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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 Oct 21. 2020

엄마 치유

상처받은 어린시절의 기억을 안고사는 엄마들의 치유를 위하여

다나카시게키 <내 아이를 믿는다는 것>을 읽고


 아이엄마들과 모임을 가졌다. 모임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아이들 교육에 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누구네 아이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이미 중학교 수학을 공부하고 누구네 아이는 영어를 배우기 위해 외국으로 떠났다고 했다. 아이들은 하루에도 몇 군데의 학원을 다니며 영어, 수학, 운동, 논술 등을 배우고 있었다. 그렇게 모임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하루종일 티비앞에서 시시덕거리는 우리집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내가 굳이 꺼내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하루종일 티비만 본다는 잔소리와 함께 집은 왜이리 엉망이냐, 학원 숙제는 다 했느냐 등등 한바탕 잔소리타령을 하고 말았다. 아! 이러지 말자고 해놓고 내가 또 내 불안에 점령당해버리고 말았구나 후회해봤자 때는 이미 늦어있었다. 이 책은 그런 상황에서 만나게 된 다행스런 우연이었다.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쏟아 내 놓고는 어지러운 마음으로 도서관에 갔다가 우연히 이 책을 발견했다. 어쩌면 뻔한 제목이어서 평소 같으면 별로 눈길도 주지 않았을 법 한데 그땐 아이들을 믿는 것이 꽤나 필요한 상황이어서 이 책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책 첫머리에 나오는 에피소드가 참 재미있다.

 이 책의 저자는 의사이자 네 아이의 아빠라고 한다. 큰아들이 자꾸 학교에 지각을 하자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이 저자를 불러 아이를 좀 일찍 학교로 보내줄 것을 당부한다. 그런데 이 아빠의 대답이 남다르다. 대부분의 부모라면 선생님께 죄송하다며 다음부터는 아이를 일찍 보내도록 하겠다고 이야기 할 텐데 이 아버지는 오히려 선생님에게 “저희 아이가 등교를 거부하고 있는 학생이라고 생각해주시면 어떨까요? 등교를 거부중인데도 늦지만 매일 학교를 나오고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선생님도 편해지시지 않을까요?” 라고 대답을 했다. 순간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왔다. 이 아버지가 정말로 자신의 아이를 믿어주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뿐이 아니다. 등교거부에 대해서도 저자는 내가 이제껏 봤던 많은 책들과는 아주 다른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대개 등교 거부 문제로 아이가 괴로워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부모는 큰 충격을 받는다. 그래서 당장 아이를 학교에 돌려보내서 등교 거부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만들려는 부모도 있다. 가고 싶지 않은 아이를 야단치고, 팔을 잡아당겨 집 밖으로 끌어내 차에 태워서 교문 앞까지 데려가는 한이 있더라도 아이가 학교를 안 가려고 하는 현실을 부정하려고 한다. (중략) 등교 거부는 아이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용기를 내어 표현한 행동이다. 그 용기 있는 결단을 ‘패기가 없다’고 치부해버리는 부모야 말로 용기가 부족한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반응이 내게 너무나 신선하고 멋지게 느껴졌다. 부모가 이렇게 대범하게 생각한다면 아이들은 참으로 든든하고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이렇게 믿음이 생기면 아이들은 자신이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부모를 믿고 의지할 수 있게 된다. 어떤 부모들은 이렇게 묻는다고 한다. “그러면 왜 힘든 마음을 말로 표현하지 않는거죠?” 그 이유는 사실대로 말하고 싶어도 부모가 과연 그것은 진정성 있게 들어줄지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중학교 2학년 사춘기가 한창이던 나는 당시 견딜 수 없을 만큼 마음이 힘든 상태였다. 예측할 수 없이 쏟아지던 아버지의 이유 없는 비난과, 어려운 집안사정, 그리고 가장이 되어 힘들게 살아가는 어머니를 보며 나는 하루하루는 살얼음판 속에서 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나의 마음을 단 한번도 밖으로 표현하지 못했다. 나 역시 그것이 부모님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할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심리적인 고통은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었는데 주로 몸이 아픈 것으로 나타났다. 나는 날마다 체하거나 장염에 걸렸고, 배가 아프거나 어깨가 결리는 등 스트레스와 관련한 신체증상을 달고 살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나처럼 심리적인 스트레스가 외부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할 경우 이를 신체적으로 표현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이는 심리적인 문제보다 신체적인 문제를 일으킬 때 주변사람들에게 더 쉽게 이해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 너무 힘들고 우울해요” 라고 하는 이야기를 말 대신 몸으로 한 것이다. 부모님은 자꾸 체하고 아파하는 나를 한의원에 데리고 가셨다. 그런데 그 때 한의사 선생님이 하시던 말씀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분은 가만히 내 진맥을 짚으며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이 아이는 지금 몸이 아픈 것이 아니에요. 우울하고 화가 많이 나 있습니다.” 의사선생님의 그 말 한마디에 누군가 내 마음을 알아준다는 생각에, 내 가슴에서는 울음이 터졌다. 물론 나는 그 앞에서 진짜로 눈물을 흘릴 용기가 없었다. 눈물도 용기가 있어야 흘릴 수 있는 것이다. 그만한 용기가 없으면 결국 꾹꾹 눌러 그 울음도 삼켜버리게 된다. 그 때의 내가 그랬다. 그리고 진료실을 나와 가볍게 넘기듯 어머니에게 말했다. “선생님은 어떻게 아셨을까? 나 요즘 우울하거든” 내 물음에 어머니도 그냥 가볍게 말씀하셨다. “그래? 왜? 세상에 우울하지 않은 사람은 없어” 우리의 대화는 그쯤에서 끝이 났고 나의 신체증상은 계속되었다. 내가 우울하다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 어머니는 조금 당황하신 듯 한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는 “세상에 우울하지 않은 사람은 없어”라는 말로 나의 우울함을 보편화시켰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어머니 역시도 내 우울함을 살필 용기가 없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부모라는 자리역시도 많은 경험과 배움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여러 단계를 거쳐 성장하듯 부모도 아이를 키우면서 함께 성장해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책에 나온 작가의 진솔한 이야기가 좋았다.     

