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은 어린시절의 기억을 안고사는 엄마들의 치유를 위하여
‘엄마’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단어들이 있다. 사랑, 헌신, 희생, 따듯함 등등. 이처럼 엄마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힘이 되고 편안함을 느끼게 해준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정말 이 세상 모든 엄마들은 자식을 위해 헌신하고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사는 것일까? 이 책의 작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좋은 엄마’라는 통념에 조용히 반기를 들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나쁜 엄마는 대부분 책속에 존재한다. 콩쥐팥쥐, 신데렐라, 백설공주의 엄마처럼. 이야기 속 새엄마들은 이들을 미워하지만 그런 새엄마조차 자신의 진짜 아이에게는 사랑과 정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작가는 책이 아니라 진짜로 존재하는 ‘나쁜 엄마’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세상은 늘 어머니의 한없는 사랑과 희생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그렇지 못한 상황, 특별히 힘든 상황에서 견디어왔을 자녀들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 작고 힘없는 그들에게는 힘들다고 말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그냥 조용히 견디거나 세상 너머로 사라지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사랑받지 못한 것은 자식 혼자 감당해야 할 팔자문제였다. 엄마를 원망하거나 비난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어쩌면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누군가 만들어 둔 틀에 엄마를 규정해 넣고 엄마라면 당연히 이런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아닐까.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다르고 마찬가지로 이 세상 엄마들 역시 모두 다르다. 분명 따듯한 엄마도 있지만 차가운 엄마도 있을 것이고,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한 엄마도 있지만 자식을 사랑하기 힘들었던 혹은 사랑을 표현하기 어려웠던 엄마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세상 모두가 엄마는 당연히 너를 사랑했다고 말해버리면 정작 사랑받지 못했다고 느꼈던 이의 상처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혹은 그녀는 아프다는 말도 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런 자기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삭혀지지 않는 원망과 분노가 혹시라도 보여 질까 꼭꼭 눌러놓고 두려움에 떨고 있을 수도 있다.
나는 엄마가 그렇게 무서웠다. 엄마가 갑자기 짜증을 내며 소리를 치면, 마치 비수가 날아와서 가슴에 꽂히는 기분이 들었다. 엄마의 가시 돋친 욕설은 매보다 참기 어려웠다. 내가 실수를 했을 때 날아오는 짜증은 그럴 수 있다 쳐도, 엄마가 잦은 건망증으로 자신의 물건을 찾지 못해 자식들에게 화풀이를 할 때엔 어린 마음에도 ‘이건 잘못되었다’ 싶었다. 왜 엄마의 건망증을 자식들이 책임져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짜증은 예측할 수 없을 때가 많았고, 무방비로 있다가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유교문화가 뿌리깊게 이어진 우리 사회에서 효(孝)는 가장 기본이 되는 덕목이다. 부모에게 불효하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부모를 원망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너무도 힘들어서 차라리 아픔을 꽁꽁 싸매고 가는 것이 더 쉽게 느껴질 정도다.
나에게 두려움과 원망의 존재가 엄마가 아닌 아버지였다. 나의 아버지 역시 저자의 어머니처럼 내가 영문도 모르는 사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그런 상황을 예측할 수 있으면 준비라도 할텐데 단지 아버지의 컨디션에 따라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혼이 나다보니 나에게 아버지는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당연히 사랑이나 애정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아버지가 싫었으면서도 주변 친구 누구에게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다른 아이들이 나를 이상하게 볼까 두려웠고 아버지를 나쁘게 말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는 나를 그냥 평범한 가정에서 사랑받으며 사는 딸로 포장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그렇게 가면을 쓴 나는 가면 속 민낯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지금도 그 때를 돌이켜보면 고군분투하던 안쓰러운 내 모습이 떠오른다.
자연스럽게 사랑을 받고 자라 탄탄한 기반을 가진 사람과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사람은 출발지점에서부터 차이가 나타난다. 긍정의 기반이 있는 사람은 곧바로 평지 위를 달려갈 수 있지만, 구멍 뚫린 사람은 여기 저기 난 구멍을 메우는 데에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해야 한다. 누구에게는 쉽고 당연한 것 같은 친구 교제가 어렵고, 자기표현이 어렵고, 심지어 소망을 갖는 일조차 어렵다. 어차피 우리는 모두 행복이라는 길을 가려고 하는데, 그렇게 구멍을 메우면서 가야하는 것은 손해가 아닐 수 없다.
