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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 Oct 17. 2020

엄마 치유

상처받은 어린시절의 기억을 안고사는 엄마들의 치유를 위하여

혜민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을 읽고


 이유도 없이 마음이 힘든 시기가 있었다. 일상은 평소와 다름없는데 괜시리 마음이 부산해서 어떤 것을 해도 집중이 잘 되지를 않고 쓸데없는 망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내가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고 자꾸만 자신이 없어졌다. 남들은 다 웃으면서 잘 지내는 것 같은데 나는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것도 어설프고 혼자 겉도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어지러운 마음을 좀 달래볼까 하고 들렀던 도서관에서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평소 존경하던 혜민스님의 책이라 더 반갑게 느껴지기도 했다. 언젠가 상담관련 학회에서 스님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내가 워낙 팬이기도 했지만 스님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내 마음도 저절로 편안해 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책도 스님의 목소리처럼 부드럽게 내 마음을 울렸다. 한구절 한구절 천천히 글을 읽으며 글에 반응하는 내 마음을 살폈다.     

인도의 스승 오쇼 라즈니쉬는 인간이 성숙해진다는 것은 우리 마음을 바위처럼 단단하게 만들어서가 어떤 상처도 받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고, 반대로 자신과 타인의 상처를 대면할 용기가 생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상처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더 민감하게 느끼면서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수용하고 지혜롭게 대처해나갈 때 비로소 우리 영혼은 성숙해진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수용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단점이나 부정적인 감정들은 직면하기보다는 회피하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에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이를 피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상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은 우리를 성장시키는 밑바탕이 된다. 내게 상담을 지도해주신 한 교수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간혹 상담자들 중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절대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꼼짝 않고 버티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좋은 자세가 아니라고 하셨다. 오히려 스스로 자신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주변의 선배 상담자나 동료 상담자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더욱 올바른 방법이라고 알려주셨다. 

 오랜시간 나는 남들에게 나의 부족한 부분을 보여주는 것을 싫어했다. 아니 더 정확히 이야기 하자면 나는 그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몰라도 아는 척, 없어도 있는 척, 상처받아도 괜찮은 척을 하면서 내면의 소리를 애써 외면했다. 하지만 내가 가면을 쓰고 ‘척’을 하면 할수록 나는 공허하고 불안했다. 주위에서는 나를 밝고 활기차다고 이야기 했지만 사실 나는 외롭고 우울했다.

 인간 중심 상담의 창시자인 미국의 심리학자 칼 로저스는 우리가 외로운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줬을 때 상대가 수용해주지 않을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인해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즉 상대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가면을 쓰고 사람을 대한다. 진짜 자기 모습을 감춘 채 사회적 시각에서 봤을 때 비난받지 않을 수준에서 안전하고 피상적인 만남만을 가지는 것이다... 칼 로저스에 의하면 부모로부터 안전한 분위기에서 수용적인 지지와 긍적적인 관심을 받지 못한 경우 아이들에게 그러한 심리적 벽이 생긴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란 아이는 부모 앞에서 자기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하고 억누르는 게 일상화되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자기감정을 숨기고 모든 것이 문제없는 듯 가면을 쓰고 행동한다. 


 나 역시 로저스의 말에 동의한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우리집에서 나의 감정, 특히 화나 짜증 등의 부정적인 감정이 수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부터 진짜 감정을 억압하고 가짜감정만을 표현하면서 살았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쯤 이었던 것 같다. 당시 나보다 두 살 위인 오빠가 학교에서 1박2일 행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오빠는 다른 친구들은 부모님이 학교 앞으로 마중을 나와 짐도 들어주고 집까지 같이 돌아갔는데 우리 부모님만 나오지 않아 힘들었다며 울먹이면서 투정을 부렸다. 그런데 그 때 아버지는 오히려 오빠에게 화를 내며 남자가 그런 것 가지고 운다고 혼을 내셨다. 그 때 그 상황을 지켜보던 어린 나 역시도 오빠가 속상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오빠가 혼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런 일로 혼나지 않도록 되도록 내 나쁜 감정을 표현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이제와 내가 아이 엄마가 되고 나서 돌이켜보니 만약 내가 그 때 부모님의 상황이라면 나는 아이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해주었을 것 같다. 그리고 우는 아이를 안아주고 달래주었다면 아이는 금방 서운함이 풀렸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그 일을 기억하고 있을 확률도 매우 낮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때 오빠는 부모님을 탓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자신의 서운함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더 컸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버지는 자식이 자신을 ‘공격’한다고 생각 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그렇게 과민하게 반응을 하고 화를 내셨던 것이다. 

 때로 부모들은 아이가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면 부모 자신을 무시하거나 공격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큰 화나 짜증으로 아이의 감정을 억누르려고 한다. 하지만 아이는 그저 자신의 힘든 마음을 표현한 것일 뿐 부모를 공격하고 싶은 마음도, 무시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오히려 이러한 옳지 못한 피드백이 계속 될 때 아이는 정말로 부모를 공격하고 싶어지거나 무시하게 될 수도 있다. 


