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은 어린시절의 기억을 안고사는 엄마들의 치유를 위하여
이 책의 주인공인 휴는 성공이 모든 것을 보장할 것이라 믿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분주했고, 제대로 된 휴식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로부터 권고사직을 받고 정신과 의사를 찾아간 뒤 상처받은 마음 속 어린아이를 만나게 되었다.
휴는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둘째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형을 편애했고 휴는 아버지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 무척 애를 썼다. 학창시절에는 열심히 공부했고, 결혼도 아버지가 원하는 여자와 했다.
지난날의 휴에게는 아버지에게서 받은 편애의 상처가 무의식에 남아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인정과 지지에 굶주린 사람이었다. 그래서 남들로부터 사랑받고, 칭찬받고, 대우받고, 인정받고, 인기를 얻으려고 발버둥치던 사람이었다. 내가 아니라 남의 기준으로 사는 사람이었다. 가정에서는 아버지에게, 학교에서는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사회에 나가서는 상사와 부하직원에게 애정과 인정을 받기 위해 공부벌레, 일벌레가 되었다. 자기 스스로 자기의 삶을 즐길 수 없었다. 그의 인생의 키를 남들이 잡고 있었다.
인간중심상담을 창시한 칼 로저스는 인간은 누구나 성장가능성이 있으며 이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인생 목표와 행동 방향을 스스로 결정할 능력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떤 부모는 아이에게 조건적인 관심을 보이며 아이가 조건에 부합 할 때만 사랑과 관심을 보여준다. 이러한 부모의 조건적 가치 부여는 아이의 자아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결국 아이는 자신의 욕구를 포기하고 부모의 기준에 맞게 행동함으로서 부모로부터 관심을 받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아이가 원하는 것과 부모가 내세우는 조건의 불일치는 아이에게 심리적인 불편함을 가져온다.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조건 없는 사랑과 충분한 지지이다. 그러나 휴처럼, 또 나처럼 조건적 사랑을 주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불안을 느끼게 된다. 내가 부모가 원하는 조건에 맞게 잘 행동하고 있는지 항상 살펴야 했기 때문이다. 아마 나뿐 아니라 많은 어린 휴들이 부모의 인정을 받기위해 무던히도 노력했을 것이다.
둘째가 태어나기 전까지 나는 한 직장에서 쭉 근무를 했다. 입사성적도 좋았고 업무능력도 인정받아 주요 부서로 배치되었다. 그런데 내게는 말 못할 어려움이 있었다. 주어진 일은 어떻게든 해낼 수 있었지만 아버지 연배의 차장님이나 부장님을 대하는 것이 너무도 어려웠던 것이다. 윗분들이 업무에 대해 질문을 하실 때는 명확히 알고 있는 것을 대답하는 것도 조심스럽고 주저하곤 했다. 부장님의 의견보다 내 의견이 더 낫다고 생각할 때도 나의 의견을 말해본 적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데 정말 단 한번도 내 의견을 내세운적이 없었다. 그리고 심리학을 공부하기 전임에도 어렴풋이 내가 아버지 연배의 분들을 어려워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나는 그분들을 아버지처럼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질책을 받는 것이 두려워 잘하기 위해 애쓰고 순종적으로 행동했다. 덕분에 조직생활에서 싹싹하고 야무지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사실 나는 늘 불안하고 초조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아버지가 언제나 나를 따라다니며 나를 질책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에는 ‘내적 대상관계’란 말이 있다. 유년기에 어떤 중요한 인물(대상)과 가졌던 관계가 마음속에 내재화되어 행동 패턴을 만든다는 것이다. 예컨대 휴는 가해자인 아버지와 그 앞에서 위축된 피해자의 관계를 무의식에 갖고 있었다. 이 내적 대상관계는 그의 생활 속에서 때때로 현실관계로 나타난다... 이런 현상은 휴의 무의식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그래서 휴는 자기가 이런 내부 고발자를 가지고 있었고 그 앞에서 늘 주눅 든 아이처럼 살아왔다는 사실을 몰랐다. 즉 자신의 심리적 현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자기 마음이면서도 자기가 모르는 마음이 있다. 이것이 무의식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내 마음속에 있던 내부 고발자를 볼 수 있었다. 나 역시도 휴처럼 내부 고발자와 함께 살고 있었지만 그 사실조차 알지 못한 채 지냈다. 책에서는 이러한 무의식의 갈등을 드라큘라에 비유해 표현하였다. 