책의 이 부분이 얼마나 와 닿았던지 한참을 곱씹어보았다. 특히 구멍 뚫린 사람은 여기저기 난 구멍을 메우는 데에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한다는 대목은 꼭 과거의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뚫린 구멍을 막는데 에너지를 쓰는 것은 물론이고 타인에게 그 구멍을 보이지 않기 위해 쓸데없는 애를 썼기 때문에 항상 남들보다 더 지치고 힘들었다.
이 책의 추천사에서 이 책은 진실에 관한 책이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진실을 알아야 문제를 해결하는 시작점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진실이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병원에 가면 우리는 의사선생님에게 아픈 증상을 자세하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환자의 설명과 의사의 소견을 통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처방이 내려진다. 마음의 상처 또한 마찬가지이다. 아픈 상처를 드러내야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처방도 받을 수 있다. 아픔을 인정하지 않거나 꽁꽁 숨겨두는 것은 아픔을 치유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막상 드러내놓고 보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아프지 않은 상처일 수도 있고, 생각보다 더 아픈 상처여서 꼭 치료가 필요했던 것일 수도 있다.
상처를 덮어두고 살던 내가 치유를 결심한 것은 엄마가 되고 아이를 키우면서 나의 어린 시절 기억이 나를 힘들게 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는 만날 일 없던 어린 시절의 나를 아이를 키우면서 만나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두렵고 무서워서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들이 아이를 키우면서 자꾸자꾸 마음속에서 올라왔다. 그리고 그런 감정들은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아이에게 영향을 주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아이들에게 화를 내고, 짜증을 내며 과거에 내가 풀지 못했던 감정들을 힘없는 아이들에게 풀고 있었던 것이다. 육아서를 읽고, 상담을 받고, 상담공부를 하면서 아이에게 난 화가 사실은 나 스스로에게 난 화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이의 잘못을 지적하였지만 그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이 내가 가장 싫어하던 나의 모습이었기에 더욱 참을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처음 상담을 받으러 갔던 날이 기억난다. 상담선생님은 나에게 상담에서 어떤 문제를 다루고 싶은지 물으셨다. 나는 아이들과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고 일주일에 한번씩 상담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상담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날 선생님은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늘봄님은 상담에서 아이와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우리가 상담실에서 한 이야기는 모두 늘봄님 자신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 같아요.” 상담선생님의 그 말씀을 듣는데 내 머릿속에서 묵직한 징이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 그랬다. 아이들과의 문제는 그저 겉으로 드러나는 껍데기일 뿐이었고 사실 진짜 문제는 나의 내면에 있었다. 아이들이 나를 힘들게 해서 육아가 힘든 것이 아니라 나의 아픈 상처가 건드려졌기 때문에 육아가 힘들게 느껴졌던 것이다. 물론 어린아이들을 보살피는 일은 체력적으로 지치고 정신적으로도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쉽게 짜증이 나고 그 감정을 아이들에게 풀어냈다.
문득 몇 해 전 기억이 떠올랐다. 다섯 살 된 첫째가 어느 날 화가 나서 냉랭해진 나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와 물었다. “그런데 엄마 왜 이렇게 화나 났어요?” 나는 그 원인을 아이들에게 돌리며 차갑게 대답했다. “너희가 엄마말도 안 듣고 자기 물건도 제대로 안 치우니까 그렇지” 그런데 그 말을 하면서 무언가 불편했다. 정말 나는 그것 때문에 화가 난걸까? 기껏해야 5살 3살이 아이들이 자기 장난감을 안 치우는 것이 그렇게 화가 날 일일까?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는 이유를 들며 차가운 표정으로 아이를 대하는 나에게서 내가 너무도 싫어하고 무서워하던 어린시절 내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다. 그 일을 떠올리니 부끄럽고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런 차가운 나에게 먼저 다가와 물어준 아이에게 정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아이가 아직 나에게 마음의 문을 닫지 않았다는 사실이 정말 다행이었다. 그래서 나는 변해야했다. 나를 위해서 그리고 내 아이들을 위해서.
나를 치유하는 시간은 나와 만나는 시간이었고 구멍 뚫린 내 마음을 메꾸는 시간이었다. 엄마인 나의 마음이 메꿔질수록 아이들과의 관계도 더 부드러워졌다. 비록 내가 좋은 부모 밑에서 자라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나는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다. 다른 사람보다 노력이 더 필요하긴 하겠지만 그만큼 변화되는 내 모습을 보는 기쁨도 크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누군가도 혹시 마음에 구멍이 나 있다면 그 구멍을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치유하는데 에너지를 썼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노력은 나를 넘어 내 아이에게까지 행복한 빛을 선물할 것이다.