 부정적인 감정을 숨기고 ‘밝은 가면’을 쓴 나는 항상 주변사람들로부터 활발하고 명랑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내가 진짜 ‘나답다’는 생각이 들 때는 누구를 만나 즐겁게 웃고 이야기 할 때가 아니라 혼자 도서관에 가거나, 조용한 카페에서 책을 읽거나, 가만히 내 내면의 이야기를 들을 때였다. 그때는 가면을 벗고 진짜 나와 만나면서 편안함을 느꼈다. 사람들을 만나면서 활발하고 밝은 모습을 보여주는 만큼이나 나는 긴장을 하며 남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은 가면이 너무 두꺼워서 그런 나의 진짜 마음을 알지 못했는데 한꺼풀 한꺼풀 그것들을 벗어던지면서 진짜 나를 조금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동료 상담선생님이 언젠가 나에게 나의 밝은 기운이 내담자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 때 나는 그 선생님에게 상담할 때의 나의 모습은 조금 다르다고 이야기를 했었다. 상담실에서의 나는 매우 차분하고 조용하다. 그리고 그럴 때 나는 내담자와 ‘진짜 내’가 진심으로 만나 아주 소중하고 중요한 만남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고 내가 이중인격이거나 이상한 사람(?)은 아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제각각 자신만의 가면을 가지고 있고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그에 맞는 적당한 가면을 쓰는 것 또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진짜 나의 모습만 보여줘야지 다짐하고 친구를 만났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나의 내면만 탐색한다면 이 또한 옳은 방법은 아닐 것이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적당히 사회적인 나’와 ‘내 안의 진짜 나’를 상황에 따라 적절히 맞출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 중 한쪽만이 너무 우세하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남들에게 보여주는 사회적인 나만 중시하다보면 내면은 공허해지기 쉽고, 내 안의 진짜 나에게만 집중하면 타인과의 교류가 어려울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 자신과 만나는 시간과, 타인과 만나는 시간의 균형을 맞추는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건강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균형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지금 나의 모습’과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의 균형에 관한 것이다.

현재의 나와 되고 싶은 나 사이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쉽게 우울해집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내 실력을 정직하게 진단하여 실현 가능한 목표로 재설정해보세요. 하나의 목표를 이루고 나면 그것보다 조금 더 높은 목표를 성취하는 것이 쉬워집니다. 


 나는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다. 아이들에게 짜증내지 않고, 끼니마다 맛있는 음식을 차려주고, 학습적인 부분에서도 부족하지 않도록 지도해 주는 엄마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엄마였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툭하면 아이들에게 내 감정을 쏟아내고, 삼시세끼를 반찬가게 음식으로 준비하며 아이들의 공부를 봐주면서 울화통을 터트리는 부족하고도 부족한 엄마였다. 처음에는 이런 나를 보는 내 자신이 참 힘들었다. 나도 잘하고 싶은데 왜 이리 뜻대로 되지 않을까 자꾸만 자책을 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는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내 실력을 정직하게 진단하는 것’과 ‘실현 가능한 목표를 설정하는 것’을 간과했던 것 같다. 나는 불안이 높은 성격이다. 그러니 아이를 편안하게 보는 것이 내게는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나의 성격을 인정하지 않은 채 아이들을 대하다보니 나의 불안을 자꾸만 아이들에게 전가시켰다. 책을 읽고, 상담을 받고, 공부를 하면서 내가 가장 큰 도움을 받은 것은 나 자신을 조금씩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남편 없이 혼자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는 때면 나는 왜인지 모르게 늘 신경이 곤두섰다. 처음에는 내가 그런지 조차 알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날 남편과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다닐 때와 나 혼자 아이들을 데리고 나갈 때 내 심리상태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에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어린 아이들을 혼자 케어하는 것이 힘들어서 그런 것일까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더 자란 후에도 변하지 않는 나를 보면서 나의 불안을 인정하고 수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좋은 엄마가 되고 싶은 나의 목표도 실현 가능한 것으로 변화시켰다. 절대 화를 내지 않는 엄마가 되려는 지킬수 없는 목표가아 아니라 짜증이 나더라도 내 감정을 컨트롤 하려고 노력하고 최대한 내 마음을 즐겁게 유지하고 아이들도 밝게 대하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지금도 애쓰고 있다.      


스스로가 알아서 변화하지 않으면 세상이 나를 변화하도록 만듭니다.물론 후자가 훨씬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그 고통은 내 영혼을 성장시키기 위해 있는 것이지 우리를 괴롭히려고 존재하는 것은 아니에요. 

   

 이 글귀에 내 마음이 아주 오랫동안 머물렀다. 스스로 알아서 변화하지 못하는 나를 위해 삶이 준 선물은 육아였다. 내게 육아란 행복하고 웃음만 가득한 핑크빛 세상이 아닌, 내가 보기 싫어하던 진짜 내 모습을 만나 때로는 고통스럽고 한편으로는 두려운 과정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고통속에서 나는 성장할 수 있었다. 혜민스님의 말씀처럼 고통은 나를 괴롭히려고 온 것이 아니라 부족한 나를 성장시키기 위해 온 것이었다. 예전에 어떤 책에서 이와 비슷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고통이라는 선물을 통해 성장하는데 아무도 그 선물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선물의 참 의미를 알게 된 사람이라면 조금은 부드러운 마음으로 고통을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를 키우는 일은 여러 의미로 엄마들에게 진정한 선물이 아닐까 싶다. 부디 모든 엄마들이 자신이 받은 선물의 의미를 잘 알고 이를 통해 성장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 또한 선물의 의미를 더 넓은 시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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