드라큘라는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햇빛을 받으면 사라져버리는 것처럼 무의식에 이성의 햇빛이 비추면 그 무의식을 힘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성적으로 이러한 사실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단박에 갈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처음의 빛은 아직 약하고 흐리기 때문에 드라큘라의 실체를 완전히 파악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자신을 내면을 살피며 과거를 대면할 수 있는 힘이 점점 세지면 어느 순간에는 드라큘라를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을 읽는 시간은 내게 치유의 여정과 같았다. 이 책을 읽던 어느 날 밤에 잠을 자는데 꿈에 친정부모님이 나왔다. 그리고 꿈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부모님께 소리를 질렀다. 뭐라고 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이제 그만좀 하라고 했던 것 같다. 늘 순종적이고 모범생처럼 살아왔던 나에게 비록 꿈이었지만 부모님께 소리를 지른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속이 시원하기도 했다. 현실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나의 내면에 쌓인 것들이 참 많았구나 하는 것을 알았고 그런 찌꺼기들이 조금이나마 씼겨나간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 이런 과정은 사춘기 때 이루어져야 할 부분이었다고 생각한다. 사춘기 시절 나의 힘든 마음을 알아주지 않은 부모님께 반항하고, 저항해 보았다면 해결되지 못한 감정들이 지금까지 이렇게 많이 남아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는 그러한 감정들이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표현되어지지 못했고 이렇게 처리되지 못한 감정은 나의 어딘가에 수북히 쌓여있다가 마흔이 다 된 지금에 와서야 이렇게 터져 나오게 된 것이다.
자신 안에 있는 아이가 드러나기 시작하면 마음이 불편해질 수도 있다. 잊었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당시의 상처가 드러나고 직면하기 힘들었던 마음의 고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새삼스레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이 원망스러워지기도 한다. 특히 이미 다 늙으신 부모가 원망스러워지기도 한다... 저 깊은 곳의 고통이 되살아나면서 분노를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 현실의 부모, 혹은 어린시절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과 갈등을 겪을 수도 있다. 마음속의 아이가 현실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마음의 쉼을 얻고 싶어 시작했던 여정이 잠잠하던 바다를 격랑의 파도로 휩쓸어 버린다.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 말기 바란다. 당신은 제대로 된 길에 들어섰다.
나 역시도 내면의 어린 나를 만나면서 직면하기 힘들었던 기억들이 하나둘씩 떠올라 매우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우물처럼 과거의 아픈 기억들이 끝도 없이 올라왔다. 하나가 사라지면 또 하나가 올라오고 끝이 없는 비디오테이프가 머릿속에서 계속 상영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음만 힘든 것이 아니라 몸에도 영향을 주었다. 어깨가 무겁고 손끝 발끝이 저릿저릿했다. 가슴이 답답하고 자꾸만 눈물이 났다. 현실에서는 아이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해야 했는데 나의 몸과 마음이 자꾸만 과거의 바다로 들어가서 겁이 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과거라는 바다의 가장 깊은 곳까지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이전에도 가끔씩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픈 상처가 떠오르면서 과거의 바다에 발을 담근 적이 있지만 그 때는 그 차가움에 놀라 언른 발을 빼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현실로 돌아오곤 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용기를 내서 조금씩 조금씩 바다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갔다. 그동안 캄캄하게만 느껴졌던 바다로 직접 들어가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보기로 마음 먹었다. 여전히 겁이 났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용기가 더 컸고 어느 정도 자신도 생겼다. 욕심내지 않고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파도를 넘어 바다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
과거가 되살아나 마치 현실인 듯 마음이 고통스러워도, 그것은 실제 현실이 아니다. 그러니 고통으로부터 도망가지 말고 직면하기 바란다. 그 고통이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면 자신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나를 발목 잡고 있던 어린아이가 무엇인지 계속 생각해보라. 그 아이가 어떤 아이였는지 아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이미 치유의 길로 들어 선 것이다.