 첫째와 둘째 아이가 어렸을 때 나도 꽤 엄격하게 아이들을 대했다. TV는 일부러 사지 않았고, 당시 굉장한 인기몰이였던 게임기도 사주지 않았다. 나중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사 준 게임기로 몰래 숨어서 게임하는 현장을 목격하고는 버럭 화를 내며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게임기를 부셔 버린 적도 있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아이에게 가장 좋은지를 항상 고민하였고, 매 순간 필사적이었다. 부모가 제대로 아이를 이끌어 주지 못하면 결국 제대로 훈육을 못 받은 아이는 행복해질 수 없다고, 내 마음은 육아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했다.


 게임기를 부셨다는 저자의 솔직한 고백에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이렇게 아이들을 잘 키워온 부모도 아이들에게 화를 내다니 나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작가는 많은 경험을 통해 아이들을 믿는 교육으로 방침을 바꾸었고 그 후부터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진심으로 즐거웠다고 이야기 하였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자신을 알고 변화시키고자 하는 부모의 노력일 것이다. 누구든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듯이 부모 역할도 처음부터 만족스러운 사람은 드물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이와 함께 많은 것들을 경험하면서 부모 스스로를 알고, 아이를 알고 부모와 아이의 관계가 무엇인지에 대해 점차 배워나가는 것이 육아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무조건 잘해야 하고 좋은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현재의 나의 상황은 고려하지 않은 채 이상적인 부모상을 목표로 삼고 이루려고 하다보면 결국은 지쳐 나가떨어지고 말 것이다. 아이의 성장이 하루 이틀 사이에 일어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부모의 성장 역시도 충분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조금씩 조금씩 깨닫고 있다. 저자는 말한다. 부모가 이끌어주지 않아도, 명령하지 않아도, 칭찬하지 않아도 아이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능숙하게 잘하고 싶다고 생각하며 계속 행복해지고 싶어 한다고.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 아이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부모는 아이의 행복을 위해 아이를 이끌어 나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아이에게는 행복을 찾는 안테나가 이미 내재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부모가 잘못된 방향으로 아이를 이끌어 예민한 안테나의 기능을 떨어트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누구에게나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며 아이도 예외는 아니다. 불행해지고 싶은 아이는 아무도 없다. 부모 스스로 자신의 어린시절을 생각해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아이를 믿는다는 것은 언젠가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직접 옷을 치울 수 있게 될 거라고 믿는 것이 아니다. 홀로 살기 시작하면서 치울 수 있게 될 거라고 믿는 것하고도 다르다. 하물며 언젠가 부모에게 감사 할 것이라고 믿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무엇을 믿는 걸까? 바로 이 아이는 애정을 줄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믿는 것이다.


 마지막 구절이 내 마음을 울렸다. 이 글을 읽기 전까지 내가 아이를 믿는 다는 것은 ‘우리 아이는 무엇이든 잘 할 거야’, 혹은 ‘우리 아이는 언제나 내 말을 잘 듣고 착하게 행동할거야’와 같이 엄마인 나를 중심으로 한 생각들이었다. 그러나 작가는 아이를 믿는다는 것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이가 충분히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 이것은 부모가 아닌 아이를 중심으로 둔 진정한 믿음이었다. 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부모가 자신을 온전히 믿는다는 것을 진정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의 불안을 되짚어 본다. 다른 아이들은 다 열심히 공부하는데 우리 아이들은 내가 잔소리를 하지 않으면 매일 놀기만 한다는 생각 아래에는 이러다가 우리 아이만 뒤처지는게 아닐까 하는 조바심이 숨어있었다. 이렇게 지내다가는 대학에 가는 것도, 원하는 직업을 얻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불안이었다. 삶이란 실험실 연구처럼 A를 수행 한다고 반드시 B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런 사실을 머릿속으로는 잘 알면서도 정작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으니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머리로부터 가슴까지의 거리라고 하는 말이 꼭 맞았다. 책을 읽고 나의 조바심을 마주하고 다시 아이들을 본다. 아이들이 하루종일 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챙기지 않아도 숙제를 하고 때때로 책을 읽는다. 물론 티비를 보고 장난을 치는 시간이 훨씬 더 많긴 하지만 아직 어려도 자신이 해야 할 몫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듯하다. 아이들을 믿는다는 것은 엄마인 내가 욕심, 불안, 걱정이 잔뜩 묻은 안경을 벗고 있는 그대로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나에게는 아직 그 안경을 벗는 일이 너무 어렵지만 조금씩 천천히 안경을 벗고 있는 시간을 늘려가려고 한다. 안경을 벗고 맨 얼굴로 보는 아이들의 모습은 너무도 사랑스럽다. 어쩜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나에게 와주었는지 고마움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안경을 벗는 연습을 한다. 언젠가는 그 안경이 있었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는 날이 오기를 꿈꾸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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