아가 항의했고, 그 일 이후 저는 아버지를 더욱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나머지 터무니없게도 저는 이런 결심을 했습니다. ‘내가 자살하면 아버지가 평생 후회하면서 살겠지’. 결심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저는 1년 동안 수시로 약국을 찾아갔습니다. 이윽고 수면제 일흔 알을 모았고 저는 강원도로 향했습니다. 깊게 심호흡을 한 뒤 준비한 수면제를 주머니에서 꺼냈습니다. 열 알, 스무 알씩 수면제를 나눠 입안에 털어 넣고 물을 마셨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요? 저는 월정사에서 의식을 되찾았습니다. 산에서 죽어가는 저를 한 스님이 발견하고서 그곳으로 데려온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스님은 출가를 하였다고 한다. 목사님이 되려다 스님이 된 이야기가 신기하기도 했지만 그 당시의 스님의 마음을 떠올리니 정말 마음이 아팠다. 아버지에게 상처를 주기위해 자신을 목숨까지도 버리려고 한 스님의 솔직한 경험담에서 나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 역시도 아버지와의 갈등이 심했던 사춘기 시절 죽음을 생각한 적이 있었다. 당시 나의 상황이 내겐 너무 벅차고 아무 희망이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님처럼 나의 죽음으로 아버지에게 상처를 주고 복수해야겠다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다만 용기가 없었고 힘들게 살고 있는 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움에 나의 그 생각은 실행에 옮겨지지는 못하였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되고 엄마로 살면서 나는 내가 과거에 자살을 생각했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상담시간에 과거를 탐색하면서 그 일이 문득 다시 수면위로 떠올랐다. 나의 경우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공격성으로 나타난 것이었는데, 그 시절 나는 아버지를 죽이고 싶을 만큼 아버지가 미웠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아버지를 죽일 수는 없었다. 나는 그럴 힘도 없고 그것이 용납되지 않는 행위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현실적인 답을 찾았다. 그것은 아버지를 죽이는 대신 나 자신을 죽이는 것이었다. 실제 행위로 이어지지 못했지만 이것이 그 때의 솔직한 나의 마음이었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 그 때를 돌아보면 나의 그런 어리석은 생각이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때, 분노와 슬픔에 마음이 잠식되어 있던 그 때에는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할 수 있는 판단능력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처럼 마음이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차면 거기에 눈이 멀어버린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스님의 이야기에 더 크게 공감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우연한 인연으로 출가를 하였지만 스님은 불쑥불쑥 올라오는 정체모를 화 때문에 제대로 수행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 화의 정체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였다. 무언가에 화가 나 있을 때 좀처럼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경험은 누구나 해보았을 것이다. 화가 오랫동안 쌓인 분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나 역시 아이들을 키우면서 불쑥불쑥 찾아오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수도 없이 만났다. 그것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나를 찾아와 나를 힘들게 만들었다. 나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 오랜시간을 헤매었다. 상담에서 이 문제를 다루기도 하고, 관련된 책을 찾아 읽어보기도 하고, 주변에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태안사에서 한 달 반 정도 수행하면서 저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을 떨쳐낼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마음의 감옥에 가두는 대신 마음의 감옥에서 탈출시킴으로써 그것이 가능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예불을 마치고 석양이 물든 경내를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습니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제 입에서 이 한마디가 불쑥 튀어나왔습니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이 글귀에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나왔다. 싫어하다 못해 증오의 대상이던 아버지. 아버지에게 상처주기 위해 나의 목숨을 끊을까 생각하게 만들었던 그런 아버지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 스님의 이야기가 내 마음을 울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용서란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내가 아버지에 대한 나의 원망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용서였다. 내가 지옥 같은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용서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나의 경우에는 이 용서가 단번에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내가 부족하고 마음이 좁아 그렇겠지만 용서 이전에 나에게는 ‘충분한 원망의 시간’이 필요했다. 어설픈 용서는 상처를 대충 덮어놓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나는 과거의 일들이 떠오를 때 그 때의 나의 마음을 바로 보고 다루고 정리했다. 이 작업들은 혼자서 이루어졌다. 혼자 가만히 생각하고 감정을 되짚어보고 마음껏 울었다. 그렇게 기억에 대한 정리가 이어지면서 점차 떠오르는 기억들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어느 날 나의 마음속에서 아버지에 대한 감사함이 올라왔다. 살면서 아버지에게 감사하게 될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저 아버지가 내 아버지라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꼈다.