내가 두려워하던 그 부모님은 더 이상 현실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의 부모님은 딸이라면 뭐든 하시는 분들이다. 공부하는 딸을 위해 손주들을 돌봐주시고 내가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이 생기면 어머니는 내 입이 떨어지기 무섭게 요리를 시작하셨다. 아버지는 지하철을 무료로 탈 수 있다며 어머니가 만든 음식을 우리 집까지 가져다 주시곤 했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과거의 부모님과 싸우고 있었다. 너무나도 아이러니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괴물과 싸우는 것 같았다. 이런 상황이 너무도 혼란스러워서 자꾸 그냥 피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피하는 것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실의 부모님과 진정으로 만나기 위해 나는 과거의 부모님을 꼭 다시 만나 화해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
이제는 어른이 된 나의 눈으로 부모님의 내면아이를 보았다.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나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하루도 싸우지 않는 날이 없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하루만이도 부모님이 싸우지 않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고 하셨었다. 이제는 내가 그 때의 어린 아버지를 본다. 부모님이 고성을 지르고 때로는 폭력이 오가는 싸움속에서 예민한 아버지는 정말 불안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불안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모른 채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불안을 다시 자식들에게 대물림했다. 물론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몰랐을 뿐이다. 어른이 된 내가 아버지의 내면아이를 보니 안타까움에 눈물이 났다. 예전의 나처럼 불안에 떨고 있는 작은 아이가 보였다. 그렇게 아버지에 대한 미움의 감정은 안쓰러움으로 변해갔다. 어머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언제가 친정어머니와 전화를 하다가 어머니가 나에게 말씀하셨다. “니가 무슨 걱정이 있니.” 그 말이 내 가슴속에 박혀 오랫동안 묘한 감정을 남겼다. 무능한 남편을 두고 생계를 책임지기위해 돈을 벌러 나섰던 어머니에게는 그저 직장생활을 하는 남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딸이 편안하게 산다고 생각하셨던 것이다. 정작 나는 과거에 묶여 옴짝달싹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처음에는 남의 속도 모르고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어머니에게 화가 났다. 그런데 조금 지나니 어머니의 입장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별다른 어려움 없이 커온 어머니에게 아버지와의 결혼은 삶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사건이었을 것이다. 남편이 돈을 벌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직장에 나갔지만 자존심이 강한 어머니는 그런 자신의 처지를 남들에게 이야기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학벌은 그런 어머니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였다. 생각이 그렇게 이어지고 나니 같은 여자로서 어머니의 고단했던 삶이 느껴졌다. 매번 같은 이야기로 반복되던 어머니의 하소연도 예전처럼 듣기 싫지 않았다.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때로는 그분들도 누군가에게 진정으로 이해받고 싶었을 것이다.
치유를 시작하며 조금씩 부모님을 이해하게 되었지만 아직도 나의 내면에는 해결해야 문제들이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고 보면 부모가 한 사람의 인생에 미치는 영향을 참으로 막강하다는 것을 시간이 지날수록 느끼고 또 느낀다. 나는 과연 우리아이들에게 어떤 엄마일까. 아이들이 힘들때면 언제든 내 품에서 편하게 쉬고 그 안에서 다시 세상으로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가지고 온 자신만의 씨앗을 건강하게 싹튀울 수 있도록 건강한 양분이, 따듯한 햇살이, 촉촉한 봄비가 되어주는 그런 엄마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