만약 평화로운 삶을 살고 싶다면 먼저 마음의 상흔을 바로 봐야 합니다. 상처를 마음속에 단단히 가둬두려고 하면 응어리를 풀 수 없습니다. 상흔 자리를 살펴본 뒤에야 마음의 상처가 진주보석처럼 영롱하게 빛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시린 아픔을 감내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추울수록 매화 향기가 그윽해지듯이, 뼈아픈 고통의 자리를 발견한 뒤에야 삶은 더욱 성숙할 수 있습니다.
‘뼈아픈 고통의 자리를 발견하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은 아니다. 아픈 나의 상처를 보는 것은 정말 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그것이 필요한 이유는 오직 나를 위해서이다. 나를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서이다. 음식을 잘못 먹고 체했을 때 우리는 다른 음식을 먹을 수 없다. 일단 체한 것을 내려주고 소화를 시켜주어야 새로운 음식을 받아들일 수 있다. 나는 마음도 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마음에 어떤 상처가 걸려 체하면 다른 것들을 소화시키기가 더 힘들어진다. 다른 감정들도 자꾸 그곳에 걸려 순환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단 먼저 체한 그 감정을 풀어주어야 한다. 내 마음을 위해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 뿐이다.
책을 읽고 마음의 체기를 좀 내린 후에 아버지를 만났다. 어머니가 김밥을 만드시면서 우리 아이들 먹을 것까지 함께 만드셨다고 김밥과 열무김치를 싸서 아버지 편에 보내셨다. 일흔이 넘은 아버지는 지하철비용이 들지 않는다며 종종 배달부를 자처하신다. 그렇게 딸에게 줄 반찬거리를 들고 오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데 문득 나는 아버지와 나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이 허물어진 느낌이 들었다. 과거에는 아버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조차 어색한 적이 많았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랐고 특별히 나누고 싶은 이야기도 없었다. 그런데 내가 마음의 감옥에서 나오고 보니 아버지를 대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편안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아버지의 낡은 잠바가 눈에 들어왔다. 지퍼부분이 다 헤어진 아버지의 점퍼에서 그동안 녹녹치 않았던 아버지의 삶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새 점퍼를 사드려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그동안 어머니에게는 이런저런 선물을 보내드렸지만 아버지에게는 변변한 선물을 사드린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괴로움은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어떤 대상에게 공포를 느낀다든지, 누군가에게 억압당하는 느낌이 든다든지, 누구를 시기하거나 질투한다든지 하는 불쾌한 감정은 그 대상이나 사람에 대해 이전에 품었던 마음을 고수하려는 데서 옵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은 시시때때로 변합니다. 우리가 공포나 질투나 시기를 느꼈던 대상이나 사람 역시 계속 변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예전의 그 물건이나 사람이 아니란 뜻입니다. 그러니 과거의 감정을 이제는 더 이상 붙들고 있을 근거가 없는 것이지요. 단지 우리가 이 사실을 모르거나 거부하며 스스로 불행을 만들고 있을 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변한다. 사람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변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변하고 있다. 처음 상담을 공부할 때 한 수업에서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자신이 왜 상담을 공부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레포트를 써오라고 하셨다. 그 때 나는 유년시절의 상처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고 그것을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심리와 상담에 관심을 갖게 된 과정을 기술하였다. 교수님은 레포트를 돌려주시며 코멘트를 달아주셨는데 어린시절 나의 아픔에 대한 위로와 함께 과거에 대한 나의 해석이 시간이 지나면 계속해서 변화할 것이라고 이야기 해주셨다. 그 때는 그냥 그런가 하고 생각했던 교수님의 말씀이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에 남는다. 그저 밉기만 하던 아버지를 보는 나의 해석은 교수님 말씀처럼 시간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상처만 주었던 아버지에게 무엇이 고마웠는지 내게 묻는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어쨌든 나는 아버지를 통해 이 세상에 나왔고 아이러니하긴 하지만 아버지와의 갈등이 있었기에 마음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고. 편안하고 안정되게만 살았다면 나는 상처를 통해 성장하는 삶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상처 없이 성장한다면 더 좋겠지만 나는 그렇게 지혜롭지는 못하다. 어쩌면 그래서 세상은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일깨워주기 위해서.
이 책을 쓰신 마가스님은 이런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은 부부와 가족을 대상으로 한 자비명상 템플 스테이를 진행하고 계신다고 한다. 마음속에 맹렬한 분노의 불꽃을 끄고 나니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고맙게 느껴져 이러한 감사한 마음을 세상에 다시 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도 부족하지만 아픔을 넘어서면서 조금이라도 따뜻해진 내 마음을 누군가의 상처를 치유하는 햇살로 쓰고 싶다. 우리가 이렇게 서로에게 햇살을 비춰줄 때 우리의 마음은 그리고 세상은 더 따뜻한 곳이 될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